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제5부-최종편(2)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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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9 17:23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누굴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어느 누구를 신뢰할 수 있을 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당신 자신의 성격을 밝히는 것인가?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정말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인가? 당신이 선한 유일한 이유가 악함의 결과로 이어지는 응징을 두려워하기 때문인가? 도덕에 대한 당신 자신의 포용력이 그리도 미성숙하거나 삐뚤어져 당신은 누군가가 선행을 하는 것이 단지 그것이 선이기 때문임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가? 당신은 돌봄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가? 만일 이것이 당신이 느끼는 방식이라면, 당신은 우리가 경찰과 교도소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고, 나머지 우리는 당신과 당신 같은 다른 사람들이 성숙하거나 당신들의 삐뚤어진 도덕적 포용력이 개선되도록 도울 더 좋은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더 심각한 반대는 묻는 것이다:그래서 뭐? 그러므로 도덕은 하나님 없이 그리고 절대적이고 영원함 없이 실제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죽고 그게 그거면, 무슨 차이를 보이는가? 지옥이 없는지에 상관 없이, 천국이 없으면 어찌 되나? 우리가 내일 죽고 그 어느 것도 상관이 없다면, 왜 그냥 먹고, 마시고 그리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한가지는, 우리가 내일 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항상, 만일 우리가 과하게 먹고 마시면, 내일 우리는 살고, 여분의 무게와 숙취와 함께 산다. 내일 우리는 죽는다 가 사실인 경우는 각 사람의 인생에서 단 하루(평균적으로 3만 날 정도에서)기 있다. 그리고 그 날이 어느 날인지를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날에, 우리가 오늘 행한 것의 결과와 함께 살 달들, 해들 10년들까지도 가질 확률에 의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들에게 질문을 되돌리겠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는 것이 종말에 우주까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래서 뭐? 우리는 시간의 끝에 있는 우주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이다, 여기서 현재, 그리고 지금부터 몇 년 동안,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는 우리의 자녀들과 적어도 일부 다른 사람들은 더 오래 동안.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현재, 그리고 우리가 떠나버린 시간 동안 우리에게 문제되지 않고, 그것은 우리에게 상관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가 된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그 아무리 많은 세월의 잔여 기간에 걸쳐 우리에게 엄청난 차이를 줄 수 있다. 달리 주장하는 것, 내가 즐거운 왕자건 불행한 가난뱅이(혹은 불행한 왕자나 즐거운 가난뱅이)건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삶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삶이 중요하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는가? 내게는 중요하고, 그거면 나로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요지가 무엇이냐?고 물을지 모른다. 만일 우리 모두가 어쨌든 단지 죽을 거라면 그리고 그것이 끝이라면, 왜 조금이라도 고민하는가? 이 어느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 없이 어떻게 인생이 아무 의미라도 가질 수 있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요지가 무엇인가?
이는 내 기독교 세계관이 붕괴된 후의 세상을 재건립 하는데 내가 직면했던 나머지 커다란 질문이었다. 신이 없는 우주에서 삶은 도대체 의미를 갖는가? 이 삶이 내게 중요할 수 있는가? 닉 삼촌과 타인들의 예로부터,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의미 있고,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매우 쉬웠었다: 하나님이 도덕을 제공하듯이 그 의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더 근접한 조사를 해보면, 이는 너무도 모자랐고, 그것이 약속한 것을 정말로 전해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대답에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번째로, 내가 다음 생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인이었을 때 이 삶이 내게 정말로 그토록 많이 의미한 적이 있는가? 혹은, 그 모든 의미가 그 억지로 주장되는 다음 생으로부터 유도되었나? 현 세계가, 그리고 여기 사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진짜 세계로 여행하는 단지 중간 정거장인가? 당신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제외하고 이 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가? 어떤 삶을 위해 기독교는 의미를 정말로 제공하는가? 우리가 아는 여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현 삶, 아니면 억지의 다른 세계에서 우리가 언젠가 살기를 희망하는 가능한 다음 세계? 또 다른 문제는 의미가, 도덕적 의무의 뜻에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의미는 원래 주관적이다: 공유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내 삶이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의미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아무 것을 의미한다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을 신경 쓸 경우에만 해당할 것이다.
