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4부-1



나의 기독교 경험담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 4부-1

인류애 0 1,352 2003.07.23 08:18
제 4부 입니다. 5부가 마지막입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끝내야지요!^^

이 글을 읽으시는 개독 여러분, 한낱 미국의 공돌이가 철학 좀 공부했다고 쓰는 글인데 코멘트나 반박 좀 하시지요?



A Way Out 나가는 길

이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을 거듭난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여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구체적으로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적어도 어떤 형태의 개념을 제거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 아마 실용적 혹은 하루하루의 방법으로, 적어도 그다지 많이는, 관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어떤 종류건 한 절대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의 주된 이유는 어떻게 인류, 혹은 “영혼들”이건 뭐건 이런 것들이 순전히 물질 세계의 결과일 수 있는 가를 내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이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삶을 너무도 과소평가함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삶의 정신적인, 감정적인, 사고하는, 느끼는 면의 부인일 것인데, 나는 그것이 존재하고 삶의 가장 중요하고 중대한 부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현실에서 삶을 잘 볼 수 없었고, 단지 움직이는 비영적인 것만이 중요한 체 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그보다 더 있어야 했다. 무엇인가가 그보다 더 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떤 새도 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들이 나는 것을 보아왔고, 따라서 움직이는 비영적인 것만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단지 날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이전 믿음들의 거부함이 틀리고 그러한 거부에 대한 비참한 결과가 있을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일종의 이신론(자연신론, deism)에 정착했다

대학 졸업, 결혼 그리고 대학원이 있던 새 도시로의 이사 후에, 나의 아내와 나는 몇몇 거듭남 타입의 교회들을 시도해 보았으나, 우리는 단지 우리의 증가하는 의문들에 대해 똑 같은 부족한 대답들만 발견한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매우 자유스러운 한 감독파(Episcopal)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런 교회를 몇 년 전이었으면 나는 끽해야 위험스러운 이단이나 아마도 거짓 기독교인으로 가득 찼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내 아내는 고등학교 때 거듭난 신자가 되기 전 한 감독파 교회에서 성장했으므로, 그녀는 그 교회와 교리에 대해 편안해 했다. 그리고 나는 복음주의 교회들에 대해서 보다 그것에 훨씬 더 편안했다, 그러나 그 감독파 교회 조차, 내가 유용한 조작을 전혀 할 수 없는 어느 형태로 존재해야만 한다고 여전히 생각한 의미 있고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definition)로서, 내게 어떠한 것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다른 독자들을 향해 다른 관점을 의도한 어떤 것을 읽었고, 그것이 내가 이 문제를 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 수업에서 나는 존 셜(John Searle-번역자주-정확한 발음을 아는 독자는 한글 코멘트 바람, 혹시 스코틀란드 성?)의 작품을 읽고 있었는데, 그는 정신(mind, 번역자주-문맥에 따라 마음 혹은 사고로 번역)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견해들 하에서 그것에 관한 다양한 요점들을 정리하는 중에 나의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관찰을 하였고, 내가 이미 배운 것으로부터 명백했었어야 할 것을 내게 확실하게 해 주었다. 나의 의문들이 시작하게 된 사건처럼, 내게 어떤 답들에 대한 출발을 부여한 이 관점이 정말로 다소 사소한 것이었지만, 퍼즐(번역자역-그림 조각 맞추기)이 담고있는 그림을 적어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그 하나의 여분 조각이었다. 정신이란 것이 환영이던지 혹은 그것을 하나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리된 물질로 부르도록 재분류 할 필요가 없는 부수적 현상이기 보다는 차라리 실제로 나타나는 뇌의 특성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유추로서, 셜은 물은 단순히 수소와 산소 원자들의 묶음인데, 이 원자들은 개별적으로는 습하지 않고, 부을 수 없고, 목마름을 잠재우지 못하며, 물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다른 것도 할 수 없지만, 물은, 수소와 산소 원자들 외에는 아무 것도 결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되니, 그렇다면 정신이란 것도 왜 안되겠는가? 라고 지적하였다.

