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3부



나의 기독교 경험담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3부

인류애 0 1,519 2003.07.14 15:01

의문이 개인적이 되다 The Questions Get Personal  

내가 이 모든 것을 처리하려 하고 있었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강타를 얻어맞았다. 4학년 성탄절 방학 때, 나와 내 여자친구는 언제 약혼하고 우리의 곧 할 결혼을 공식화할 것인지 의논하고 있었다 우리 둘과 모든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 이것이 불가피함을 알았으나, 결혼을 공식화하고 우리가 서로 결혼하려 하고 우리의 남은 인생을 결혼 생활과 그 결과 생기는 집안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보내겠다고 세상에 선언하는 것은 여전히 매우 큰 일이었다. 내가 결혼이라는 대사와 결혼 생활 잘 하는 방법을 숙고하고 있었을 때, 바로 이 시기에 내가 굉장히 존경하고 그리스도 중심적 믿음직스러운 결혼 생활의 본보기로 여기던 기독교 부부인 삼촌과 숙모가(aunt and uncle) 매우 더럽고 천박하게 이혼함으로써 그들의 결혼을 날려버렸다. 이것이 나를 완전히 궁지에 빠뜨렸다. 어찌하여 모든 사람들 중에 그들 같은 부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부모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어린이들은 매우 공통적으로 두려워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글쎄, 이 삼촌과 숙모가 만일 내 부모들이 그림에서 사라졌을 경우(번역자역-세상을 떠났을 때) 내 보호자(guardians)가 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들과 그 가족들을 동경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들의 행보를 사모했다. 그런데 이제 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결혼 생활을 잘 하기 위해 “그리스도-중심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일 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한 때 이 부부에 의해 중심에 놓였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계속 거기에 있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실적 측면에서는, 결혼 생활을 좋게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에 달린 것이 아니고 부부에 달린 것이었다: 하나님을 가정에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었고, 하나님은, 적어도 이 예에서는, 그 가정에 있기 위해 중요한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징표를 전혀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이 정말로 우선적인 필요 조건인 경우에만 해당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최종적으로 내가 동경한 또 다른  부부인, 또 하나의 숙모와 삼촌 조합(실은, 내 아버지의 숙모와 삼촌[이 사람이 반더빌트에서 교수였던 삼촌])이 기독교도들이 아니었음을 내 자신에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것들에 대해 예기 한 적이 없었으며, 내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단지 점잖게 듣기만 했으나, 내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았을 때, 그들의 결혼 생활을 보았을 때, 특히 이 삼촌이 암으로 죽어가면서 어떻게 그들이 죽음에 맞서는지를 보았을 때, 진정 거듭나고 성경을 믿는 복음주의 기독교도들만 제외하고 그들은 무엇이나 될 수 있었다라는 점이 나의 기독교적 마음으로는 단지 계산이 안 되었다. 이것은 단지 내 입장에서의 암시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가 기독교도인지를 물었을 때 숨김없이 이 결론에 도달했음을 나는 기억이 난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의 구원을 염려했고 그가 구원 받지 못했다면 그에게 보내는 우리 가족의 성탄 카드에 복음 신탁을 포함하기 원했다. 나는 그가 사는 동안 종교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예기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오직 기독교도이었을 수 있었던 정도로 살았다고 말함으로써 대답했다. 나는 거듭난 기독교도들이 아니면 그들처럼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내 자신이 그들이 아니었음을 인정(그리고 나중에 숙모와의 대화에서 확인했다)하도록 허락했다. 기독교가 성공적인 결혼을 위한 필요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님을 입증하는 더 확실한 예를 요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만일 내 여자 친구와 내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한다면, 그렇게 된다고 확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지할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부부가 그리스도를 결혼 생활의 중심에 두고 유지하는 믿음이 실제로 많은 결혼들에 큰 도움이 됨을 안다(그러나, 플러시보 [번역자역-유효 성분이 없는 심리 효과용 위약]와 같이, 믿음이란 효과적이기 위해 사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제, 현실은 나를 강요하여 때론 이것이 안 들어맞고, 더 나아가 그것 없이도 결혼이 놀랍게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만 함을 알았다. 맞다, 그리스도, 혹은 적어도 그리스도 존재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돕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규칙적인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의해 상처 받고 (이제 내가 기독교에서 나와 배교한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믿음들에 의해 도움 받는다. 기독교에는, 특히 내 종파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나의 지난 믿음이 더더욱 흔들렸다.

