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2부



나의 기독교 경험담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2부

인류애 0 2,386 2003.07.03 16:19
1부에 이어 2부를 올립니다. 전체(글자크기 10, 라인 간격 싱글로 워드 42페이지 정도 분량)의 1/2쯤 번역된 것입니다.
발을 잘못 들였다는 생각도 들지만, 제 자신의 앎을 위해, 그리고 본 사이트를 찾는 분들을 위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하겠습니다.
주말의 좋은 읽을 거리가 되길 기대하며....^^


The Next Chapter 다음 장

나는 나의 기독교에 대해 진지했었고 만족했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말한다. 종종 기독교인들이 내가 전기독교인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내가 참기독교인이 아니었거나, 혹은 적어도 진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가정한다. 나는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 내가 기독교인이었을 때, 나는 나처럼 진정한 기독교인이고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거부할 수 없고 더더욱 무신론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빠진” 기독교인이란 아마 세상의 죄악들에 시험 당해서겠지만, 어떻게 나와 같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그 존재 조차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또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이 평생 계속될 것으로 믿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바에 의거, 나는 그를 잊거나 부정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룹을 이끌던 젊은 목사가, 우리를 믿음 안에 지속적으로 남게 하기 위한 경고로서, 평균적으로 10%정도의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버린다라고 말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한 성경 공부를 기억해본다. 만일 이것이 그날 밤 거기서 그가 경고했던 우리 그룹 약 2~30명에 대해 유효하다면, 우리 중 2, 3명은 이후 삶에서 기독교를 거부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방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떨어져 나갈 것인지를 생각하며 나는 명백히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사실, 속으로,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을 버리는 자는 먼저 진짜 기독교인이었을 리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말로 참 기독교인이 아니었더라도(당신의 “참”기독교인의 정의가 무엇이건 간에), 나는 내가 그러했었음을 확실히 완전하게 확신했었다. 나는 내가 거듭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있었으며 내가 나의 창조자인 예수와 개인적 교분을 가졌음을 진정으로 믿었다. 나는 또한 나의 기독교적 경험에 대해 내가 불행했거나 실망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말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내가 “영적으로 죽은” 그리고 충만하지 않은 교회에 다녔었음에 틀림없다거나, 거짓 기독교인들에 의해 피해를 보아서, 내게 참하나님을 보여주지 않은 잘못을 한 거짓 기독교인들에 대한 내 경험 때문에, 하나님한테 혹은 적어도 나의 하나님에 대한 부정확한 해석에 매우 화가 났음에 틀림없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건 내 경우가 아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본 글을 쓰면서, 기독교는 많은 좋은 기억들을 떠올려준다. 하나님에 무척 화가 나게 만든 어떠한 비극도 없었다. 혹은 도덕적 반항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건 내 머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유가 내가 발견한 지적 문제들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적어도 기독교 안에서, 혹은 유신론에서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더 많이 알기 원했던 것 외에 이미 알던 것 그 이상의 심오함을 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갈구 중에 나는 내가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것이 가능한 한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그리고 잘 알고 이해하려는 욕구를 촉발시켰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 마음과 힘과 영혼을 다할 뿐(마가복음 12:30에서)만 아니라 내 모든 정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랐다. 그리고, 철학, 논리, 과학적 사고 등의 지적 노력에 관심을 가져—대학에서 처럼—나는 내가 그 분야에 재능이 있고 따라서 내 기독교적 의무가 타고난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내 모든 정신을 다해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나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고 답이 어디로 가던 간에 질문하고 조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다. 내가 조심스럽고 기도하면서 가는 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고 내가 진리를 더 잘 알수록 하나님을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 여행의 결과에 대해 완전히 놀랐다.

나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떻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는지를 관련 짓기 전에 나는 나의 질문하기가 시작된 사건이 왜 그리도 중요할 수 있었는지를 말해야만 한다. 여러분이 곧 읽게 될 그 사건은 다소 사소한 것이었다. 내가 이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그리고 내 믿음의 확증으로 받아들이던, 여러 차례 경험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그러한 경험의 결과로 다음의 질문들이 내게 생겼으면 표준화된 대답들이 나를 확실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철학과 논리 공부를 통해 받은 훈련이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평가할 수 있게 해줌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헛된 철학에 집착하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졌고 인간에게는 옳게 보일지라도 기독교적 진리로부터 멀어질 사상들에 대해 조심스럽고 신앙심 깊은 경계를 했었다. 한참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새로운 사상들에 대해 배울 뿐만 아니라 사상들을 평가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배우고 있었고, 내 종교적 믿음의 전복을 입증하거나, 현재 내가 보는 것처럼, 그러한 믿음들 이상으로 나를 더 나아가게 해 준 것이 후자 관점이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해결이 시작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었고, 내가 배운 사상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사건을 이해하고 관조할 수 있는 가였다.

나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3학년 말에(나의 “두 번째” 3학년; 나는 한 학기를 쉬고 전공을 전환하여 1년 늦었다) 풀려나가기 시작했고, 그 때 나는 인터바시티 캠프에서(3번째 방문) 우리 그룹의 다른 리더들과 함께 다음해 활동 계획을 세우기 위해 1주일간 묵상했다. 나는 하나님께 나와 전체 그룹을 우리의 계획대로 인도해 달라고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이 다음 해에 우리가 X하기를 원한다고 내게 말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 X가 무엇이었는지 지금 기억할 수 없지만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우리가 함께 모여 그룹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를 기도했을 때, 우리는 모두 그 계획에 대해 흥분되었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의 길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길을 따름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전에도 하나님이 그를 섬기게 하기 위해 우리를 한 길로 뭉치게 하는 매우 놀라운 일들을 행함을 보았었다. 우리는 전에도 그가 우리 그룹에서 역사함을 경험했고, 따라서 우리는 그가 다시 그렇게 할 것으로 믿고 기대했었다.

