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제5부-최종편(1)



나의 기독교 경험담

나는 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 켄달 홉스 제5부-최종편(1)

인류애 0 1,815 2003.08.29 17:15
오디세이 님, 그리고 회원 여러분,

마지막 장을 올립니다. 여름이라 좀 게을러져 늦었습니다. 여러분의 사고와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Building a New World 새로운 세상을 세움 (마지막 장)

그러나 다음으로 나는 무엇을 하는가? 여기로부터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내 과거의 종교적 믿음들을 나는 무엇으로 대체하는가? 닉 삼촌과 많은 다른 사람들이 신 없이도 잘 사는 것이 가능함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떻게?

거듭남 체험 전에,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 삶과 경험들을 포용하고 전체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반적 이해가 없었다. 기독교는 인생의 구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것에 대해 이유와 이해하는 방법을 나에게 제공했다. 어린 아이로서, 그렇지만, 포괄적 세계관의 결여는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포괄적 세계관을 갖는다는 생각이 내게 전혀 떠오르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의 결여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확실히 강력한 느낌이었다. 나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산산조각 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세계관이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틀이 형성되었을 때 매우 강력한 느낌이 왔다. 얄궂게도, 기독교로의 개종이나 헌신을 “거듭난” 경험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에 대해, 그 경험은 내가 “자연주의자” (굳이 명칭을 달자면)로서 3번째 태어났을 때 내가 느낀 것을 전달하는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잘 맞는 유추이다. 나는 더 이상 혼란의 바다에서 헤매지 않게, 삶, 우주, 어느 무엇이라도 앞뒤를 분간치 못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주제, 이해, 조리 있는 사고 방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 없이 강력하고, 긍정적인 느낌이었다.

나의 기독교로의 개종/헌신 때와 같이, 그렇지만, 그건 단지 조리 있는 세계관의 틀일 뿐이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많은 세부 사항들이 있었다. 나에게 있어, 두 가지 가장 큰 문제는 도덕과 의미였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각각에 대해 어떤 기준이 있는가?

파종 이후, 나는 여전히 윤리적이고 윤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탄복할 만한 삶을 산 무신론자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언가가 명백히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도덕을 하나님(신)의 관점에서 이해했었다. 도덕에 대한 현세적, 자연주의적 근간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어”라는 것에 단지 호소하는 것보다 도덕의 설명에 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다.

한편, 회상해 보면, 그 설명이 얼마만큼 좋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 혹은 하나님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했다고 말한다? 내가 이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도덕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추종자들과 불변하게도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서로 격렬하게 불일치할 때 조차도. 나는 하나님과 도덕적 관점에서 이견을 주장하는 신자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과는 불일치하나 그들과는 아니라고 말한다. 혹은 어쩌면 이전에 하나님이 어떤 점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얘기했다가 내 마음을 변화시켜 이제 우리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삶을 보아라: 그는 전적으로 엉망진창이므로, 하나님은 그와 동의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아니야, 하나님은 내게 동의하고, 그것이 사탄이 네가 아닌 나를 공격하는 이유라고 얘기할 것이다: 사탄은 내가 하나님의 참된 사역을 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기에, 나를 방해하려고 하고 있다. 혹은, 하나님이 나의 기독교적 성격을 개발하려고 그것(그가 의로운 욥에게 했던 것처럼)을 하락하고 있다거나, 그에게 더더욱 의지하게 하려고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라거나, 뭐든 간에. 따라서,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나 축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것이라도 정당화할 수 있다. 당신의 자식들을 죽이는 것까지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아들을 죽이려 했고, 야고보서 2:21에 따르면, 그는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 딸을 죽이도록 까지 실제로 허락 받았다. 예를 들어, 안드레아 옛츠가 그녀에게 그녀의 자식들을 죽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이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에도 그것을 했었고, 그렇게 할 의지가 있음을 의롭다 했다. 명령이 비록 집단 학살을 범하는 것일지라도, “복종하는 것이 희생보다 더 낫다.” (사무엘상 15)

그렇다면, 기독교인, 혹은 유신론자의 도덕성 뒤로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있기라도 하면, 그 점에 대해, 하나님의 도덕 뒤에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는 도덕적 명령들에 대한 이유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은 단지 근거 없는, 그의 입장에서의 임의적 변덕들인가? 만일 이유가 있었다면, 그 이유들은 무엇인가? X가 선하거나 옳고 Y가 악하거나 틀렸다고 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무엇에 호소했는가? 그리고, 그가 이유들을 가졌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지나쳐 우리 자신의 이유들에 왜 호소할 수 없는가? 만일 그가 이유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만일 X가 옳거나 그른 이유가 단지 그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라면, 만일 그의 도덕적 규범이 단지 그의 임의의 주관적 변덕들이라면, 무엇이 그것들을 우리들의 임의의 주관적 변덕들보다 더 좋게 만드는가? 힘이 정의를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만드는가?