나에게 비종교인이 얼마나 잘 살고 죽는지를 보여준 장본인, 내 아버지의 삼촌에 관해 회상하고 알면 알수록 더 흔들렸다. 니콜라스 홉스는 종교와 직접적 연결이 전혀 없이 타인을 돕는 사람들의 훌륭한 예인 평화 재단(the Peace Corps)의 설립에 일조를 포함하여 평생 많은 탄복할 만한 업적을 이룬 심리학 교수였다. 그러나 닉의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는, 그가 불렀듯이, 불행한(troubled) 아이들과 문제(troubling)아들에 대한 그의 업적이었다. 그는 치료에 대해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치료의 핵심이 진보의 원인이기 보다 차라리 진보의 결과에 더 가깝다고 믿었다. 그는 말하길, 진정한 진보는, 내부와 뒤를 보는 사색으로부터 라기보다는 미래를 향하여, 외부와 앞을 보며 현재의 일들을 하는 것에서 온다고 했다. 그는 믿었고, 불행아와 문제아들에 대한 그의 성공적 수행은 활동과 행동 습관의 변경이 인간 타입을 변화시키는 더욱 효과적 방법이라는 좋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또한, 우리의 육체적 몸과 같이, 우리의 마음/감정/”영혼”이, 그것들이 그렇게 하기 위한 좋은 환경 (“감동적 부목”?)에 있으면, 자연적으로 그것들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사회 환경을 재구성하고 (다시 말해서, 더 좋은 부모가 되도록 부모들을 돕고, 활동을 기획하여 참여적이고 교육적이 되게 하고), 그들의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긍정적 환경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즉, 스스로가 단지 수동적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그들의 환경을 형성하는 방법을 배우는) 새로운 행동 습관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단지 그들을 치료하기 보다 더 잘 작동하는 환경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 아이들이 있던 환경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방법으로 그가 설립을 도왔던 학교들과 공동체 정신 건상 센터들은 매우 잘 운영되었다. 이 방법들에 의해 감정적 문제를 지녔던 어린이들은 그들의 삶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그의 맨션에서 도움을 받던 젊은이들과 똑같이. 그러나 닉의 리-에드(Re-ED,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어린이들의 재교육) 프로그람은 하나님에 의지하지 않았다. 나의 IVCF 그룹에 비유되는 대학 라디오 방송국의 사람들처럼, 프로젝트 리-에드는 하나님의 개입 없이 그의 맨션의 결과를 복제했다. 그의 맨션은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높은 수준을 만족하도록 도와주고 유지시키는 상담가들과 함께 보살피는 환경을 제공했다. 프로젝트 리-에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높은 수준을 만족하도록 도와주고 유지시키는 교사-상담가들과 함께 보살피는 환경을 제공했지만, 신성한 것에 호소하지는 않았다. 교사-상담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었으나 많은 이들은 갖지 않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리-에드 원리들은 종교적이거나 하나님 믿음들과 관련된 어떠한 것이라도 드러나게 포함하지 않았다. 그의 맨션에서의 기도들이 필요 이상이었다는 것 외에 내가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것들은 정말로 관련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약효과를 주었을지는 모르나, 그 결과는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에 염원 혹은 그의 개입 없이 중복되었다.  그의 맨션에서의 나의 경험을 명백하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선함과 인간 삶에서의 역사함의 증거로 받아들이면서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나는 감동했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모두 인간의 선함과 타인들의 삶에 대한 우리의 개입이었다면 어떻게 되나?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스승으로서 그리고 더 개인적 위치에서 알게 된 다른 교수들을 숙고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존경할 만한, 삶의 방식과 인생관이 충분히 모방할 가치가 있는 많은 사람들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연구와 강의에 열정적인 관심이 있었으며 진짜로 자기 학생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내가 감탄했던 이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전혀 종교가 없었고, 단지 신앙을 갖고 있던 몇 명이 내가 과거에, 그리고 물론 하나님과 올바른 “진정한” 기독교인이기 위해 어떠해야만 한다고 내가 믿던 그런 종류의 기독교인이었다.