나는 그룹에게 내가 믿는 바 하나님의 우리가 하기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우리 그룹의 다른 회원은 말하기를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가 Y하기를 원한다고 확신한다 했다. 반복하지만, 그것도 또한 온당한 기독교적인 일처럼 들렸다는 것 외엔, “Y”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동시에 X와 Y를 둘 다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둘 다 훌륭한 목표들이었으나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룹에 약간의 긴장감이 생겼다. “긴장감’이 서로에게 반감이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다툼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높은 이상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만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의 조합이 존재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대화하고 숙고하고 토론하고 기도하였고, 결국 Z를 하기로 결정했으며, 모두 하나님이 우리가 Z하기를 원했고 단체로서 우리를 그 결정으로 인도했다고 믿었다. 긴장감과 불확실성은 사라졌고 우리 모두는 안도했으며 다음 해에 Z하는 것에 기뻐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했으며, 하나님이 방금 우리 그룹에서 역사함을 경험했다고 완전하게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했다.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 되어 그 회의를 마쳤다.

이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많은 상충되는 것들을 말한다고 생각함을 잘 인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가정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나 나는 그가 계획을 갖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 날 나중에 이와 똑 같은 상황이, 기도와 하나님 말만 빼고, 앞서 언급했듯이 나와 관련이 있던 학교 라디오 방송국에서 발생했던 생각이 났다. 방송국에서, 우리는 평행한 경험을 했는데, 한 사람이 다음 해에 A를 해야 한다 하니 다른 이가 B를 해야 한다 했고, 긴장이 생겼고, 우리는 토론하고, 숙고하고, 기도는 안 했지만, 같은 종류의 결과에 도달했다: 우리 모두는 C를 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동의했고, 긴장은 해결되었으며, 우리 모두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계획에 흥분되어 모두 행복하게 우리의 즐거운 길을 갔다.

기도와 신의 말만 빼면 두 경험들은 거의 똑같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진실로 그리고 (어쨌든 그 날 후반까지) 의심 없이 그 IVCF모임에서 하나님을 느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내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흥분을 단지 느꼈던 것 같다. 아니, IVCF 경험이 훨씬 더 깊고 심오했다. 그렇지만 그 모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었다고 생각함으로써 내 자신에게 그것이 더 흥미롭고 중요하게 보이게 했을 수도 있었다. 그 여분의 흥분과 중요성이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었다는 내 믿음 때문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나는 IVCF경우에서 느낀 그 여분의 깊이와 심오를 하나님이 거기서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용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 깊이가 내가 그것을 증명하려고 이용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 믿음에 출처를 둘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긴장의 해소가, IVCF와 그 사명이 라디오 방송국보다 내게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훨씬 흥미롭고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마 라디오 방송국이 자신의 여가 활동과 사회 생활의 초점이었던 사람들도 그 회의에서 내가 IVCF 모임에서 경험했던 자기들에게 의미 있는 깊이를 경험했을 것이다.

전 같으면, 나는 우리의 IVCF모임에 일어난 일 같은 것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또 다른 가능한 설명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의 조사 없이 내가 그것을 버릴 수 없게 된 것은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 다른 설명이 나를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결정하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꼭 필요한 말을 하는지 그리고 그가 그러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 까지도 궁금해하기 시작하게 했다.  내 경험에 대한 어떤 해석이 더 정확한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그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었어야 했다.

너무도 많은 모순된 관점들이 존재하기에 많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착각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실로 명백했다. 내가 과거에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고 있었다고 확신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 또는 다른 신들이 역사하고 있다고 (그렇지만 하나님이 내게 말했다고 생각했던 바와 모순되는 방법임에도) 확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역사하는지 혹은 하나님이 누구인지(혹은 신들은 누구인지)에 관해 상충적이고 모순적인 견해들을 갖고 있음이 매우 명백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충하는 확실성들이 나의 확실성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확실했다; 누가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만일 내 것들이 정말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의 유일한 형식이었다면, 내 자신의 증언이 내게 계속할 무언가를 부여했을 것이고 그것이 내 경험들의 이해에 무게를 실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다른 기독교 종파 하나님에 의해, 혹은 타 종교들이나 신들에 의해서 조차도 변화됨을, 그것도 종종 극적으로 변화됨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만났었고, 그들과 한 울타리에 살았고, 그들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종교들이 그들의 삶에서 한 것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전처럼 성경에 호소할 수도 있었으나, 너무도 많은 다른 기독교도들이 그리도 다른 성경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하였으므로, 그건 단지 문제를 연장시켰다. 성경은 믿음의 안내책이자 시금석이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객관적 표준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판단되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성경도 하나님의 (그러할 것이라고 주장되는) 뜻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해야 하는 문제로 인해 곤욕을 치른다. 다른 기독교파들은 상충되게 성경을 해석했으며, 각 그룹은 자신들의 해석이 옳은 것이라고 단지 확신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나의 성경본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반면,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들의 성경본을 보고 영감을 얻고 변화되었다. 나의 확실함들은, 받아들이기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필연적으로 모두 그렇게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명백하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신실하고 확신하는가에 관계 없이, 하나님이 말하고 원하는 것에 대해 착오를 한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님이 말하고 원하는 것에 대하 착각하는 것이 가능함을 내 자신이 인정하도록 허락할 수 있었다. 더욱이,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확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 뿐 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이 도대체 원하는 것이 있는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고, 그가 아마 무엇인가를 원할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갑자기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신뢰할 정도로 알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고, 아마도 그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을 가능성 조차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는 하나님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분리된 영이 있다는 주장을 다소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추호의 의심 없이, 내 안에 하나님을 느끼고, 내가 그와 교제하고, 그도 나와 교통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신학적, 도덕적, 정치, 그 무엇의 문제들에서 하나님은 그의 추종자들과 항상 변함없이 뜻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임을 인정해야만 했다—그의 추종자들이 그렇게도 많은 것들에 대해 그렇게도 사납게 서로 불일치 할 때 조차도. 종교 신자들이 이상적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을 취하여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는다. 그들이 전적으로 옳을 리가 없으므로, 유신론자들 조차도 여러 가지 신들의 여러 가지 버전들을 믿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따라서 한 외부의 실제 신이라기 보다는 그들 자신의 주관적 이상향들을 “숭배”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모두 그렇다고 결론 내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내가 그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거의 2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남들에게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혹은 그가 말하려는 것이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에 대해 기도하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응답하실 것이오” 이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의 주관성과 한 때 내 안에 있었다고 확신한 “하나님의 영”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고 깨달았던, 내가 갖고 있던 주관적 감정에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이 영이 과거에는 거기 없었고 지금은 있기에 그것이 나의 외부에서 온 어떤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재 내 입 안에 있는 이들이 내가 걸음마 시절의 이들이 아니므로 지금의 이들이 외부의 출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타당치 않다. 아마도 사람의 “영(정신)”은 성장과 변화, 새로움, 깊이와 복잡성의 증가 그리고 자신이 이전에 가능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풍부함”에 대한 능력이 있다. 나는 사람들의 삶이 여러 종류의 종교적 믿음들 혹은 비 종교적 믿음들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람이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을 이용할 때, 하나의 믿음이 꼭 진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믿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바로 그 이해의 정확성을 입증하기 위해 내 자신의 증언, 경험에 대한 이해와 주관적 확실성을 내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내 믿음들이 진실이고, 내 경험에 대한 해석들이 정확하며, 내가 전적으로 확신하던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나를 초월한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내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나의 경험이라고 부르던 것은 실제로 내 자신의 성숙과 성장, 내 자신의 정서적/심리적 깊이의 경험에 대한 능력의 증가였다.