규범들이 그의 성격 혹은 그의 존재로부터 유도되었다거나, 기인했다거나, 그 일부라고 당신이 대답하기 전에, 똑 같은 종류의 것이 그의 성격에 대해서도 물어질 수 있음을 명심하라. 그의 성격이나 존재가 상이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그의 성격을 강요하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지나치고 그가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모든 기준들에 호소할 수 없는가? 만일 그렇다면, 만일 그의 존재가 어떤 방식이었을 수도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라도 정의상 “선”하고 “옳다”면, 무엇이 이를 그 어느 것보다 더 좋거나 못한, 임의의 도덕에 대한 근거로 만드는가? 당신이 플라토의 대화집 유사이프로에 익숙하다면, 아마도 이 질문들이 그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할 것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철학 강의 때 내가 읽은 첫 번째 책들 중의 하나였다. 내가 처음으로 그것을 읽었을 때, 나는 여전히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하나님과 선이 어떤 방법으로 근본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 관점에 너무도 집착해서 플라토의 주장에 대한 전적인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매우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는 바, 도덕은 하나님과 그의 명령과 성격에 무관해야 하거나, 혹은 그것은 단지 옳게 만드는 힘의 경우이다. 하나님 조차도 만족시켜야 하는 실질적 도덕에 대표준들이 실제로 있던지, 혹은 하나님의 규범들이, 그가 가장 크고 나쁜 뮤타(mutha, 속어, ~놈; 번역자주)이고 따라서 자기가 원하는 데로 그의 도덕관을 강제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적이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도덕으로 되는지 둘 중의 하나이다. 나는 도덕이 우리의 속박 받지 않는 선택과 무관함에 동의한다: 내가 임의적으로 이웃의 아내를 강간하는 것이 선하다고 택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또한 똑 같은 이유로, 도덕도, 만일 실제라면, 하나님과 무관함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 아니면, 하나님이 내 이웃의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선한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그와 그의 성격을 속박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러면 그의 임의적이고 비구속적인 도덕적 선택이 내 것보다 어떻게 더 나을 수 있는가?

허나 도덕 아래에, 그렇다면, 무엇이 기초가 되는가? 도덕은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인가? 대개, 복음주의 유신론자들은, 그리고 나도 믿곤 했지만, 도덕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단지 임의의, 근거 없는 변덕에 바탕하고, 나는, 예를 들어, 나치주의자들이 나쁘거나 틀렸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의견의 문제, 즉 임의적 변덕일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도덕은 객관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의한 ‘객관적’이란 모든 존재들에 대해 항상 진실인 ‘절대적’임을 의미한다. 이는, 그렇지만, 그릇된 이분법이다. 그것은 가능성들의 긴 연속선상에서 두 극단들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 극단들이 유일한 가능성들인 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관점들은 또한 분리되어 있는 견해들을 합성한다: ‘실제적’, ‘객관적’ 그리고 ‘절대적’이란 말들이 종종 이 관점을 해석하는데 있어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견해들은 매우 상이하다. 어떤 것은 객관성 없이 실제적일 수 있고, 어떤 것은 절대적이지 않아도 객관적일 수 있다. 도덕이 실제임을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면 그것은 따라서 객관적이고, 또한 절대적이며 하나님에 의지한다고 즉시 얘기하는 쪽으로 건너 뛸 수는 없는 것이다.

도덕은, 내가 이해하는 바, 실제하고, 그 안에 객관적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다. ‘객관적’이란, 그러나, ‘절대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문맥에서 ‘객관적’이란 단어는 “정신적 개념, 생각 혹은 믿음으로부터 구별되는 물질적 개체의 혹은 그와 관련을 갖는” 선상에서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항목이 그것에 붙으면, ‘도덕적’이란 종종 ‘절대적’의 선상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객관적’의 표준 정의에 의해, 한 신학 전문 윤리학자는 실제로 도덕에 대한 완전히 주관적인 해석을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님(절대신)의 결정들이나 성격에 근거한 그의 정신이나 개성에 종속한다. ‘객관적’의 표준 정의에 의해, 이는 도덕성을 객관적이지 못하게 하는데, 비록 묻고자 하는 정신이 하나님의 정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도덕주의자들이 ‘객관적’을 의미하는 바는 ‘절대적’이란 말이 더 잘된 표현일 것이다, 즉 모든 시간과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그런 것. 한 전능한 신에 의해 지지를 받는 완전히 주관적인 도덕은 절대적일 수 있으나, 객관적이지는 않다.