내가 복음전파에 대한 효과적 방법들을 배우던 중에, 믿음에 반하는 모든 종류의 반대, 의문, 이성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에 대해 위대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하나님이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방법을 그들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라고 교육 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한 것을, 어떻게 내가 의미와 목적과 삶에 충만을 알았는지를 당신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한 복음주의자가 자신의 과학적 역사적 영역에서 벗어나 몇몇 무신론 회의론자들 (일반적으로 이런 이야기에서 젊고 건만하게 그려지는 [번역자주-어려서 뭘 모르는])의 질문들을 답하는데 어려운 시절을 겪음을 줄거리로 하는 이야기의 많은 변종들을 들어보았다. 그러면 한 노 신사가 점잖게 끼어 듦을 양해 구하지만, 계속해서 이야기하기를 죄로 인해 (술 취함과 간음 같은 세부적인 것들을 여기서 첨가하면서) 무의미하고, 천박하고, 그리고 불충만 했던 삶이, 자신을 개선시키고 의미와 목적과 충만함을 준 예수를 앎으로써 속죄함 받았다고 한다. 이 젊은 회의론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 질문의 거울 형상 (mirror image) 때문에 난처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비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존재하는 이런 종류의 행태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나?

이전에는, 거짓 종교(번역자주-다른 기독교 종파)에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내 충만한 삶이 더 충만하다고 나는 항상 생각했었다. 결국, 내가 그들의 교회들을 가보았을 때, 성도나 예배가 내 것만큼 생동감 있지 않았고, 그것들은 내 것만큼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들이 내 교회를 방문하려고만 했더라면, 그들은 진정 충만한 삶이 실제로 얼마나 충만한지를 알았을 텐데. 그런데 그들이 나의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교회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 교회가 그들에게 죽은 것으로 느꼈고, 그건 확실히 그들이 너무도 진리에서 동떨어져 있어서 보고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자신들의 삶이나 하고 있는 것에서 목적을 잃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러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충만”과 기쁨이 부족한 삶을 스스로 허락했다. 그러나 내가 타 종교의 일부 이런 신자들을 더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알게 됨에 따라, 그리고 닉 삼촌이 종교적이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삶이 적어도 내가 느끼는 정도로 충만하고, 나의 하나님이나 신과 전혀 함께 하지 않고도 유쾌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들의 교회들은 내 것이 나에게 해당하는 것같이 그들에게 살아있었다. 나는 내가 그러한 사람들을 알게 되고 더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의 삶과 그  의미, 목적, 기쁨, 충만을 내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나의 끔찍한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실밥이 터져 필요한 만큼을 다 지탱할 수 없는 옛 부대에 새 술을, 그것의 많은 양을, 담으려고 애써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알게 되는 세계가 너무 커지고 있어서 나의 종교가 다 포용할 수 없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문제에 대한 답이 기도와 성경 읽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느껴지면, 속담처럼, 누가 움직였을까? 맞춰봐라. 글쎄, 이번에는, 움직인 것(번역자주-나에게서 멀어지게)은 하나님이었고, 나는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내 믿음에 해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기도가 해결책이기 보다 문제가 되고 있었다. 과거에는, 기도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보내면 나는 하나님과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그러나, 나의 믿음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기도 시간을 줄여야 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기도를 길게 하면 할수록, 내가 단지 천장에 대고 이야기 하거나 혼자 생각하고 있다고 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내게 두려운 일이었다. 이전에, 나는 삶에서 모든 의미와 목적을 내가 존재한다고 믿던 하나님에 근거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인생이 우울하게 무의미하고 천박한 공허라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내가 아마 자살을 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준 것이 너무도 기뻤었다. 그러한 생각들이 확실히, 하나님이 기껏해야 창조에 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았다는, 그리고 아마 우리 어느 누구에게도 차이를 줄 적어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숙고하지 못하게 나를 위축시켰다. 그런데, 의미 있고, 충만하고, 즐겁기 조차한 삶을 산 닉 삼촌의, 많은 나의 교수들의, 타 종교 혹은 종교를 전혀 갖지 않은 친구들의 본보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명백하게, 비록 나는 방법을 몰랐지만, 하나님 없이 잘 사는 것이 가능했다. 이 사람들이 내게 제공한 예들이 내가 발견한 질문들에 정직히 맞서고, 해답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내가 갖도록 허락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확신한다. 그들의 본보기가 없었더라면, 진실이 무시무시한 것일지라도 무엇인지 알려 했던 이전에 언급한 나의 욕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여전히, 너무도 내 세계에 안주하고 그 세상 밖의 것을 두려워하여 그 이상 탐험하기를 감히 못했을, 기독교인일지 모른다.