나는 내가 가졌던(그리고 지금도 갖고 있는) 경험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들을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 나를 변화시킨 내 안의 이 “새 삶”은 일정하게 성장하고 변화하고 스스로 다시 새롭게 하며, 이따금 예상치 못한 크고 급격한 도약으로, 대부분은 더 천천히 계측되는 페이스로, 다시 말해 하루하루 눈에 띄지는 않지만 몇 달 혹은 몇 년을 두고 놀라운 새 능력들을 축적 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새로운” 나의 삶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일 내 것들만이 삶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종교의 유일한 양식이라면, 나는 계속해야 할 뭔가가 있을 것이다 (번역자 역 - 아니기 때문에 계속 추구할 이유가 없다는 뜻; 가정법 과거=현재 사실의 반대).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만일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경전”의 그 어떤 책이건 저자가 공식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방법으로, (거짓) 주장된 경전의 어떤 세트가 진짜 자기 것이며 그 경전의 어떤 해석이 정확했음을 진술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계속 해야 할 무언가를 갖을 텐데.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에게 준 해답들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가 제기하는 진짜 이슈에 전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한 친구가 내가 실제로 무엇을 구하려 했는지를 정말 간파한 것으로 보였으나, 그가 답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그는 알고 있지 못하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그 해 여름 고향에 갔고, 그것에 관해 생각도 좀 했으나, 주로 나는 논점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입 닥치고 “단지 믿을” 수는 없었다. 나는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알기를 원했다. 나는 진리를 알기 원함에 매우 진지했다. 내가 기독교인이었을 때, 나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추호의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만일 어쩌다 기독교가 진실이 아니고, 만일 어쩌다 내가 실제 가능하다고 생각한 그 어떤 것에 반하여 내가 착각했더라도 나는 알기를 원했다고 생각했다. 진리가 무시무시한 것일지라도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를 원했다. 내 여정의 이 시점에서, 나는 기독교 혹은 적어도 일부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직도 믿지는 않았으나, 나의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몇몇 친구들과 그것에 관해 대화를 가졌었고, 대부분은 그 문제에 부딪혔을 때 기독교가 거짓인지 알고 싶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싶어했고, 여전히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고 나는 내 마음과 영혼과 힘 뿐만 아니라 정신을 다해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데 동반해야 하는 그 모든 것들을 갖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믿으면서(지금은 다소 모호하지만) 내가 기독교에 대해 지닌 이 의심들을 조사해야 할 기독교적 의무감을 느꼈다. 더욱이, 비록 내가 내 자신을 늘어나는 양의 연루된 증거들을 만나고 있었음을 인정하도록 허락해야 했을지라도, 의문의 첫 불꽃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스스로에게 성경에 설명된 데로의 어떠한 실질적인 유신론적, 그 신자들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의 2년 정도의 긴 세월이 걸렸다.

가을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여긴 매우 존경 받던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긴 휴가에서 돌아온 직후 어느 주일에 설교를 했고, 그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해 교회에 대해 앞으로 할 것들과 교회가 하기 원하는 모든 놀라운 것들을 요약했는데, 별 도움이 안됐다. 그것은 놀라운 정도로 인상적인 미래상(비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는 다음주에 그는 교인들 앞에 서서 그 설교를 하기 전에 교회 장로들과 이야기하지 않고 성급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했다. 하나님이 이 교회 장로들에게는 다른 것들을, 역시 감동적이며 중요한 것들이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해 가을 후반부에, 바로 그 교회에서, 어느 주일 날 한 사람이 전 주에 하나님이 그의 삶에서 행한 것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위해 회중 앞에 섰다. 그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었는데, 차는 전파되었고 목격자들에게 그가 생존할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는 약간의 찰과상과 타박상만 입고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는 교회 앞에서 하나님이 치명적이었어야 했던 차 사고에서 그를 기적적으로 구해준 것에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너무도 기쁨과 감사함에 충만하여 말할 수 없었고 거의 계속 일어서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700명의 하나님과 예수와 영원한 구원에 대해 가능한 어떠한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 확신을 갖고 믿는 거듭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모두 똑같이 믿는 이 사람에게 동참했고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이 사람이 아직 완벽한 은총(천국 가는 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음을 감사했다.