나의 개인적 종교 관심사들과 그 학기에 공부하던 다른 것들에 그것을 연결시키면서 나는 “우와” 라고 생각했다. 내가 수강하던 이것과 또 다른 과목에서, 우리들은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생각과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조사하면서, 정신의 철학과 관련된 주제들을 공부했다. 그리고 나는 뇌와 뇌의 작동 원리, 그리고 뇌 손상 시 발생하는 것들에 관한 의학 연구를 많이 읽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이전에 다양한 출처에서 취득한 뇌 과학에 관한 지식을 증대 시켰다. 나는 내가 정신과 치료약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뇌의 화학적 조성을 바꾸기 위해 특정 약들을 주면 개인의 성격, 사고 방식, 등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다시 말해 정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프로작(Prozac)에 대해 그 약을 사용하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딴 사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뇌에 행해진 손상이, 다시 말해, 교통 사고에서, 어떻게 정신을 손상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또한, 뇌의 특정 부위에 입은 특정한 손상은 비슷한 부상을 당한 다른 사람들의 정신에 비슷한 손상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뇌가 파괴되었을 때, 마음이 전혀 나쁜 영향 없이 어딘가에 산다고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정신이 뇌의 산물이고 정신이 뇌가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뇌가 정신을 생산하는 방법은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경우일 수 있다(사실 그 경우이다). 그러나 증거는 이성적 의심의 여지 없이 정신이 뇌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정신의 기초는 물리적 뇌이다. 정신은 물질의 투영이다. 자, 나는 흔히 문제들이나 관심사들을 단순히 둘 중의 하나로-혹은 이분법으로, 줄이던지, 혹은 복잡한 불일치들을 하나의 근본적인 초점으로 감소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에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다면, 하나는 모든 사람을 두 가지 타입으로 분류하는 타입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타입인데, 나는 나중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관점은, 내 생각엔,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간의 불일치의, 유일한 중요 수수께끼는 아닐지라도, 한 중요 수수께끼이다. 유신론자들은 정신이 물질에 근본이 되고, 그리고 그러함에 틀림없고, 물질이 그 근본으로서의 정신 (혹은, 절대적 마음, 즉, 하나님/신의 마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무신론자들은 그것이 꼭 타당한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신론자들은 물질이 정신에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유신론자들은, 물질이 어떻게 스스로 존재 가능한가, 혹은 정신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물질에 의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물질 우주 홀로 정신을 발생시킬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며 이것에 불신을 갖고 반응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무신론자는 똑 같은 정도의 불신을 갖고, 하나님이 뇌가 없다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종류의 물질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존재 조차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를 알지 못함이 “물질주의자들”에게 문제라면, 그러면 “정신주의자들”도 엄밀하게 똑같은 문제를 갖는다: 물질주의자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물질이 정신을 뒷받침하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얼마나 구체적으로 정신이 물질을 뒷받침하는가를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증거가 관건이 된다: 어느 쪽을 증거는 가리키는가? 뇌와 정신이 동작하고 상호 작용하는 원리에 관한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것 하에서, 그리고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에 대한 그 어떤 증거의 결여 속에서, 내가 물질이 정신에 근본이 되고, 물질 없이는 정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 외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실제로 드러나는 특성들이 있다. 순수하게 현상적 수준에서 조차도, 물은, 예를 들면, 한편으로는 단지 H2O 분자들의 덩어리지만, 그 분자들이 갖지 못한 성질과 능력을 소유한다. 어떻게 그러한 성질들이 이 성질들을 구체적으로 갖지 못하는 원소들로부터 단지 생성될 수 있는가? 물이란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물”이라고 인식하고 부르는 한 시스템에서의, 그 시스템에 의해 생성되는 젖음 같은 성질들을 포함하는, 분자들간의 능동적 상호 작용이다.  원자들은 서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능동적으로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못하며, 그 결과인 분자들도 서로 똑같이 한다. 그 상호 작용들은 단지 잠재적으로 개 개의 수소와 산소 원자에 있다가, 특정 조건들 하에서 그 원자들과 분자들이 연관될 때, 그들은 활성화된다. 바로 그것이, 내 생각에는, “물질주의”로 칭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비판이 부족한 부분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 무언가 할 수 있고, 물질이 자신과 상호작용하고, 물질이 그 필수적 요소로서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뇌, 그리고 뇌신경과 연접부를 포함한다.