도덕은, 내가 이해하는 바, 또한 그 안에 주관적인 요소들을 갖으며, 그 요소들은 주관적이기 위해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주관적’이란 정신적 개념, 생각 혹은 믿음들과 관련된 무언가를 지칭한다. ‘주관적’이 임의 혹은 근거 없음 혹은 하찮다는 뜻은 아니다. 주관적인 어떤 것이 하찮을지 모르지만, 또한 매우 중요해질 수도 있다. 내 아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주관적이지만, 결코 하찮은 것은 아니다. ‘주관적’은 또한 우리의 선택에 열려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마도 내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신뢰에 대한 한 친구의 배신이 객관적으로, 물리적으로 전혀 나에게 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나, 나는 틀림없이 기분이 나쁠 것이고, 부정적 감정들을 경험할 것이고, 주관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이 친구를 신뢰하는 나의 능력이, 그리고 아마 타인들을 신뢰하기 까지도, 손상될 것이다. 내가 경험하는 그 상처가, 비록 순전히 주관적이라 할지라도, 실제적이고, 그리고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은, 내가 이해하는 바, 또한 상대적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대리인(agent)이 누구이건, 혹은 도덕적 대리인이 활동하는 상황에 무관하지 않다. 사람을 죽이거나 정부에 대항하기 같은 행위가 상황에 따라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자기방어(self-defence)에서 죽이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같은 행위를 수행하더라도, 다른 상황에서 죽이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을 수 있다, 즉 살인죄이다.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정황에 호소하는 것은 그 행위의 도덕성이 상황에 대해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특정 상황에 상대적으로, 한 행위가 확실히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상대성은 그것의 옳음 혹은 그름의 현실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도덕은 또한, 내가 이해하는 바, 흑백의 문제가 아니다. 흑과 백은 도덕 영역에서 참으로 존재하나, 그들은 회색들의 등급을 사이에 갖는 스펙트럼 상에 있다. 한 행위가 정말로 명백히 옳거나 그를 수 있지만, 또한 연관된 다른 상황들에서는 다른 방향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자기방어를 구성하는가? 나 혹은 누군가가 살해될 급박한 위험에 처해져야 하는가? 아니면, 예로, 한 구타 당하는 아내가, 만일 그녀가 남편을 먼저 죽이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나중에 그가 그녀를 죽일 것이라는 정당한 두려움으로 선제 살인을 할 수 있는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위협으로 간주해 정당하게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는가? 공격자가 나를 죽일 수도 있음이 단지 가능하나, 내가 확신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공격자를 죽이는 것에 있어서 정당화되기 이전에 살인하는 것만이 내 목숨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얼마 만큼 확신해야만 하는가? 만일 내 목숨이 위태롭지 않고 단지 강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면 나는 자기방어로 살인할 수 있는가? 내가 단지 두드려 맞을 위험에 처한다면 어떠한가? 예를 들어 내가 총을 겨누고 멈추라고 말할 때 한 도둑이 내차로 도망치려 함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살인할 수 있는가? 흑 혹은 백 경우들의 현실이,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이 명백한 경우지만, 행위의 옳고 그름이 참으로, 적법하게 불분명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경우들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번역자역: 부정어를 몇 번씩이나 쓰는지 모르겠군요!^^ 간단히 말하면 될 것을…번역하기 힘들게…양놈들!) 어두운 회색이 검정색고 밝은 회색이 흰색인 체하는 것은 그 경우들에서 서툴고 부정확한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며, 중간 회색의 경우 당신의 결정들을 완전히 부적절 할 뿐만 아니라 임의적으로 만든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도덕은 주관적 객관적 요소들을 둘 다 가지며, 상대적이고, 종종 불분명하지만, 그것은 실제하고 임의적이 아니며, 더 좋거나 더 나쁜 선택을 하기 위한 기준들이 있고, 가장 중요하게, 전혀 하나님에 종속적이지 않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타당한 경우가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생각 실험과 함께 출발해보자:

