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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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3 17:35
나는 왜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가(2003)
현세 안팎으로의 영적 여행에 대한 회상
켄달 홉스(Kendall Hobbs)
나는 나의 믿음이나 그에 대한 이유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지 않는 기독 복음주의자(미국에 사는 복음주의자들은 거의 항상 기독교도이다)를 우연히 만나는 것이 드문 경우임을 알았다. 대개, 그들은 내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거나 그들 방식대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만 하면 나도 확실히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접근한다. 혹은 내가 과거 기독교인이었다 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내가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라든가 내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배우지 못했다 라든가 아니면 하나님께 화가 날만한 어떤 종류의 비극이 있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결론 내린다. 혹은 아마 내가 단지 사악한 사람이고 마귀에게 봉사하기 위해 선택되었다고. 혹은, 인간이란 무신론자가 될 수 없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존재함을 실제로 안 믿는다 라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과 그 모든 섭리를 억지로 거부함에 틀림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그들이 나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희망은 본 글이 기독교들이나 일반적 유신론자들에게 적어도 한 유신론자가 어떻게 전유신론자로 남게 되었는지(이제는 무신론자라는 뜻)에 대한 좀 더 나은 이해를 주는 것이다.
이 글은 또한 특히 현재 전환해제과정(기독교를 믿었다가 안 믿는 것)을 겪고 있는 이에게 이미 그 과정을 거친 이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다. 그 과정을 직접 겪고 나니, 나는 그것이 감정적,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아나, 적어도 나에게는 내가 그 과정을 거친 여행에 대한 보답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인생
혹자는 이를, 내가 몸 담았던 복음주의 기독교와 친숙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설명이 필요한 용어인, “엑스티모니”라고 할 수도 있다. 복음주의 교도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에게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당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당신의 인생 안으로 초대하는 “거듭난” 경험이 핵심이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경험이 없고 예수를 당신의 마음에 그렇게 초대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하였다, 즉 당신은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다. “복음적”이란 딱지가 의미하듯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전파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다(예수의 제자들에게 전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치는 마태복음 끝 부분의 “위대한 사명”에서 처럼). 복음화라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는 것” 즉 복음, 하나님 이야기(그들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대로의), 예수, 천국과 지옥, 구원 등등을 말해주는 것을 포함한다. 한 사람의 고백, 즉 자신의 거듭난 경험과 이어지는 예수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서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가 증거의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때 내 고백을 하곤 했던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전기독교인(더 이상은 아님)이 된 이야기를 “나의 엑스티모니”라 부른다.
이와 같이 내가 “더 이상 기독교도가 아니다”라는 것은 더 이상 거듭났다거나, 성경을 믿는다거나, 복음주의라거나, 개신교도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카톨릭, 앙글리컨, 몰몬, 혹은 다른 형태의 기독교인—설사 머슬림, 힌두 혹은 그 무슨 종교인—이라면, 내가 단지 잘못된 종교에 관계했다 라든지 당신만의 “유일한 진정한 종교”는 나의 비판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너무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전에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일반적 비판의 일부가 어떻게 당신의 종교에 적용될 수 있는지, 즉 먼저 유신론적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또한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나의 개별적 비판이 당신의 종교적 견해, 즉 당신의 “성스러운 책, 경전”에 대한 해석 및 옹호에 관련된 문제들이나 그 문제들에 관한 당신의 해석에 얼마나 쉽게 변형되어 적용되는지에 관해 생각해 보라.
그리고 내가 어떻게 전기독교인이 되었나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한마디로 나는 그것과 함께 자랐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갔고 나는 배운 것을 믿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거듭남 체험은 8살 때 일어났다. 나는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복음을 내어놓았을 때 어머니와 했던 대화를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다. 그 이야기 타당하다고 느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다음 단계가 내게 설명되면서 나는 예수를 내 마음에 받아들였고 내 생명 다해 그에게 봉사하며 그의 인도를 따르기로 맹세했다. 지금까지도 그 때 내가 가졌던 특별한 느낌을, 모든 것이 앞뒤가 맞고 이치에 맞는 느낌, 내적 강함과 행복과 열정의 느낌, 속했다는, 거처를 가졌다는, 내가 누구이고 왜 나였는지에 대한 인식의 느낌 등을 기억한다. 그것은, 내게 설명 되었기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 안의 하나님을 느꼈다.
물론 나는 단지 여덟 살이었고, 나는 어머니께서 내게 말해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몸소 체험했다. 부모(혹은 그 어느 누구)가 말하는 데로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일반적으로 행하던 방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 기억으로는, 나는 항상 주장, 기대, 명령에 대해 이유들을 원하거나 찾아왔다. 나는 항상 사물의 행태 이면에 있는 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궁극적으로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 공부를 했었어야 했다.