의미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대한(for) 의미 그리고 ~에게(to) 의미. 나무의 경우, 비의 부족은, 나무가 고하고, 가뭄이 충분히 길면 나무가 죽을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무에게 아무것을 의미하지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에 관심 두는 것은 더더욱 적고,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조차 없기 때문이다. “~대한 의미”는, 그러면,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바에 따르면, 항목의 객관적 뜻이다. “~에게 의미”는 주관적 뜻에서의 의미, 경험된 의미,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의미,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개인적인 의미이다. “~대한 의미”의 출처는, 물리적 세계에서 원인과 영향, 움직이는 것이 다른 것에 충돌하면서 낳은 일련의 결과들과 같이, 외부적이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 대한 의미”의 또 다른 출처가 될 것이다: 우리 삶에 대한(for) 하나님의 의미,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to) 의미하는 것이 외부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우리 삶을 위한 그의 계획은 이것과 저것은 타당하고 이것과 저것은 그렇지 않다고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에게 의미”는 우리에게 중요하고 우리가 관심 갖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미이다. 그리고 관심은 그 의미의 출처이고, 우리의 관심 갖기가 그 의미이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내게 중요하고, 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내가 타인들에 관심을 가지면, 그러면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게 중요하다. 어느 한계까지, 의미란 알고 있음, 주관성 갖음, “~대한 의미”의 현실을 인식함, 예를 들어 곰팡이 핀 빵을 먹으면 우리가 병이 날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음 등의 자연적 결과이다. 의미는, 어느 정도, 단지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냥 온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다. 의미의 많은 수준들과 깊이들이 있고, 그리고 그 기본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의미를 계발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의미를 능동적으로 창조해야만 한다.
의미는, 그리고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은, 내가 발견한 바로는, 우리의 능력 안에서 창조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많은 방식으로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가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방법을 결코 배우지 못할 지도 모르고, 우리가 충만을 성취하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영역 밖이거나 얻더라도 피상적이고 불충만한 목표 달성하기와 같이, 우리의 성격 혹은 능력과 부적합한 방법들로 노력한다. 어쩌면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노력들을 방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충만한 삶을 발견하는데, 혹은 창조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성공했고, 확실히 그들은, 타 종교적 방법과 종교를 관련되지 않는 방법을 포함하는 많은 다른 방법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이런 저런 형태의 신에서 의미와 충만함을 찾았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의미와 충만을 찾을 수 없다 할지라도, 모두가 똑같이 할 수 있다거나, 혹은 어느 누구도 다른 방법으로는 의미와 충만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둘 다 수반되지는 않는다. 당신은 만물의 잣대가 아니다, 당신과 당신의 경험들과 그 경험들에 대한 당신의 이해가 만물을 판단하는 표준이 아니다. 당신 버전의 예수 혹은 알라, 혹은 제우스 혹은 그 누구/그 무엇에서 당신이 의미를 찾았다는, 그리고 당신의 달리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 혹은 그 어느 누구 한 사람에 대해 유효한 것은 아니다. 다른 방법으로 의미와 충만을 발견한 사람들의 겨우 몇몇 예가 의미를 발견하는 당신의 길을 다른 사람이 쫓아야만 할 필요가 없음을 입증한다.
이처럼, 사람이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이끌어 나가는 원대하고 우주적인 역할에서 중요한 인물일, 혹은 스스로 그럴 것이라고 믿기조차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단지 몇몇 예면 충분하다. 만일 당신이 그것이 필요하다면, 만일 당신이 현세 일상의 모든 것 안에 있는 이 삶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일상과 현세 안에 있는 만족스러운 풍부함을 발견할 만큼 충분히 배우지 못했거나 성장하지 못했다. 현세로부터 풍부함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현세에서 당신 자신으로부터 그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넘어서 볼 필요는 없다. 당신 자신을 넘어서 볼 필요가 있다면, 그러면 아마도 이 세상은 결코 현재도 충분하지 않고 앞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광대한 우주적 설계와 그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위한 역할을 필요로 하던지, 혹은 적어도 그것들이 있다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당신이 느끼는 방식이라면, 아마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무엇 때문에 채우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당신의 삶이 놓치고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주위 친구들로부터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만족스러운 의미와 충만을 창조할 수 있고, 그것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타인들의 예에서 발견해왔고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발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혹은 이슬람 혹은 불교 혹은 비종교적 근원들의 다양한 형태로 의미를 찾았다. 매우 충만한 삶은 구현 가능하며,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취된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혹은 이슬람 혹은 불교 혹은 비종교적 수단들의 다양한 형태들 중 하나 혹은 다른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데 실패해왔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시도한 그 어느 출처로부터도 의미를 발견하는데 실패해왔다. 단지, 한 사람의 경력에서 높은 지위를 성취함으로써, 혹은 많은 돈을 범으로써, 혹은 섹스 혹은 어떤 다른 외적, 일반적으로 경쟁적이고 비교적인 그런 종류의 기준을 많이 가짐으로써 깊고 만족스러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는 유신론자들과 동의한다. 그러나 종교로부터 혹은 멋진 차로부터 혹은 무엇으로부터 건 간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의미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문제이다. 의미는 어느 것으로부터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준다. 의미는 우리를 위해 창조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의미를 창조한다. 어쨌든 나에게는, 내적이고 협조적인 표준들이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성장시키기 위한 매우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것은 내 자신과 이 의미를 공감하는 타인들과의 관심 어린 관계를 구축하는데 있다.