그름에 대한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강간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에 의지하는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 점에 대해 나와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적어도 일반적으로 강간의 정의로서 타인을 의지에 거슬러 강제로 성 관계 갖게 함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하나님에 근거하는 도덕주의자는, 인간에 근거 혹은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던 하나님에 근거 혹은 의지하는 절대 불변하는 도덕 표준 때문에 강간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그렇지만, 그릇됨이 이로운지 해로운지, 즉 인간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독립적(무관)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강간이 그르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강간은 강간자(rapist, 번역자주: 인간이기에 최소한의 인격을 고려해 강간범 표현은 배제)에게 사소하고 짧은 힘의 느낌이나 성 경험을 주는 것 외에 누구에게 어떠한 혜택도 제공하지 못하는 반면, 강간자를 포함하여 모두에게 모든 종류의 현실적, 실제적 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희생자는 많은 피해로, 가능성 있는 육체적(객관적) 피해와 명백히 심한 정신적(주관적) 피해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주관적 피해는 주관적이기 위해 마찬가지로 실제이다. 이제 강간자가 돌아다닌다는 것을 아는 다른 여성들은, 그들에게도 강간이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통 받는다. 남자들도 또한 고통 받는다: 피해자의 남편, 아버지, 아들들, 형제들, 등등, 모두가 그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그렇게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에 상처 받고 분노한다. 다른 남자들도 그들의 아내들이나 딸들, 등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강간자 조차도 아마 또 다른 강간자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가족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도 심한 충격을 행함으로써,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되거나 그러하다고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강간자는 적어도 자해한 것이다. 그는 따라서 자신의 복지를 위해 의지해야 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그런데 우리가 매우 다른 종류의 동물이라고 가정해 보라. 자녀를 갖기 원한다면 여성들이 강간을 당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라, 즉 어떤 생리적 이유 때문에 여성들이 자의로 섹스를 하면 임신 될 수 없다고 가정해 보라. 더 나아가 그 여성들이 처음에는 섹스하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적으로 시작된 후 그들이 그것을 즐기고 그들이 억지로 시작하게 됨을 기뻐한다고 가정해 보라. 이점에서 그건 마치 나를 위한 연습 같다: 처음에는 시작하기 싫었으나, 일단 하게 되면 즐기고 행함을 기뻐한다. 여자가 일단 강제로 섹스를 시작하게 되면 그것이 곧 즐길만한 것이 될 것임을 인식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희생자가 될지 말지를 걱정하는 두려움이나 다른 심리적 피해로 고통 받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라. 누가 섹스를 개시했는지가 문제되지 않고, 그들이 여전히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라 여기고,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섹스 했는지가 아무에게도 상관 없다고 가정해 보라 그리고 오직 한 여인의 남편만이 그녀를 임신시킬 수 있고 오직 둘 다 그녀가 임신 되기를 원할 때만 이라고. 그리고 성 관계로 전염되는 병들 같은 것이 없다고. 운동처럼 강압적 섹스가 사람의 육체적 복지를 극도로 증가시키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가정을 더해보라. 그리고 어떤 다른 생리학적 이유 때문에 남성들이 섹스를 하기 위해 여자를 강제함으로써 시작하지 않으면 성적으로 타당하게 수행할 수 없다, 즉 의지가 있는(자발적으로 달려드는) 파트너에게는 남성들이 반응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라. 바꾸어 말해, 강간이 실제로 이로운 효과들의 긴 목록을 갖고 나쁜 점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는, 우리가 매우 다른 종류의 동물이라고 가정해 보라.

위 모든 것들이 맞다면, 강간은, 즉 누군가를 강압적으로 그 의지에 반하여 섹스 하는 것이, 좋은 것이 되지 않겠나? 일종의 흡연자를 강압적으로 금연하게 만드는 것 같이? 만일 우리가 이런 형태의 동물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창조했거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진화했던지 간에 (도덕의 이 관점은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독립적이고, 많은 신학자들이 도덕은 하나님에 독립적이다, 즉 도덕의 신성한 계명 이론이 틀렸다 라는 이러한 혹은 비슷한 근거들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혜택이 해보다 훨씬 크므로 강간이 선하고, 아마 의무적인 것이라고 까지 선언해야만 하는가?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도덕이 인간에게 선하거나 악하거나, 이롭거나 해롭거나 하는 것에, 인간이 번영하는데 촉진시키는가 아니면 방해하는 바에 종속되고, 그리고 우리가 도덕의 행위를 축적된 선한 혹은 악한 효과들에 근거해서 결정함을 뜻한다. 아니면, 하나님은 인간들에 그리고 우리가 어떤 종류의 피조물인가에 무관한 불변하는 절대 원리에 따라 강간이 악하기 때문에 강간이 여전히 악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경우에 우리와 독립적이고 우리와 필수적 관계가 전혀 없는 어떤 절대 표준, 우리의 관념에서, 전적으로 임의적인 표준에 단지 우연히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나쁜 일들을 해야만 하게 된다.

맞다, “선’ 과 “악”은 실재한다. 그리고 맞다, 도덕은 실재한다. 그리고 도덕에 적어도 몇 개의 객관적 요소들이 있고, 도덕적 결정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객관적인 한 근거가 있다. 행동의 실질적 표준들이 있고, 이 표준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어도 어느 정도의 합의가 있으며, 우리는 이 사실들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덕이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그리고 하나님에 종속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한 종류의 존재이지 또 다른 것이 아닌 사실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선하고, 우리에게 혜택을 주고 그리고 우리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우리에게 해를 주는 다른 것들이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나무와 같다. 특정한 양의 햇빛과 비가 나무를 이롭게 한다: 그들은 건강한 나무들로 번성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수분이 너무 적거나, 기온이 너무 차거나 더우면 해가 되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또한 우리처럼, 나무들이 번성할 수 있는 햇빛, 비, 그리고 따뜻함의 다소 넓은 범위의 양이 있고, 이롭고 해로운 조건들 사이에 매우 넓고 애매한 경계가 있다. 더욱이, 우리처럼, 그 범위나 경계들은 다른 나무들에 대해 그리고 다른 환경에서 상이하다. 이것은 좋고 나쁜 결과들이 다 실존적이고 (나무들과 우리들은 정말로 어떤 것들에 의해 혜택을 입고 다른 것들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 상대적 (어떤 것이 혜택과 피해를 주느냐는 개인들과 그들이 처한 궁극적 상황에 달려있다)이다.

