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모 U포터의 블로그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관람한 나는
고개가 숙연해 졌다.
필자 역시 백범을 사모하는 사람중의 하나다.그런 그분이 생애 마지막
과제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시다 흉탄에 명중해
비명횡사 하시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김완섭,지만원 빼고)
...이 두 사람은 김구를 테러리스트에 비유했기때문이다.
김정일도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른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조국과 민족에대한 걱정을 했다는 김구의 암살에
대한 배후를 밝히기에 형법상으로 공소시효가 지났을지도 모른다.
1948년 4월18일 38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김일성을 만났으나 김구 선생께 붙여진 건 빨갱이였다.
항간에는 그 배후가 이승만대통령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믿고싶진 않다.
설마 일국의 초대대통령인 이대통령이 감히 백범을 암살하면 자손
대대로 호강하게 만들어 주겠다라며 지령을 내렸을까 하는 생각은
추측일 뿐이다.
같은 기독교인이고 형님 아우하는 사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의
공로자들인 이들이 해방후 정치적 견해차이로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아무리 정치판이 냉혹하다지만 말이다.
백범의 아들은 그 후(김구 사후) 연좌제에 묶여 이승만 정권시절
취직도 못하고 생활비를 몰수당하는등 비참한 생활을 해오다 5.16
이후 명예회복 되었다.
그에게(김신)는 아마도 박정희 17년보다 이승만 12년이 더 길고 답답
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오히려 박정희 정권때는 교통부 장관에
까지 오르는등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더 가소로운 행태는 6.25때였다.
북괴군들의 서울점령이 초일기에 들어갔는데 이승만 도당들은 방송국
으로 쳐들어가 직원을 협박하며 우리 국군이 공산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방송을 내 보내라고 말하자 현명한 직원은
아직 전황이 확실하지 않으니 국민을 일단 대피시키는게 좋을것 이라고
말하자 정부요원은 직원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야이 세끼야 시키는
데로 하지않으면 대갈통을 날려버리겠어라며 흥분하자 직원은 하는 수
없이 거짓방송을 내보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방송사 직원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하고
직원의 음성을 녹음한 뒤 정부요원들은 리무진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내각을 구성할때 대부분 기독교인들을
요직에 두루 기용했다.(물론 친일파도 많았다)
참모진을 비롯해 일반 요원들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상당수였다.
방송사에서 행패부리던 정부요원은 그 후에 그 직원이 양심선언을 할
까봐 그의 입을 막기위해 죄없는 직원을 살해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경무대를 떠나 영등포로 다시 안양으로 수원으로 송탄
으로 평택으로 천안으로 조치원으로 대전으로 옥천으로 영동으로
김천으로 구미로 대구로 경주로 밀양으로 피난을 거듭하고 최종 부산에
정착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경북지방까지 공산군 치하로 넘어가자 UN에서는 일본
군의 개입을 검토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만약 일본군이 참전하면 일본군
부터 격퇴할 것이라며 노발대발 했다.
그래놓고 그 시기에 부산도 안심할 수 없게되면서 비밀리에 일본에 정부
요인을 급파해 일본 군 당국으로부터 전용 군함을 대절해 줄 것을 요청
하였다.그 댓가로 일본 재건에 쓰라며 거액을 수수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천인공로할 만행이냔 말이다.한마디로 이승만 도당
들은 자신들의 영달과 목숨부지를 위해서는 적군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들
이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들이 후퇴를 거듭하는등 승산이 보이는 듯 했지만
짱꼴라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또 다시 역전되고 이렇듯 밀고 밀리는 승패
를 가늠할 수 없는 전투가 계속되자 UN에서는 휴전을 제의하고 소련도
이를 승낙하면서 3년간의 전쟁은 일단락 되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끝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더 많은 인명피해가
나오던 말던 전쟁을 계속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따라서 미국도 이승만의
신뢰를 멀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는 북진통일을 주장해야만 무사할 수 있었고 평화통일(적화통일,
민주통일 가리지 않고)을 주장하면 가차없이 처형되었다.그 가족들 까지도
이승만이야말로 공산주의식 통치를 했다.
이승만은 김구를 비롯한 자신의 정적들은 그들의 사유재산까지 몰수하여
자신들의 호화생활에 탕진하는등 당시 김일성이 알았다면 한수 가르쳐
주시오라고 넙죽 절을 했을 행위를 했다.
그 뿐 아니라 예우를 해주어도 모자라는 판에 허울뿐인 황실의 재산을
몰수하여 정권유지에 충당을 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있던 의친왕에 크게 도움을 받은 바 있던
이승만은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다.
결국 의친왕은 국가의 재산환수조치에 울분을 참지못하고 홧병으로 승하했다.
국민들이 초근목피로도 연명하기조차 어렵던 시절인 50년대 이승만은 자신의
80세 생일을 맞아 서울운동장에서 여자들 모아놓고 몇만원하는 스테이크에
고급 양주 처먹으며 광란의 파티를 벌였다.
당시 기아상태는 일반국민들은 말할것도 없고 군인들까지도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민간인은 굶주려도 군인들은 배불리 먹이는 북한을 보면 이승만은 김일성보다
더 가소롭다고 볼 수 있다.
모 기독교사이트의 칼럼을 보면 경제발전을 우룩한 나라들은 기독교의 영향
으로 발전했다는데 그것은 잘못 판단하 것이라고 말한다.
마침 발전한 나라들중에는 기독교국가들이 많고 이는 정부와 국민들이 노력
해서 이룬 성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40~50년대부터 경제발전을 했어야 하거늘 되려 북한
보다도 무려 20년씩이나 차이나는 이적행위를 한 이승만 정권이었다.
친일파였다가 이승만이 밑으로들 다 기어 들어갔습니다.
이런 파렴치한 놈이 초대 대통령이었다는것도 부끄럽고, 우리나라를 아예 말아먹을려고 한 그 모습까지 떠오르게 되는데...
그 개같은 인간들의 자식들까지 몰살시키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이랑 다를게 없네요emoticon_018emoticon_018emoticon_121emoticon_121emoticon_121
글자를 키우게되면 행간도 아울러 넓혀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