나는 한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혹은 적어도 내 생각에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의미의 출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하나님”이란 것이 특정한 주관적 경험에, 그 경험들의 잘못된 이해에 붙이도록 배워왔던 이름표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이란 것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그에 관한 나의, 혹은 다른 사람의 생각들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저 밖에”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였을 때, 내가 느낀 의미, 충만은 실제였다. 나는 일종의, 하늘을 나는 코끼리 덤보가 그를 정말로 날 수 있게 해줄 거라 생각한 요술깃털이 마술이 아니었고, 그가 정말로 스스로 하늘을 날고 있었음을 발견했을 때처럼 느꼈다. 반대로, 그 유추는 잘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덤보는 단지 깃털을 잡고 있었고, 날개 짓이나 혹은 깃털을 가지고 그를 실제로 도와 날게 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하나님 믿음은, 반대로, 다른 무언가를 함으로써 내가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만들기 위해 수동적으로 붙잡고 있던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 보다 그 믿음은 정확히 내가 의미와 충만을 스스로 창조하곤 했던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덤보가 했던 것처럼 “내 귀 팔딱거리기”만 계속할 수는 없었다. 나는 “깃털을 이용하고” 있었고, 따라서 내가 의미를 창조하는데 사용해왔던 믿음을 대체할 방법, 혹은 방법들을 여전히 찾아야만 했다.
인생에서 의미를 창조하고 충만을 성취하는 능력과 잠재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거기에 도착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실제로, 최종 목적지 혹은 어쨌든 완성된 제품이란 뜻에서의 “거기”란 없다. 일종의 “풍부함”을 경험하느냐 혹은 마느냐의 경우가 아니다; 풍부함은 여러 정도를 인정한다. 당신이 어디에 있던 간에, 더 많은 성장이 가능하다. 내가 “도통한” 현자 혹은 권위자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하려고도 안 한다. 나는 단지 내 여행에 의해 만족되는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 혹은 내가 모든 때에 항상 행복하다고 느끼고 일어나는 모든 것에 항상 만족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항상 행복하게 느끼는 것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 조차에 관해서 정말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충만을 발견함에 의해 내가 뜻하는 바는 어려운 때에 조차, 나는 그것이 가치 있다고 여전히 느낀다는 점이다. 나는 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광란 중에 안네 프랑크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마음이 선하다고 여전히 믿는다,” 라고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가 있던 위치(정신적 성숙의 수준-번역자 주)에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나는 적어도 사람이 어떻게 그녀의 것과 같은 삶 조차 값지다고 알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을 지라도). 혹은 내가 이 어느 것을 성취하는 법을 어느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현자 혹은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있건 없건 간에, 바로 여기 현재 삶에서 행복하고 즐겁고 풍성할 수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삶을 갖느냐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내게는, 부적절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그의 실제 존재함이, 내가 발견하게 된다면, 아마 내 자신과 행동에 변화를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내가 의미와 충만을 추구함에 관해 내가 가는 방법이 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지에 관해서는, 혹은 그 의미와 충만의 출처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대한 의미’와 ‘~에게 의미’의 나의 구별에 의해 신의 존재가 나에 대해 더 많은 의미를 제공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너 많은 의미를 제공할 수는 없다; 오직 내 힘으로만 그것을 할 수 있다. 내 삶의 의미, 풍성, 그 안에서 내가 성취하는 어떠한 충만도 삶 그 자체로부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으로부터 유도된다.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의 핵심이다. 만일 이것이 있는 것의 전부라고 밝혀지면, 그러면 그것은 그 수고보다 더 가치 있다.