나의 의심이 시작되기 전, 나는 즐거운 찬양자들 중 하나이곤 했다. 이러나 이제 이 상황이 단지 계산이 안 된다. 막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거부하고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여행을 연기한 어떤 사람이 그것에 관해 감사해 그다지도 압도되는 것이 나에게 일리가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내가 이전에 사고나 질병으로부터의 죽음에서 기적적으로 구해줌으로써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받아들였던 많은 비슷한 사건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방금 불치병을 선고 받은 기독교 친구를 치유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즉시 하나님에게 기도하기 시작하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마음들의 마음(heart;감정적)속에 무엇을 믿는지에 상관 없이 그들이 그들의 마음들의 마음(mind; 정신적, 이성적) 깊은 곳에서 정말로 전적으로 믿는지 와 영원한 천국이 죽음을 뒤따르는지? 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로 호출 받은 마이너리그 야구 선수라고 가정해 보라. 당신이라면 그 부름을 거절하고 싶겠는가? 당신은 구단 사무실의 구단주한테 전화해 마이너리그 팀에 좀더 오래 있게 해달라고 빌고 탄원하겠는가? 구단주를 확신 시켜 잔류 되도록 당신의 팀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내겠는가? 당연히 아닌 것은, 마이너리그에서 경기하는 것이 아무리 많이 재미있고 현재 팀이 아무리 잘해도, 당신의 목표가 가능한 한 빨리 메이저리그로 가서 가능한 한 오래 그곳이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더더욱, 가능한 한 빨리 구단주가 부르도록 그를 확신 시키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이곳을 넘어 “메이저 리그”가 있다는 것을 믿는 기독교인이 “승진”의 소식을 접하면서 반응해야 하는 바이다. 그러나 암이나 다른 어떤 그런 질병을 진단 받을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는 첫번 째는 일단의 기독교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치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죽음을 은총과 존엄으로 맞이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비기독교인들도 또한 있다. 그리고 이 사람과 전 신도들이 한 것처럼 반응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관찰들을 통해, 나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임박한 죽음에 더 쉽게 대면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은  무슨 종교이냐 혹은  그에 따른 과/부와 무관한 사례이다. 또한, 나는 비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임박한 죽음에 대면했을 때, 거부, 분노, 위축 그리고 받아들임(그럴 시간이 있다면)의 똑 같은 단계를 거쳐감을 발견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믿음이 어떤 실제(단지 인식되거나 믿어지는 것이 아닌) 차이를 보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지식과 경험(혹은 적어도 그러하리라고 해석하고 믿었던 바로)이 정말로 사람의 인생에서 차이를 보였다고 확신을 갖고 믿었음을 안다. 그 관점에 의해서, 그렇지만, 현실은 내가 덜 확신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떻게 해서 모두다 단지 잘못된 해석들일 수 있었을까? 내 말은, 내가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함을 보고 느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에 관해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한 후, 과연 내가, 하나님이 실마리를 찾고, 시험을 잘 보고,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해주고, 친구 사귀는 것을 도와주고, 내가 자원했던 피난처에 있던 노숙자 몇 명의 삶에서 적어도 어떤 작은 차이 라도 보여주는 등등의 면에서 내게 도움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왜 하나님은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 화학 요법 치료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의 기독교 부모들의 기도들을 무시했을 때 내 기도들에는 응답했을까? 그리고 그가 만일 그렇게 했다면, 나는 어떻게 그리도 우선 순위가 엉망인 신의 섬김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어린이들이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도 있었을 때 내 삶의 여러 해답들을 찾는 것을 돕기 위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준 하나님에게 감사한다면 나는 무서울 정도로 자기 중심적이지 않았나? 혹시 나는 해답들을 내가 찾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했을 수 있다. 내가 공부했기 때문에 시험을 잘 봤을 수도 있다. 혹은 대학들을 비교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서, 혹은 타인들을 아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서, 혹은 노숙 가정이 새 직업과 살만한 새 보금자리를 찾는 동안 험한 삶을 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내 자신의 작은 노력들 덕분에, 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해서 였을 수도 있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가 내가 단지 기도만 했다면 일어났을까? 내가 기도하지 않고 찾고, 공부하고 돕기를 했다면 일어났을까? 나는 항상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는 선(좋은 일)을 자기 공로로 가로채는 것은 죄적 교만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어느 것이 정말로 더 거만한가: 내 스스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의 공로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주의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도시 전체가 홍수로 잠겨있음을 무시할 동안 내가 답 찾는 것을 도와준 것인가? 하나님의 관여로 연긴 것들은 단지 내 자신의 관여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내겐 이치에 더 합당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나의 최초 전환은 어떻게 된 것인가? 내가 이전에 느낀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힘을 나는 느꼈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그 이후로 강력하고 심오하게 감동적인 경험들을 느끼지 않았던가? 어쩌면 나는 사건들을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 경험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들이 실제였음을 알았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에게 의지함 없는 그 경험들을 어떻게 내가 감지할 수 있었나? 하나님은 내 삶에서 역사하고 있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켰고 계속해서 변화시키는 존재이었어야만 했다.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그를 수 있었는가?

그 질문을 검사하기 위해 개종 경험의 유추를 그림으로써 시작해 보겠다. 나는 철학, 역사, 사회 과학 그리고 과학의 많은 주제들에 관한 매우 많은 책들을 읽고 아주 많은 생각들에 관해 들었다. 나는 그것들의 어느 것으로부터 건 적어도 저금은 배울 수 있다. 그들 중 많은 것들이 내게 그다지 이치에 맞게 보이지 않으며, 나는 그것들이 틀리거나 잘못 유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읽은 많은 책들은 나와 동조했으며, 그것들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들, 내게 합당하고 그들의 논제가 합당하게 보이는 방법들을 가르쳤다. 내가 사물을 보는 이 새로운 방법을 배웠을 때, 내 마음속에 무언가 갑자기 이해되며, 이전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 경험들, 그리고 정보 조각들이 과거에 있지 않았던 방법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일어날 때 매우 심오하면서 감동적인 감정일 수 있다.