혹은, 어쩌면, 나는 여전히 내 안락한 기독교 세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그렇게 할 수단도 없이, 하려 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거듭난 기독교가 인생의 기쁨과 의미와 목적과 충만을 발견하는,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항상 배웠고, 믿었었다. 닉 삼촌처럼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여겼었다. 내가 알기로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훌륭한 삶을 살던 사람들은, 삶을 위조하고 내면에서 그들이 정말로 불행하다고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배우고 믿어왔던 것에 반하는 몇몇 예들이 굳게 유지되는 믿음들을 제거하는데 충분하지 않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믿음이나 결론에 대해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예를 들어, 몇 개의 비정상적인 것들을, 현재의 이해 수준으로는 맞지 않지만, 더 자세한 조사를 통해 현재의 이론들이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라고, 대개 그러하지만, 기대하면서 쌓아둔다. 그러나 나는 거듭난 기독교인 외에 너무도 많은 다른 형태의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비종교인들 조차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선한 삶을 살고 행복하고 만족했으며, 그리고 그들이 결코 그것을 위조할 수 없음을 알만큼 충분히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늘어나는 비정상인 것들에 맞서는 과학자들처럼, 나는 내 현재의 이론, 내 현재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적절하여 수정되거나 대치되어야 한다는 가능성에 개방적이어야만 했다. 아마도 IVCF/대학 라디오 방송국 비교는, 그 자체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이었고, 내가 너무도 자주 간과했거나 혹은 내 이전 기독교적 세계관에 끼어 맞추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지만, 낙타의 등을 깨뜨리고 내 세계관이 내가 더욱 더 많이 배우고 있었던 세계를 설명하기에 부적합 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비정상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그 마지막 학기에, 나는 계속해서 IVCF 활동에 참가했었으나, 주된 이유는 그곳에 대부분의 나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과 그룹에 공약했었고, 그리고 내 언약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 의문들에 관해 그다지 많은 예기를 하지 않았는데, 그건 그들이 나를 이단으로 여기고 피하는 것을 염려해서 라기 보다는 그들이 줄 모든 답들을 (혹은, 차라리 비해답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설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몇 달 뒤면 졸업하여 떠나갈 것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실제로 몇몇과 대화를 하였었는데, 이제 나를 위한 답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로 그들에게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꼴이 되었다. 내 아버지의 삼촌과 숙모에 대한 내 삼촌과 숙모의 비유를 설명하던 중에, 나는 마침내 내 진짜 질문들에 맞섬을 허락한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IVCF 직원들 중 하나). 그러고 다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그가 답이 없다라는 것의 인정이었다.

나를 가장 신경 쓰게 만든 반응의 소유자는 내 애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질문들을 대면하는데 자신을 허락했고, 그녀는 어떠한 답도 갖지 못함을 인정했다. 그녀는, 내가 의문이 생기면 내가 진지하고 내 질문들이 정당한가를 신뢰할지 말지 결정할 만큼 충분히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있고 답을 안다면, 우리 질문들에 대답할 것이고,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신을 위해 나를 버리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그녀는 내 편에 붙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느꼈던 것이 매우 기쁜데, 그녀는 계속 전진했고 나와 결혼했으며, 우리는 여전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현재 소중한 아들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모든 것이 종교의 혜택과 무관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여름, 그 늦여름에 결혼하기 전, 나는 상호-문화 복음주의 프로그람에 한 달을 보냈다. 나는 얼마 동안 이와 같은 것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나의 의문들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그것이 중요한 믿음 쌓기 이자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날 즈음, 그러나, 나의 믿음이 매우 흔들렸다. 이 경험은, 내 종교적 믿음들을 치유하기는 고사하고, 더욱 손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는 이 국제 조직의, 그들은 클 뿐만 아니라 전 우주적 중요성을 지닌다고 생각한, 작은 세계관에 놀랐다.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한편으로 그들에 대해 당혹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그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고, 어느 정도 내 자신을 그들 중의 하나로 여겼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숭배하는 하나님의 매우 다른 그리고 여전히 진화하는 개념을 갖고), 나는 또한 자신들의 세계가 훨씬 더 넓은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는가를 이해했다. 나는 그 한 달을, 하나님과 가까운 영합을 하고 그들이 복음화 하려는 사람들에게 더 좋고 충만한 삶을 제공하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들과 함께 보냈다. 그러나 내가 닉 삼촌과 그렇게도 많은 타인들을 통해 본 바에 근거해, 내가 이미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들을 목격함이 그들이 믿는 만큼 더 충만한 삶을 정말로 갖는다고 나를 확신 시키지 못함을, 나는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A Way Out 나가는 길 (4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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