나무들과 우리 사이의 중대한 차이는 우리는 사고할 수 있고,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자각하여 알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또한 행동할 수 있고, 우리는 움직여 여러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행동할 대, 우리의 행위들은 결과들을 갖는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행위들의 결과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자각하여 인식한다. 번개의 전압이 산불에 대한 책임이, 즉 원인으로,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나는 여기서 ‘책임 있는(responsible)’이란 말을 도덕적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로서 사용한다. 사고와 행위를 합성하라, 그러면 우리는 다른 행위들을 한다고 상상할 수 있고 적어도 그러한 행위들의 있을 법한 결과들을 대강 근사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것보다 어떤 것을 선택하게 해주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 행위들의 결과들에 대한 책임감의 이러한 인식에 추가하여, 우리가 행하기 위해 어떻게 선택하느냐의 결과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인식한다. 우리는 결과들을 단지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결과들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도덕적 책임감이 오는 출처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우리 행위들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지도록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런데 도덕 그 자체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단자 자연스럽게 오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인정하겠다. 나는 ‘이다(is)’에서 ‘해야만 한다(ought)’를 도출하려고 애쓰는, 즉, 어떤 것이 어느 한 방법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이 그러해야만 하다고 말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보다는 차라리, 도덕은(부분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온다. 다시 말해, 나는 한 특정 상황에서 다른 행동들을 취하는 상상을 할 수 있고,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그 행동들의 가능한 결과들을 계산할 수 있다. 어떤 행위들은 내자신, 다른 개인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우리의 복지를 위해 의지하는 사회에 이로운 결과들을 낳을 것이다, 즉 특정한 행위들은 인류 번영을 촉진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어떤 다른 행위들은 아마도 해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들 중 어느 것을 시도할 지는, 즉 어떻게 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혜택 혹은 해: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바른 행위들이란 이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며, 그른 행위들은 나쁜 결과들을 초래한다.

혹은 차라리, “옳은” 혹은 “그른” 행위들 보다 “더 좋은” 혹은 “더 나쁜” 행위들 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지적했듯이, 다양한 정도로 인류 번영을 촉진할 수 있는 광역의 결과들이 있고, 그 범위는 개인들과 관련된 상황들에 따라 수반된다. 어떤 상황들에서 어떤 사람들을  참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야기할 수 있고, 혹은 다른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람들에게 조차 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참 도덕적 판단들을 위한 참 표준들, 그러나 그것들은 상황들에 상대적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중심의 도덕을 받치는 중요한 기둥 하나를 약화시킨다.

더욱이, 인간들에게는, 좋은 혹은 나쁜 결과들이 또한 주관적일 수 있다. 나는 타인들의 행위들에 의해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피해를 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주관적임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도덕이 주관적이어서 그것은 임의적이고, 근거 없고 혹은 하찮다라고 말하는 것은 주관성의, 인간의 정신적 혹은 감정적 혹은 “영적”인 측면의 실재함과 중요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율배반 적으로, 앞서 지적했듯이, 비록 유신론자들이 종종 “물질주의자”들이 이것을 엄밀하게 부인한다고 잘못 알고 있지만, 만일 그들이(유신론자) 주관적 도덕, 정신의 도덕 정신에 종속된 도덕이 하찮다고 말한다면 그들도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관성은 실제이고, 그리고 결코 하찮지 않다. 따라서, 도덕의 현실로부터 도덕이 객관적이다라는 것을 따를 필요는 없다. 도덕은 주관적일 수 있고 (혹은 적어도 주관적 요소들을 가질 수 있고) 여전히 실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중심 도덕을 받치는 중요한 또 하나의 기둥을 약화시킨다.

또 다른 문제는 “선”이 전적으로 균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선한 것들이 항상 서로 양립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 좋은 것이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해로울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해를 피하기 위해 일부의 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혹은 일부의 선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는가? 정의를 유지하고, 받을 만큼 상벌을 할당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비로운,, 개선할 의욕과 교훈을 학습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받을 만하지 않은 집행유예를 부여하는 것도 또한 좋다. 만일 어떤 사실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해를 야기한다면, 어떤 이에게 반대 사실을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도덕적 양도논법(dilemma)은 선 대 악에 관함이 아니다. 그것(선 대 악)은 도덕적 양도논법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의, 당신이 알기로 옳다고 선택하는 것의 양도논법 이다. 도덕적 양도논법이란 두 개의 경쟁하는 선들 사이에서 당신이 선택을 해야 할 때, 혹은 두 개의 피할 수 없는 악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혹은 결과들의 어떤 모음이 선인지 혹은 악인지 불분명할 때, 혹은 특정 결과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함이 명백할 때 이다. 그러므로 선함은 또한 통일되어있지 않다. 혹은 “선”이 항상 명백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의 행위에 대한 모든 가능한 결과들, 혹은 그 결과들이 일어날 정밀한 확률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할 수 있을 때 조차도 그 결과들이 얼마나 좋은지 혹은 나쁜지, 이로운지 혹은 해로운지를 판단하는 것은 대개 어렵다. 어떤 경우 명백한 옳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무엇이 명백히 옳은지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다. 다른 경우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명백한 옳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중심 도덕을 받치는 또 다른 중요한 기둥을 약화시킨다.