이제, 이것이 종교적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내 견해를 오해하는 부분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움직이는 물질보다 그 이상의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영적 영역의 부인이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하고 중대한 부분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것이 없는 체하기 위해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단지 물질만의 세계? 명백히 그보다 더 이상이 있다. 하지만, “물질주의자”는 가장 확실히 이를 무시하거나 있지 않다고 여기는 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영적”이라고 불러라, “양심”이라 불러라, “주관성”이라 불러라, 그건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 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나는 영적/양심적/주관적/뭐든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의미에서 “모든 것이 물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도 많은 종교적 신자들이 생각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정말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나는 모르겠다. 그것들이 어떻게? 생각을 생각만 해봐도 생각이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사람이 생각을 값지게 여김을 증명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모든 것이 물리적인 것들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적 영역으로 불리는, 인간이기 위한 지극한 경이와 중추에서 영적, 주관은 물리적인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일부이다. 정신이란 어떤 “객체(thing)”가 아니거나, 일종의 분리되어 존재하는 정신적 “비객체(non-thing)”이다. “정신”은 명사 라기 보다는 차라리 동사이다. 정신은 뇌의 한 활동이다. 사고하기는 뇌가 하는 어떤 것이다. 사고들이란 야구 경기들 만큼이나 실제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뇌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은 야구 경기들을 진행하는 선수, 코치 그리고 주심들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야구 경기를 하는 선수들처럼, 이 사고하기를 수행하는 물질은 번갈아 수행 결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정신적 활동은 사고하기가 없었다면 이 물질에 해당하지 않을 그 활동을 수행하는 물질에 변화와 영향을 초래한다. 야구 경기가 경기하는 이들에게 효과를 주는 것과 똑같이, 사고도 물질 세계에서 그리고 물질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깨달음이 이 “움직이는 물질” 과 관련하여 내가 이전에 인식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결론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나의 영적 여행은 나를 물질 세계 안으로 다시 데리고 갔으며, 나의 “영혼”이 그 물질 세계의 산물이며, 영혼이 그 세계로부터 창조됨을 깨닫게 이끌었다. 나의 영적 여행은, 그 이후, 물질 세계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였다. 그것은 나를 이끌어 “그 이상의 것”이 이미 “그” 안에 다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것은 이러한 수업들에서(간단히) 그리고 수업 외에 내 자신의 노력에 의해(구체적으로) 알게 된 진화에 관한 것들에 의해 더욱 확증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기 전에는, 즉 내가 창조주의자였고 내가 읽던 것이라고는 창조주의자들이 쓴 주제에 관한 것이었을 시기였기 때문에 그 제목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진화의 현실 과학(번역자주-공상 과학의 반대 개념)에 관해 읽기 시작했는데, 창조주의자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기본에서 벗어났는지, 그들이 얼마나 진화에 대해 무지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진화를 왜곡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 예제를 제시하거나 진화론을 방어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자료가 존재하며 (예로서 기원 이야기[Talk Origins]를 읽어 보라),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익숙해지려면 어느 정도의 공부를 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일단 당신이 증거를 공부하고 나면, 증거가 창조주의를 지지하고 진화론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모순, 실수 혹은 억측이 없다고 우기는 만큼이나 헛소리(ridiculous)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주장을 모든 새는 날수 없다라는 제기하는 편이 더 낫다. 나는 새가 날아다님을 본 적이 있으므로, 당신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만일 기독교의 진리가 진화론의 진리와 불일치하면, 기독교에 더더욱 불리하다. 대다수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그러나, 진화의 실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종교적 믿음들 안에서 수용하는 방법들을 찾아냈다. 만일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창조주의자들이 똑 같이 하기만 한다면야, 진화론의 실상을 인정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그들의 교파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선택의 여지를 남길 텐데; 이대로는, 나는 한 때 내가 그리도 열정적으로 믿었던 종교를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내가 노력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내가 받아들이고 믿곤 했던 기독교가 더 이상 나의 경험들을 설명하고, 현실을 포함하고, 그리고 내가 보는 대로의 삶을 포용할 수 없음을 나는 알았다. 그것은 광범위한 현상들에 대해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으나, 나는 맞지 않는 부분도 너무나 많음을 알았다. 그것은 타 종교 신자들이 어떻게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종류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기독교는 어떻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나님이 무고한 어린이들이 쇠약하게 만드는 질병으로 인해 비참하게 고통 받는 것을 허락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 삶과 이 삶에서 그런 일어난 일들에 어떠한 의미나 요지의 평가절하가 없는 것은 적어도 아니지만, 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유신론자들이 이 “악의 문제”, 혹은 “고통의 문제”,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생기는가의 질문에 대한 해답들을 제시해왔으나, 추궁 받으면, 답들은 불변하게도 “믿음의 신비,” 혹은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아니다,” 혹은 우리가, 적어도 유신론 측면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식으로 호소한다. 나는 하나님의 너무도 명확하여,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 유신론자들이 달갑지 않은 믿음의 신비들에 호소해야만 하고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는 유념함을 계속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함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로 답을 알았는가, 아니면 비록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거나 그것들에 접근할 방안이 없을지라도 어딘가에 답이 있으리라는 단지 믿음 (근거 없는 희망?)이었나? 나는 기독교가 (그리고 내 교회의 종파가)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이라고 전심으로 믿곤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의문하기 시작하면서,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이 모든 “믿음의 신비들”에 위압당하는가?                