한 예로, 내가 여러 해 전에 읽었던 역사에서 재발하는 주기를 가정한 사회/역사학 책을 기억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읽었을 때, 논제와 책의 전개가 내 안에서 생생했다. 나는 역사와 현 사건들을 이 명제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으며, 많은 일들이 그 명제와 매우 잘 들어맞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것들은 더 많은 조사와 생각이 소요되었으나, 이 명제와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거나 해석될 수 있었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것은 이치에 맞고 내게 진리로서 적합하게 보이는 매우 우아한 명제였다. 일종의 정말로 산뜻한 진리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진리이기를 원했다. 이 재발하는 주기가 계속 순환한다면, 미래가 어떠할 지에 대한 일반적 개요(특정 상세에 대한 면이 아닌 사고의 통로)는 누구나 알 수 있으므로 이것은 특히 그러했다. 그것이 얼마나 산뜻한가?! 그러나 물론, 이 명제에 대한 반증 또한 있고, 모든 상세가 정말 논리에 맞게 그것에 적합하게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비록 한계는 있지만, 적어도 그것과 관련된  뭔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공명(번역자주 - 구성 요소들의 소리나 진동이 특정 환경에서 전체 계로 증폭되는 현상, 본 글에서는 사고나 이념이 자신에게 매우 크게 느껴짐을 뜻하는 것 같음. 이 역시 주관적일 수 있으나 저자는 사회 현상에 적용하여 이성적 입증을 통해 객관화) 경험은 전혀 희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옳지는 않다. 많고 많은 이론들이 다양한 현상이나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되었고, 모든 것이 그것들을 지지하고 모든 기지의 사실에 적합하게 보이며, 매우 우아한 이론들로 나타나고, 만일 진리라면 너무도 산뜻하고 멋질(cool) 것이다. 그러나, 더 조사해보면, 그들은 종종 더 많은 시험, 실험, 증거들에 의해 거짓으로 끝을 맺던가, 다른 그리고 더 나은 이론들로 개발된다. 따라서, 한 사람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그것들이 정돈되고 이치에 맞다고 느껴질 때 갖는 경험은 그 명제 자체가 옳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읽고 공명했고 그 명제를 믿고 받아들인 다른 사람들과 모이는 2개 혹은 3개의 주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suppose) 보라. 이 모임들에서 우리는 읽고 책에 나온 단락들에 대해 토론하곤 했으며, 제 명제를 확증하는 것들을 찾기 위해 역사와 현재의 사건들을 보곤 했다고 생각해 보라. 이제 그와 같은 그룹에서, 당신은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을 이 관념에 맞추는 방법을 찾아낼 충분히 창조적인 그 어떤 해석에 도달하기 위해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룹의 나머지가 이 관점에서 모든 것이 고려되고 진실되게 고려될 수 있고 이 관점이 실제로 사물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을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러면 우리는 그 해석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책과 명제가 우리에게 너무도 강력하게 공명하여, 그리고 우리가 너무도 많은 것들을 그 명제에 적용시킬 수 있어서, 우리가 그 책은 완전히 옳음에 틀림없고 사물들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유일한 길임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생각해 봐라. 이 명제의 결과들이 진실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가 미래에 만사가 어떻게 전개될 지를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이 명제가 진리임을 원했다고 또한 생각해 봐라. 그러면 우리가 책에서 “명백한” 불일치, 혹은 명제에 반하게 “보이는” 어떠한 “명백한” 사실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가 잘못 해석 했었다고 믿고 그 명제를 살리는데 필요한 가능한 모든 정신적 체조를 수행하는 것이 그럴 듯하지 않은가?

내가 이와 같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당신은 분별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따라서 앞으로 나아가 그곳으로 가자. 전형적인 거듭난 종교적 체험을 한번 보자. 당신은 성경이 일반적으로 존중되지만 대개 읽혀지지 않는 사회에서 성장한다. 혹은 당신은 성경이 경외 되고 종종 읽히는 가정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혹은 당신은 적어도 이런 일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다른 사회를 안다. 어떤 경우던, 이 책이 하나님의 말로 받아들여지고 태초에 그러한 말을 갖을 수 있었던 신이 있고, 그리고 이 신이 선하고 선의 근원이며, 기타 등등 에 대해 듣는 배경을 놓이게 된다. 그러면 복음 전파자(복음화 하려는 사람)가 하나 둘 따라 붙는다. 이 복음 전도자들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그들은 친구나, 친척, 당신이 아는 사람, 당신이 좋아하고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 당신을 기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곳에서 발췌한 몇몇 관련 구절들과 함께 미리 포장된 복음 메시지를 당신에게 보여주고 하나님, 죄,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희생, 속죄, 구원 등등에 관한 일관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함께 놓는다. 이제 당신은 나쁜 일들(소위 죄)을 해 왔음을 안다. 당신은 하나님은 완벽하다고 들었다. 따라서, 당신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이 하나님이 있는 곳에서 당신은 무가치한 존재이고 등등, 등등. 말 된다. 당신 안에서 그것이 공명한다. 당신이 과거에 생각치 않은 관점으로 사물들을 보고, 다양한 이전의 무관한 사실들이나 사건들을 보기에 일관된 방법으로 정돈한다. 당신은 당신의 경험에 감격한다. 그리고 복음 전파자들은 당신이 느끼는 것이 당신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이라고 당신에게 말한다. 이제 당신은 경험을 갖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이 경험은 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준 말을 들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당신이 그러한 경험할 것을 기대했고, 경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당신에게 예기했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결국 당신은 그 경험을 하나님의 체험으로 해석하도록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당신은 또한 그들로부터 지옥이라는 곳이 있고, 당신의 현 상태에서 지옥은 당신의 운명임을 듣는다. 그러나 또한 완벽한 축복의 장소인 천국이 존재하고, 당신이 하나님에게 복종하면 그곳이 당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이 명제의 나머지 부분들이, 죄인임 따라서 불완전함에 관해, 미래에 대해 알지 혹은 확신하지 못하는 것, 사후의 삶, 기타 등등에 관해, 모두 사실처럼 보이고 당신 안에서 공명하므로, 당신도 이에 따른다. 이 명제가 나머지 관점들에 대해 옳다면, 이것에 관해서도 옳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옥에 가기 두려우며, 따라서 천국에 가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당신의 예정이 지옥이나, 이 기도를 하면 예정이 바뀔 것이라고 들었다. 지금까지, 모든 이야기가 이치에 맞고, 이들은 신실하며 당신을 기만하려 한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이제 당신의 운명이 변했다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더 이상 지옥에 갈 운이 아니라는 것에 큰 안도를 느끼고, 천국으로 예정됨에 흥분된다. 당신은 기분이 매우 좋다; 당신은 놀라움을 느낀다; 당신은 위로 올려짐을 느낀다; 마치 당신으로부터 거대한 짐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그리고 당신은 확신을 가지고 이 감정들, 경험들이 실제로 당신에게 일어났다고 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그 느낌이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영으로 채워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감정이 실제적이고, 그것이 이들이 당신에게 예기해 준 것으로부터의 결과이고 그들이 그러한 감정을 예견했었다고 당신에게 예기했으므로, 당신은 그들은 당신에게 그 느낌을 설명해 줄 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믿을 만한 모든 이유를 갖게 된다. 결국 당신은 그 체험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고 당신을 그의 성령으로 채우는 하나님이었다.