도덕의 ‘필연성(oughtness)’ 즉, 도덕의 본질로, 혹은 적어도 도덕의 본질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씨. 에스. 루이스는 (Mere Christianity에서) 이 ‘필연성’에 대해서 말하길, 그것은 어떤 것인데 “내가 잘못할 때 내게 옳게 하도록 촉구하고 나를 책임감 있고 불편하게 만들고. 내 생각에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것이기 보다 정신과 같은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 좋다, 따라서 그것은, 그가 인정하는 것처럼, 정신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의 ‘필연성’은, 도덕의 본질에 있어서, 주관적이다. 루이스가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그 정신이 비록 하나님의 정신이라 할지라도. 정의상 정신은 주관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정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필요한가? 왜 우리 자신의 정신들로부터 올 수는 없는가? 결국, “도덕적”인 것이 인류 번영을 증진하는 것이라면, 도덕적임은 인간으로서 구실을 잘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어떻게 구실을 잘하는가의 묘사이다. 행동하고 사고하고 행동에 대해 사고하는 우리의 진화된 능력이 주어진 상태에서, 우리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이 모든 것, 우리의 복지, 타 개인들과 우리 자신의 복지를 위해 우리가 의지하는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경향을 갖는 종류의 일들을 우리가 하기 원한다는 것에 신경 쓰는 능력을 진화 시켰다는 점은 완벽하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필연성은 관심(caring; 혹은 신경 씀, 돌봄 등으로 해석-번역자역)에서 온다. 이롭고 해로운 결과들에 관한, 인류 번영을 증진시키거나 막는 행위들에 관한, 더 좋거나 더 나쁘게 되는 선택들에 관한 위의 모든 것들이, 모두 사실일 수 있으나, 당신이 상관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당신이 관심을 가지면, 당신에게 관계가 된다. 그리고 관심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깊이 연관된다. 당신이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이롭게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당신은 강력히 느낀다.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은 어떤 일들은 해야 하고 다른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왜 내가 먼저 신경 써야 하냐고? 누군가 물어볼지 모른다. 글쎄, 만일 ‘슈드(should: ~해야만)’가 ‘오트(ought: 의무적으로 ~해야만 -should 보다 강한 표현-번역자역)’의 한 형태이고 ‘오트’가 관심에 종속적이라면, 그러면 관심 없이는, ‘오트’ 나 ‘슈드’는 없다. 당신은 훨씬 더,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좋은, 더 건강한, 더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관심을 안 갖으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신경 안 쓴다면, 당신을 강압하여 신경 쓰도록 하는 것은 정말로 없다; 어떤 ‘슈드’가 있다 비록 있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슈드’는 관심 가짐을 미리 전제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도덕의 무신론적, 자연주의적 해석을 위한 문제가 아니다. 관심 없이는, 하나님 조차도, 지옥의 위협 조차도 당신에게 효과적인 ‘슈드’를 제공할 수 없다. 내가 천국에 가던지 지옥에 가던지 상관 안 하면, 그 궁극적 보상들이나 벌들 조차도 내게 도덕적이기 위한 이유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관심 갖기 시작하는가? 관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자연적 포용 능력, 가동시키기 그다지 어렵지 않은 자연적 잠재성이다. 적어도 그것을 가동시키기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능력을 계속해서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삶의 번영에 더 많이 이바지하는 더 생산적인 목표들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도록 계발하는 것은 또 하나의 더 어려운 문제, 도덕적 훈련의 문제이다. 그러나 초기 효과는 활성화 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어 보인다.  또다시,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우리 자신들의 복지와 타인들이 복지에 관심을 갖는 자연적 표용 능력은 지적인 사회적 동물들이 그 복지를 달성하기 위한 근본적 필요이다. 우리는 관심을 갖는다, 그러기에, 어떠한 행동들이 어떠한 결과들에 도달하는 것이 관한 우리의 믿음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어떤 일들은 해야만 하고 다른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다.

이 모든 것이, 내 생각엔, 하나님에 근거한 도덕관이 하는 것보다 이 필연성이 우리를 행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차이를 더 잘 설명하고 해설한다. 그것은 또한 선의 측량할 수 없음,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무엇이 진짜로 좋은지를 정하는데 우리가 종종 갖는 어려움과 불일치들을 훨씬 더 잘 설명한다. 부가하여, 그것은 어떤 도덕적 선택들이나 표준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어떤 것들은 참으로 다른 것들보다 더 많은 실질적 이득과 더 적은 실질적 피해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 이득으로 혹은 피해로 이를지를 계산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우선적으로 어떤 결과들이 실제 이로울 것인지 혹은 해로울 것인지 정말로 실수할 수 있다. 나치가 그들의 도덕적 계산에서 몇 가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실제 근거들을 나는 정말로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떠한 신들에게도 호소함이 없이.