그 안에서 정신을 만들어내도록 뇌가 진화 가능한 자연주의적 우주는 이 모든 것을 훨씬 더 잘 설명함을 나는 알았다: 무고한 자들의 고통 같은 것들에 대해 우주론적 인식 이유가 없다 (강하게 의식하는 고의적 목적의 의미에서); 그러기 보다는, 현상은 우연히 발생하고, 그리고 일부는 우리에게 해가 되기도 한다.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위한 올가미에 대한 형벌을 면하기 위해 의도적인 어떤 하나님을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물리적 세계 뒤에는 아무것도 신비한 것이 없으므로 신비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전적으로 물리적인 세상이다. 성경은 어떤 완벽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이 아니므로,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 행위 그리고 구속의 관계에 대해 불일치하고, 역대기와 사무엘서의 저자들이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며, 그리고 역사에 대해 쓴 작가들이 그들의 이웃/원수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단지 시도했던 것은 사리에 맞다. 다양한 종교를 믿거나, 혹은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의미와 목적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발견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발견하거나 의미와 목적을 창조하고 그리고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적 뇌들은 진화하여 정신들을, 경험하고 세상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다른 정신들을 돌볼 수 있고, 선과 타인과 타인이 번영하도록 돕는 위대한 일들을 하고, 의미, 목적,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깊은 만족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정산들을 생산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이 이미 “그” 안에 있었다. 하나님이 있는 세상의 악을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없는 세상의 선을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움을 알았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고, 혹은 유신론자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불필요한 가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증가하는 “창조”에 관한 이해는 창조에 관련된 유신론적 신에 대해, 여지가 전혀 없을 때까지, 점점 더 작은 여지를 남겨 가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알고 있었던 세계가 너무 커져 내 이전 종교적 믿음들이 그것을 수용할지 못하게 되었다, 개인적 수준에서건 혹은 좀 더 일반적 수준에서건 둘 중의 하나는. 개인적 측면에서, 내 것과 다른 종교에서 혹은 종교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만족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반례를 갖게 됨 뿐만이 아니다. 더 일반적으로, 세상 자체가, 특히 생물학과 천문학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작은 쇼에 비해 너무 광대했다. 생물학으로부터 나는 인간종이 얼마나 신비하게 놀라운지를 배웠다. 그러나 또한, 나는 결코 우리만이 독특하게 그렇지 않음도 배웠다. 고양이, 카나리아, 바퀴벌레 그리고 선인장, 현재와 과거의 수천만 종들이 모두 똑같이 신비하게 놀랍다. 우리 인간들끼리 특별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객관적으로 말해, 다른 삶의 형태에 비해 우리가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우리는 독특한 성질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다지 독특하지 않다: 너무도 많은 다른 종들이 너무도 많은 독특한 성질들을 또한 갖고 있다. 그리고 나서 천문학으로부터 나는 우주가 얼마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지를 배웠다. 우리의 태양은 단지 우리 갤럭시 안에 있는 수천억 개 중 하나의 별이고, 우리의 갤럭시는 단지 엄청난 덩어리로 서로 춤추는 수천억 개의 갤럭시들 중 하나이다. 물리학자 리차드 페인만(Richard Feynman) 이 관찰했듯이, “내가 보기엔 이 환상적으로 신기한 우주, 이 엄청난 시간과 공간과 다른 종류의 동물들의 영역, 그리고 모든 다른 항성들, 그리고 이 모든 제 각각의 움직임을 갖는 원자들, 기타 등등, 이 모든 복잡한 것이 단지 하나님이 인간이 선악에 대해 몸부림 침을—종교가 갖는 관점—관찰하는 무대만인 것 같지는 않다. 무대가 그 드라마에 비해 너무 크다." 