거듭난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내가 도달했고, 내가 “거기”에 있었고, 내가 있던 곳을 “넘어서”는 곳이 없다고 믿었다. 계속되는 성장, 물론 맞다, 점점 더 구세주처럼 되는 정신적 성장. 그러나 그 성장은 단지 더 많은 똑같음이었다; 다시 거듭남이 없었다. 이제 나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보고,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한 더 심오한 “넘어섬들”이 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종적으로 달성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짐이 없다고 그 여행이 목적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 자체가 목적인 여행이다. 삶은 그 자체가 의미이다. 반복하지만, 내가 이 삶을 보았을 때 “그보다 더 있음에 틀림없다”에 관해 생각했던 것은, 결국 깨달았는데, 이미 “그것” 안에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 어쨌든. 그리고 그 잠재력을 우리 자신들을 위해 실현시키는 것은 우리 각자에 달렸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풍성한 삶을 가졌다고 느꼈다. 그러나 삶은 지금 나에게 더더욱 풍성하다. 현 관점에서,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가졌다고 느꼈던 풍성이 차라리 피상적으로 보이고 현재 이룩한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그리도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들의 현 풍성함이 그들이 구세주에게 그들의 삶을 헌신하기 전에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심오하고 충만하다고 말함을 들었던 것과 똑같이, 이것이 내가 기독교를 “넘어서 움직인” 결과라고 나는 쉽게 말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된 후 더 큰 충만을 발견했다. 나, 그리고 내가 아는 다른 이전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버린 후에 더 충만을 발견했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를 선택하거나 버리는 것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과 필연적으로 많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는 한가지는 우리가 모두 나이가 더 들었다는 점이고, 따라서 기독교를 뽑느냐 혹은 버리느냐 보다는 나이와 성숙에 더 관련이 있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포기, 기독교를 넘어서는 이동이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었던 것 보다 내가 삶에서 더 많고 깊은 의미와 만족을 찾는데 도와준 방법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하나님 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삶과 세상과 모든 그것의 아름다음을 정말로 감사할 수 있는지 궁금했었고, 그리고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있던 정도까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의심했다. 창조주와 유대 관계 없이, 어떻게 사람이 창조를 정말로 감사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나는 하나님 없이 삶, 우주, 모든 것이 훨씬 더 경이롭고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내가 기독교인이었을 때, 나는 현 세상이 정말로 참 세상인 다음 세상의 단순한 징표로 여겼다. 현 세상의 아름다움은 단지 어떤 다른 세상의 투영이었다. 현 세상에서 내가 경험한 아름다움은 파생 물이었다. 이제는, 그러나, 이것이 진짜 세상이고, 이것이 모든 불행, 기쁨, 슬픔, 충만 그리고 당혹 뿐만 아니라,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임을 나는 안다. 그것은 파생 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여기에 있다. 그것이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내가 이 세상을 고맙게 여기도록 허락한다.
이것에 더하여, 나는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 내게 주어진 의미의 단순히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니라는 인식이 또한 있다. 나는 능동적으로 의미를 창조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만일 내가 인생에서 의미와 충만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게 달렸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고, 그리고 나는 현재 많이 배워야 하고 앞으로도 많이 배워야 하겠지만, 나는 하면 할수록 점차 성공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작업하고 달성하는 것은 나이다. 그 깨달음 자체가 심오한 충만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가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신이나 어떤 다른 근원에서 부여 받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에게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충만이다. 적어도, 그것은 내 삶에서 의미와 충만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에 의지했을 때 경험했던 것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가 의미이다. 여행(인생 여정-번역자 주)은 (그 자체가)목적지이다.
이 마지막 섹션의 일부를 되돌아 보면, 한 각도에서는 그것이 내게 일련의 피상적이고 평범한 의견처럼 보이고, 그것을 썼다는 것에 나는 당혹스럽다. 우리 모두는 전에 그것을 다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야, 그것은 여행이야,” 모든 그런 종류의 것들을.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는 적어도, 무엇이, 어쨌든 내게, 매우 심오한지를 알 수 있다. 어쩌면 내가 그런 종류의 졸작을 심오하다고 알 수 있는 사실이 나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말한다. 혹은, 어쩌면 풍성, 충만, 깊게 만족시키는 즐거움이 일상 생활의 현세 바로 여기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요점이 있다. 어쩌면, 요점은 그 각도에서 삶을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