사회 심리학,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적, 개인적 경험들의 사회적으로 학습된 해석들에 대한 연구는 거듭난 종교 체험을 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주제이다. 나는 체험했음을 확실히 안다. 나는 성경 읽기, 기도, 다른 기독교인들과의 교제, 등등, 모든 것이 나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쳤음을 안다: 나는 깊고 심오한 면에서 진짜로 감동 받았다. 타인들도 똑 같은 형태의 체험함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 내가 이제 의구심을 갖는 것은 그러한 체험들에 대한 사회적으로 학습된 해석들이다. 그리고 나는 비종교 모임에서 일어난 것과 똑 같은 종류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현상이 일어난 그 IVCF 모임에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이 관계한 것에 관한 부분이 내가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사건 형태에 부합하도록 학습한 해석일 뿐이었음을 마침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해석들이 틀릴 가능성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그러한 사건들을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학습된 성향만 빼고, 동일한 일들이 비종교적 상황에서도 일어났었다.

맞다, 나는 종교적 체험들이 더 심오하고 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분의 심오가 그것들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바로 그 행위로부터 얻는 추가적 노력의 결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종교적 상황에서의 이 결부가 정확하다고 나는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나의 개인적 종교 체험들에 대한 내 학습된 해석들이 정말 정확하고 사실이라고 나는 확신했었나? 내가 거듭난 기독교인으로서 해석한 것들이 진실이라고 내가 확신했었나?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나와 타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아는 것에 관해 내가 가졌던 질문들에 관련된다. 아마도 하나님이 내게 말한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상황에서 떠오른 내 생각일 뿐이었다; 나는 단지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이 나에게 말하고 그의 뜻을 알게 하려는 것으로 여기라고 남들로부터 배웠을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에 대해 상충된 견해를 가지는지를 확실히 설명할 것이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나는 기독교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갖고 있던 문제들이 성경까지 이어짐을 인식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많은 부분을 매우 다른 방법으로 해석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내 질문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지침을 아는 방법에 대한 나의 마지막 희망으로 보였다. 나는, 그렇지만, 무엇이, 만일 있다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진정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올바른 이해인지에 도달하기 위해 가혹하게 조사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성경 말씀에 대한 나의 해석과 간섭 되는 자신만의 주관성을 경계해야만 했다.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해석은 옳다고 모두 확신하므로, 이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해석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적 확실성만으로 충분치 않은 경우이다. 하나님 또는 신들의 말이라고 주장되는 다른 거룩한 경전들을 갖는 타 종교들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된다. 예를 들어, 코란이 같은 주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주장을 믿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이라고 주장함에 있어 정확하다는 어떠한 증거를 나는 갖고 있었나? 반복하지만, 나는 알라나 여호와의 증인의 예수(내가 소속된 종파에 의하면 거짓 예수)에 의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믿음에 의해 변화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명백하게,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고, 그리고 거짓 믿음들에 의해 좋은 쪽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한다고 믿는 바를 어떻게, 그에 대한 내 이해가 옳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증거로 이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능한 한 나는 성경을 엄격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조사해야 했다. 나는 다른 글들을 조사할 때와 같은 기준에 의해 성경을 살펴보았다. 나는 더 이상 다른 것에 대한 접근 방식과 같지 않게 차별하여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다. 만일 내가 성경에 대해 하나님의 말로 단정하고 접근했다면, 그리고 내 자신이 그 가정을 의심하고 조사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면, 그러면 나는 어떠한 반증에도 스스로 장님이 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역사적 문서들에 대해 “신뢰할 만 하다고 입증될 때 까지 의심하고, 그리고는 입증된 정도까지만 의지하는” 자세를 갖고 접근한다. 만일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참된 말이라면, 성경은 그러한 대접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신성한 근원이 신뢰할 만하게 입증 될 것이고, 그리고 다른 문서들에 대한 우월성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참된 말이라면, 내가 시험해보고 합격하는 것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확실히 참임을 실제로 알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거듭난 복음주의자들 경우처럼,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말이라고 믿었다. 