당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주의 중심적 관심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지 평범한 불합리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그리고 불합리하게 오만한 것이라고 내게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이 놀라운 우주가 왜 여기에 있는가? 에 대해 반대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없다면 사물이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어디로부터, 예를 들어, 물질적 세계가 왔는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왜 지금과 같은 방식인가? 궁극적으로 내 관점에 관해 호소할 수 있는 것은 “글쎄, 그게 단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야, 그건 단지 맹목적인,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건 그거야”라고 단지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호소하는 것은 그 문제를 극복하게 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물 뒤의 궁극적 “이유(why)”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의 신비일지라도, 우리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무신론적 우주에서는 신비한 “이유” 조차도 없는 반면에, 적어도 “이유”를 우리는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궁극적인 “이유”를 정말로 제공하는가, 혹은 단지 문제를 한걸음 뒤로 미는가?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는 어떻게 여기에 도착했는가? 그는 자존자(self-existing)이다, 라 당신은 말하는가? 그런데, 왜 물질적 우주는 자존할 수 없는 것인가? 무엇이 그것을 막고 있는가? 자존하는 물질적 우주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물리적 우주를 넘어서는 표준들이 있는가? 그 표준들은 어디로부터? 왜 그 표준들은 자존하는 물질적 우주를 허락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그것들을 막는가? 다른 초월적 표준들(metastandards)? 글쎄, 왜 그것들은 못하는가. 그리고 등등. 만일 하나님이 이면에 “이유”가 필요 없다면, 왜 물질적 우주가 그 뒤에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궁극적으로 “왜 아무것도 없기 보다는 무엇인가가 있는가”의 질문에 관한 답은 있을 수 없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무엇인가에 호소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고 나면 그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이 가해질 수 있다. 유일한 나머지 대안은 호소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난제를 극복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무언가이고, 당신은 이 무언가와 똑 같은 것을 물을 수 있다: “왜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필요적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표준이나 어느 하나님(신)의 존재가 필요한가에 따른 표준들의 조합에 호소하는 것, 즉, 당신이 하나님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를 넘어서는, 그리고 그 표준들의 “이유”를 물을 수 있는 무언가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자들은 답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에 대해 스스로 근거이다 라고. 그 대답이 말하는 것이라고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필요적으로 존재한다 이다. 만일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데, 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은, 하나님의 자신의 필요성에 대해 스스로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왜 물질적 우주는 필요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신의 필요에 대해 스스로 근거가 될 수 없는가? 무엇이 그것을 막는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것이 필요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필요함에 따른 어떤 외부적 표준에 의거해야만 한다, 다른 어떤 것이 그것을 필요로 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의 존재는, 존재의 조건들을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무조건적이고 전적으로 임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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