그러나 왜, 그렇다면, 우리는 부도덕할 것인가? 도덕이 우리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을 한다면, 왜 우리가 그에 역행해서 가겠는가? 그것에 답하기 위해, 나는 기독교 교리인 원죄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시작하겠다. 그것은 우리에 관한 실질적인 어떤 것을 정말로 지시한다, 비록 그 무언가의 설명이, 내가 믿기로, 표적을 벗어나 있지만. 우리는 무지하게 태어난다. 우리는 원인들과 영향들에 무지하고, 그리고 타인들의 주관성을 인식치 못하면서 세상으로 들어간다. 타인에 관심을 갖거나 그럴 생각조차 안 하면서, 우리는 세상을 좁고, 근시안적이고, 자기 중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도달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 어떤 결과로 이르는지는, 그리고 어느 결과들이 이로운지 혹은 해로운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지가 타인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복지에 종속적임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나아가, 혜택과 해가 어느 정도는 개인들과 상황들에 상대적이므로, 무엇이 더 나은 혹은 더 못한 선택들을 구성하는가는 변하는 환경에서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 이롭던 것들을 행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려는 의도가 해로운 결과를 낳을 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우리의 행실을 맞추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타인들과 그들의 복지를 돌보는 것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남들 보살피기를 학습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 능력은 반드시 활성화되어야 한다. 세상을 넓은 관점에서 보고, 장기적 안목을 갖고, 타인들의 복지를 고려하고 그리고 타인들의 복지를 고려할 만큼 충분히 관심을 갖는 우리의 잠재력을 실현하기까지, 바로 그 정도까지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포용력을 가동한다. 이 개발이 좌절되거나 왜곡되는 바에는, 우리는 부도덕하다. 이는 대부분, 어려서 받는 훈련, 그리고 나서 우리가 인생을 통해 삶을 헤쳐나가면서 수반되는 행동들의 실제 결과에 달려있다.

또한 우리가 되기 원하는 사람의 형태에 달려있기도 하다. 당신이 당신 행위들의 가능한 결과들에 대한 이성적으로 훌륭한 추정을 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 결과들의 일부가 당신 자신의 성격과 당신 성격이 개발되고 성장하는 형태에 미치는 영향을 포함하므로, 당신은 넓게는, 되기 원하는 사람의 형태를 선택하고, 그런 후 그 형태의 사람이 되는 방법들로 행동하는 상황에 당신 자신을 놓을 수 있게 된다. 운동 선수는 단순히 일반적으로 여러 운동을 위해서, 혹은 한 특정한 운동을 위해서 훈련할 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서 특화 된 능력을 위해서도 훈련한다. 운동 선수들은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그들이 경기를 위해 필요하게 될 일반적 그리고 세부적 기능을 훈련해야 하는 상황에 자신을 놓는다. 충분한 연습과 함께, 그 기능들이 습관이 되고, 그것들을 수행함은 제 2의 천성이 된다.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특정 방식들로 행동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당신은 일반적이고 매우 세부적인 방법들로 자신을 도덕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다(혹은 유사하게, 당신이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배제시킴으로써).  연습을 하면, 그러한 방식들로 행동함이 습관이 된다. 달리 말하면, 당신의 도덕적 성격의 많은 부분이 당신이 어렸을 때 남들이 당신을 훈련시키고 대해준 방법에 달려있지만, 당신의 도덕적 성격은 또한 당신이 자신을 훈련하는 방법에도 달려있다. 따라서 당신은 수동적 수혜자 혹은 당신을 오늘날의 당신으로 만든 환경의 희생양이 아니다; 당신은 또한 그 환경들의 능동적 창조자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들에 대해 책임이 없는 영역까지 조차도, 능동적 행위자로서, 당신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만든 바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당신은 당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책임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면 당신은 “원죄”의 당신의 조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인간적 조건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하나의 도덕적 조건이다.

그리고 이 도덕성은 객관적 혹은 주관적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덜 절대적이고 범 우주적이거나 훨씬 덜 단지 근거 없는 선호와 임의의 선택이다. 강간 피해자가 육체적으로 상처입지 않으면, 유일한 피해는 정신적인, 즉,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피해가 육체적인, 즉, 객관적인 피해보다 덜 실제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관적이라는 사실이 임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희생자는 그 경험에 의해서 충격(영속적인 정신적) 받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가혹하게 한 범죄자를 벌하는 것이 그를 개선시키는데 관용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가혹함이, 냉담에 혹은 압박에 의해서, 자비가 베풀어질 경우 훨씬 더 쉽게 개선할 수도 있었던 다른 범죄자를 망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똑같은 기준이 다른 경우들에서 똑같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떤 한 기준이 그 경우들의 일부에서 대안들보다 정말로 더 잘 작용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가치란 실제적이기 위해 객관적일 필요는 없다; 주관적 가치들도 또한 실제이다. 가치란 실제적이기 위해 절대적일 필요가 없다; 상대적인 가치들도 또한 실제이다.