나는 많은 구절에 있는 “난제들”, 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의 예수 족보의 차이, 그리고 그 난제들을 지적한 회의론자에 답하기 위한 뒤엉킨 시도들의 적어도 일부를 인식하고 있었다. 적절한 축소 혹은 확대 혹은 무시 혹은 문맥에 첨가와 결합된 작은 창조적 해석이 무오론자의 주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면 매우 놀랍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해석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해야만 했다: 당신이 이미 성경은 무오하고 모순이 없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집착한다면 그것들은 충분히 훌륭하다. 하지만 성경의 완전한 타당성과 신뢰성을 이미 믿지 않았다면 이 해석들이 이치에 맞을 길이 없다고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성경의 모순들과 불일치들에 대한 “해답들”이 누구에게나, 신자들에게 조차도, 확신을 주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설득하기에 부적절했고, 이미 확신했던 사람은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성경에 대한 재검사를 시작했을 즈음, 요한복음 일부에 대한 성경공부인도를 준비하고 있었을 때, 내 마음에 떠오른 한 질문이 기억 났다. 제1장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어떻게 모으기 시작했는가를 포함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 중에서 안드레를 발견했다.  안드레는 예수를 따랐고, 그리고 나서 동생 시몬을 데리러 갔다. 나는 이순간 “잠깐, 거참 이상하군, 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안드레와 시몬을 그들이 고기 잡이 하는 동안에 함께 만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외쳤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라고 생각했음이 기억 났다. 나는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하고 복음서들이 얼마나 서로 일치하는가를 보기 위해 병독(번역자주-병렬 읽기:동시에 펴 놓고 한 문장씩 비교해 가며 읽는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기억 났다. 나는 물론 그들이 잘 일치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병렬 문단들을 나열하는 스코필드 주석 성경 같은 성경본들이 있다; 도대체 기독교 성경 출판사들은 만일 모순들이 정말로 거기에 있다면 왜 이렇게 쉽게 모순들을 찾을 수 있게 만들었을까? 처음에 나는 병독이 내 믿음과 이해를 더욱 강건하게 해 줄 것이라며 복음서들을 병독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기사들이 완전하게 양립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대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가정을 검사해야만 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다른 말함을 보면서, 나는 그 가정이 유지되지 못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마태복음은 안드레와 시몬이 어떻게 부름 받았나 에 대한 요한복음의 가사에 확실히 모순된다. 그들은 예수가 설교와 제자 모으기를 세례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가기 전에 혹은 후에 시작했는지에 관한 주장에도 또한 차이가 있다. 나는 동일 사건들에 대한 다른 기술을 병렬 조사하는 것이 성경이 무오하다는 내 믿음을 없애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발견했다. 4복음서의 마지막 한 두 장과 사도행전의 초반부에 있는 부활 기사를 바울이 언급하는 몇 가지와 함께 조사해보면 모순되는 주장들이 담은 긴 목록이 만들어진다. 구약의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그리고 역대상/하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전개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쓴다. 수정의 한 재미있는 예가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게 했을 때인 사무엘하 24장의 이야기인데, 그 후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죄지은 것으로 되고(비록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로 이끌지 아니한다는 야고보서 1:13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이 죄지은 행위에 대해 7만의 다른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다윗을 응징한다. 역대상 20장은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데, 다윗을 부추겨 인구조사를 하게 함으로써 죄 짓게 하는 역할을 사탄이 하고, 따라서 꼬신 하나님을 제거하기 위해 이전 버전을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표면상 죄라고는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다윗의 죄스런 인구조사에서 세어졌던 사람들 중에 있었다는 7만 명을 죽임으로써 다윗을 응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혹은 그의 명령으로 행해진 다른 많은 잔학한 행위들이 있는데,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과 그의 군대에 모든 아말렉 족속, 애들이나 유아들까지도, 그리고 그들을 가축들 조차도 도륙하라고 명하고, 그 이유가 그들의 조상이 몇 세기 전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든 어떤 짓을 했기 때문이다(비록 하나님이 신명기 24:16에서 아이들은 아비들의 죄로 인해 벌 받으면 않된다고 말했지만). 그리고 민수기 31장에서 하나님은 어린 숫처녀들만 빼고 모든 미디안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혹은 출애굽 이야기를 보면, 이집트 파라오가 하나님의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 때 까지 반복적으로 모세와 그의 백성을 보낼 준비와 의지가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강퍅한 마음 때문에 재앙을 보내고 전 이집트에 걸쳐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정죄했다.

더 상세한 검토로 알아감에 따라, 구원의 전갈이나 그리스도의 추종자에게 요구되는 것들 조차도 결코 명확하지 않다, 비록 이것이 구원을 얻는 방법과 기독교도로서 사는 방법에 대한 너무도 많은 상충되는 견해를 갖는 수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왜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명백하겠지만. 복음주의 개신교도로서, 나는 항상 바울의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온다라는 주장의 견지에서 야고보의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에 관한 견해를 읽도록 배워왔다. 그러나 야고보는 단지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 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가 정당화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다른 기독교 종파에서, 예를 들어 많은 카톨릭 중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야고보의 견지에서 바울을 읽고 해석하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모순되는 것이 없고 따라서 어떠한 모순되게 보이는 것도 한 구절을 나머지 구절의 관점에서 읽으면 설명된다라는 가정과 함께 출발하는 것은 단지 그러한 한 구절이(야고보의 행위에 관한 주장 같은) 실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구절이(바울의 믿음에 관한 주장 같은) 말하는 바를 의미하는 체 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코란이 무오하거나 전쟁과 평화가 무오하거나 혹은 스누피가 집에 오다가 무오함을 “증명하는데” 이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비록 한 구절이 다른 구절의 견지에서 읽어져야 할지라도, 어느 구절이 어느 구절의 관점에서 읽어져야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야고보가 믿음과 행위에 대해 말한 것이 바울이 믿음과 행위에 대해 말한 것에 모순된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항상 속임수들 그리고 모순들과 불일치들을 설명해버리기 위한 시도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는 성경의 이 부분 저 부분이 무언가를 예기한다고 가정하던지, 혹은 그것을 “믿음의 신비” 딱지를 부쳐 재분류 하는 것에 의거한다. 나는 성경에 모순이 없다는 확실한 가정을 소유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혹은 성경 자체를 보고 내 힘으로 모순들을 알 수도 있다. 왜 내가 성경이 정말로 말하는 것보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지금 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일원이었을 때의 나를 포함하여) 그들 자신이 자명한 것들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지에 대해 숙고하고 싶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성경에 있는 문제들은 명백하며, 그리고 나는 그것을 부인하는 어느 누구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성경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 모순, 혹은 억측이 그 안에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날 수 있는 새는 없다라는 주장에 근거해서 논쟁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나는 새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있으므로, 그러한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나, 근본주의 기독교도 자신들 조차 인정하는 모든 문제들이 적어도 “난제들”이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로 보는 것보다 그것을 성경 저자들이 쓰고 있던 시절의 진화하는 종교 전통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진 많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성경은 내게 훨씬 더 이치에 맞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점은 역사가들이 고대 문서들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똑 같은 기법과 기준을 갖고 성경을 역사적 문서들의 조합으로 연구한 “히브리 성경에서의 주제들”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더 타당한 경우가 되었다. 반복하지만, 성경의 진정 하나님의 말인가를 신뢰할 수 있게 결론 내리려면 다른 고대 문서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기준을 성경에 적용함에 의해서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조사했을 때, 성경은 신성하기 보다는 훨씬 더 사람에 의한 것처럼 나타났다. 누구나 하나님이 훨씬 더 잘할 수 있음을 기대했을 것이다. 만일 완벽한 하나님이 있다면, 성경은 그의 말이 도달하리라고 사람이 기대하는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더욱 신학적으로-자유로운 성경 해석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정확하지 않은 이해들을 표현한 사람들의 작품임을 인정한다. 이 관점에서, 나무가 시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르나,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다른 어떤 인간 작가나 작가들의 군보다 삶을 위한 혹은 하나님에 이르는 더 꼭 신뢰할 만한 지침이 아님을, 그리고 적어도 성경의 저자와 해석자 보다 훨씬 더 많은 철학, 과학, 역사 등등을 공부한 사람들의 작품들보다 훨씬 덜 신뢰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게다가, 내게 설교하고 그들과 똑 같은 세상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신학적으로-자유로운 기독교도들이 아니므로, 본 배교(엑스티모니)는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가 성경이 무오하다는 주장을 포기하려 할지라도, 내가 전도할 때 묻곤 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여전히 왜 사도들이 거짓이라고 알았다면 죽었겠느냐고? 내게 응대할 수 있다. 좋다, 그래서 복음서 작가들이 완벽하게 정확한 문서들을 쓰지 않았을 수 있다. 여전히 그들은 증인들, 혹은 증인들을 알았으므로, 따라서 그들은 적어도 대부분은 옳았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믿음을 위해 순교 당했다; 만일 그들이 거짓임을 알았더라면 왜 그들은 신앙을 철회하지 않았었을까? 그들의 작품들이 전적으로 오류가 없지는 않더라도, 예수가 신이고 부활했다는 그들의 주장은 옳았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이 대답에는, 그러나, 많은 문제들이 있다. 첫번째로, 몰몬교인이 아닌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조셉 스미스(번역자주-몰몬교 창시자)와 스미스의 가르침이 허위인지를 알았었을 그의 많은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박해와 철회 없는 죽음에 조차 직면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조셉 스미스는 그의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그를 린치하려 하는 한 폭도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는 그 때 혹은 그 이전의 어느 때였건, 그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알았을 때, 군중들이 접근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그의 죄를 자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굳건히 버텼다. 그가 몰몬경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는지를 누군가가 알고 있었더라면, 그것은 그였을 것이다. 짐 존스에 대해서도, 천국의 문 신앙에 대해서도, 거짓됨을 알 수도 있었던 자신의 주장 때문에 곧 죽을 것을 아는(번역자주-거짓이 아니라고 죽을 때까지 믿었다는 뜻) 수 많은 다른 순교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그러하기에, 만일 당신이 사도들이 거짓말 때문에 죽었을까 가 궁금하면, 왜 이러한 다른 사람들 중 누구도 그리 했을까 를 나에게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아마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조셉 스미스와 많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죽음 대한 목격자 증언이 있는 반면, 사도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작자 미상의 전승들인데, 종종 서로 상충한다 (마태는 여러 장소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었다, 속담의 고양이보다 더 많은 목숨을 가졌었나 보다). 따라서 우리는, 조셉 스미스와 많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반면, 그들이 믿음을 위해서 죽었나 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부가하여, 복음서들이 일차 목격자들에 의해 쓰여진 정확한 사실 기록이 아니라는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 나는 증거를 조사하기 전까지 예수에 대한 역사적 증가가 조지 워싱톤, 나폴레옹 혹은 줄리어스 시저에 대한 것 만큼이나 풍부하다고 종종 주장됨을 들었고, 믿곤 했으며, 내 자신이 주장하곤 했다. 이것이 타당한 경우가 아님은 역사가 기술되는 방법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워싱톤의 경우에는 서명이 있는 자필 원본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두 위조되었다고 주장하기를 원할지라도 (그런데 그들이 진품이라 결론 내릴 매우 합당한 이유들이 있다), 예수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되는 위조된 문서들 조차 갖고 있지 않다. 시저의 경우와는 틀리게 우리는 예수가 쓴 그 어떤 것의 사본의 사본도 갖고 있지 않다. 워싱톤의 사진들은 없으나,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한 그를 그린 그림들이 있다. 시저의 이미지는 동전에 새겨져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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