도덕이 객관적이기도 하고 주관적이기도 하다고, 그 안에 객관적 그리고 주관적 요소들을 둘 다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모순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해보면, 이는 맞다고 기대되어야 한다. 우리는, 결국, 객체(objects)와 주체(subjects) 둘 다이다: 우리는 정신(주체)을 담고 있는 몸(객체)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떤 가치들이 주관적인 반면에 또 어떤 것들은 객관적이다. 자양분을 주는 음식은 나에게 객관적으로 소중하다. 우정은 주관적으로 내게 소중하다, 그리고 그것의 주관성은 어떻게도 덜 실제적이거나 덜 소중하게 만들지 않는다. 정직은 많은 면에서 소중한데, 서로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음은 우리 사회 환경에서 우리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몇몇 상황에서는, 부정직이 사람에게 단기 우세를 부여할 지 모르나, 부정직함에 대한 명성은 결국 사람을 해한다; 도덕적 성숙은 단기적 좁은 혜택에 대해 장기적으로 일반적인 혜택을 구별하고 추구하는 능력이다). 내가 그런 것들을 가치 있게 봄은 그것들이 소중하다는 의식적 인식이며, 따라서 주관적이다. 나의 가치가 틀릴 수도, 잘못 인식될 수 있다: 내게 사실 가치가 있지 않은 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혹은 다른 것이 정말로 내게 가치가 있는데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주관적 가치들에 관한 실제 판단들을 위한 실제 기준들. 따라서, 다시 말하지만, 도덕의 현실로부터, 도덕은 객관적이지도, 만능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도덕은 입법자로부터 권위를 이끌어내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사실, 상황은 엄밀히 그 반대다: 도덕적 법, 규범 그리고 교훈은 우리가 자신들을 발견하는 실제적이고 불가피한 도덕적 조건들로부터 권위를 이끌어낸다. 행위들과 결과들은 더 좋거나 더 나쁘기도 하고, 우리의 번영에 다소 이롭기도 혹은 해롭기도 하다. 우리의 도덕적 감지는 그것에 관한 이 실제와 진지한 관심의 단순한 인식이다. 이 인식, 이 도덕적 지각은, 우리 정신의 산물로서, 주관적이다. 우리가 대면하는 도덕적 규범들과 교훈들은 이로운 결과들을 얻고 해로운 것들을 피하려는 우리의 시도이고, 그것들은 훌륭한 인간적 삶을 사는 방법들, 인간으로서 번영하는 방법들에 관한 우리의 가정들이다. 이 도덕적 규범들과 교훈들은, 우리 정신의 산물로서 다시, 주관적이다. 그러나 이 주관적 지각은 우리의 실제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고, 우리의 주관적으로 결정된 규범들과 교훈들은 실행을 통해 얻어진 실제 결과들에 근거한 실질적 판단이다. 우리의 도덕적 규범들은 한 신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법의 절대적 기준에 의해 심판 받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것들은(그 어떤 억지 절대자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억지 기준들을 포함하여) 현실, 우리(그 어떤 억지 절대자를 포함하여)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실제 세계에 의해 판단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해 가능한 한 반대는, 이것이 전부 좋고 선할지 모르나, 어쩌면 하나님 없이는 도덕을 가질 수 있는지 묻는 것이나, 그래서 어쩌자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즉, 하나님) 없이, 어찌 그 누가 신뢰 받을 수 있나? 상벌로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러면 왜 밖에 나가서 강간하고 세상을 약탈하지 않는가? 당신이 벗어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왜 거짓말하고, 속이고, 훔치고 그리고 죽이지 않는가?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누굴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어느 누구를 신뢰할 수 있을 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당신 자신의 성격을 밝히는 것인가?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정말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바인가? 당신이 선한 유일한 이유가 악함의 결과로 이어지는 응징을 두려워하기 때문인가? 도덕에 대한 당신 자신의 포용력이 그리도 미성숙하거나 삐뚤어져 당신은 누군가가 선행을 하는 것이 단지 그것이 선이기 때문임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가? 당신은 돌봄을 상상할 수 조차 없는가? 만일 이것이 당신이 느끼는 방식이라면, 당신은 우리가 경찰과 교도소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고, 나머지 우리는 당신과 당신 같은 다른 사람들이 성숙하거나 당신들의 삐뚤어진 도덕적 포용력이 개선되도록 도울 더 좋은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더 심각한 반대는 묻는 것이다:그래서 뭐? 그러므로 도덕은 하나님 없이 그리고 절대적이고 영원함 없이 실제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하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죽고 그게 그거면, 무슨 차이를 보이는가? 지옥이 없는지에 상관 없이, 천국이 없으면 어찌 되나? 우리가 내일 죽고 그 어느 것도 상관이 없다면, 왜 그냥 먹고, 마시고 그리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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