또한, 비록 내가 겨우 여덟 살이었고 그 당시 내가 느낀 감정들이 청소년들이나 성인들이 경험하는 것에 비해 매우 미성숙한 것이었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그 나이의 나에게는 엄청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신의 존재를 느낄 때, 그것은 몇 살 때건 아주 커다란 느낌이다. 나는 나의 제한된 감성 능력이 허락하는 깊이와 한계까지 그것을 경험하였다. 실은 경험 그 자체가 나의 감성능력을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다듬어주었다. 거듭남 체험 이전에는 내 인생에 대한 중요한 주제, 내 삶과 경험을 포함하고 전제적으로 그것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일반적 이해가 없었다. 나는 단지 살아갔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생에 있어서 구체적인 어떤 것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나에게 삶의 전적인 이유와 전적인 이해 수단을 부여하였다.
어느 정도까지, 나는 나중에 그런 어린 나이에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해 일종의 후회를, 적어도 한가지 측면에서, 하였다. 10대로서 나는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발견한 성인들의 강력한 간증에 매우 감명 받았는데, 간증이란 하나님께 반항하는 죄와 이기적 삶의 불행과 수렁을 경험한 후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수렁에서 속죄 받아 그에게 봉사하면서 힘있고, 의미 있고 충만한 인생으로 인도된 하나님의 기쁨에 넘친 자녀들로 재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나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깊은 감동을 주는 간증을 하고 싶어하는 내 자신을 보니, “간증 질투”를 갖고 있었던 같다. 어쨌던 나는 나를 속죄하기 전에 내가 그런 인생의 수렁들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구해주셨음을 더욱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는 강력한 증거로 믿어지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었다. 부정적인 경험들을 겪어야 하지 않음도 그 하나이다. 내가 배웠던 바에 따르면, 기독교도로서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기독교도로서 그런 불행한 수렁들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그들에게도 또 다른 길이 있고, 삶이 더 좋아질 수 있으며, 또한 의미와 목적과 충만을 가질 수 있는 증거들이 된다.
나에게 확신을 준 많은 것들 가운데 또 하나가 13살 때 아버지의 전근의 결과로 일어났다. 중학교 시기는 한 곳을 떠나 이미 교우 관계와 배타적 파벌이 형성되어 있는 다른 곳에 정착하는데, 특히 이전 지역에서 학우들과 사이가 멀어졌다고 느끼는 내성적인 사람한테는, 좋은 때가 아니다. 첨언하면, 나는 커네티컷주의 다소 귀족적이고 배타적인 곳으로 이주한 조지아주 출신의 남부 소년이었다. 더욱이 다음해에 한 기독교 사립학교로 전학 가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기로 했던 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깨닫는 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만사가 내가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더 잘 풀려나갔다. 내가 평생 동안 알아온, 우리가 떠난 교회는 나에게는 충분히 훌륭했으나, 내 나이의 아이들이 많지 않았고 그들과 그다지 잘 맞지 않았으며, 자기들의 믿음에 대해 전혀 진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교회에는 내 나이의 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사실, 내 또래가 다른 어떤 나이보다도 제일 많았다. 내 나이 또래의 애들은 그 교회에서 성장한 일종의“이무기 속에 있는 돼지”였다. 또한, 나는 적어도 “적응함”에 대한 내 기준에 의하면, 그 무리와 잘 적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애들이 믿음에 대해 진지했다. 그 때가 확실히 내게는 영적 성장의 시기였다. 그들과 함께, 내 믿음과 기독교인으로서 성장하는 것에 관해 더 배우기를 계속하고 내 삶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구하며, 기독교 믿음과 사춘기의 고락을 해쳐나갔다. 이따금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감을 느꼈으나, 그는 항상 나를 자신에게로 다시 데려왔다. 되돌아보면, 높은 학력 수준을 갖는 공립학교에 다닌다는 것과 자신의 믿음에 대해 진지하고 서로가 “세상”의 위험과 유혹들을 항해해 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독교 친구들로 구성된 좋은 그룹과 함께 거기에 다닌다는 것은 나를 이보다 더 나은 안식처 환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않게 하며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과 내게 무었을 하고 있으며 나를 인도함에 있어 그가 의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음이 명백하게 보였다.
그 후 대학을 선택하야 할 시기기 왔다. 나를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인도하도록 그에게 의탁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기회였다. 나는 하나님께 내가 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친구들과 스승들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오래 그리고 열성적으로 기도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이 믿음에 굳건한 진지한 기독교 학생 모임이 적어도 하나 있는 세속 대학(기독교 대학이 아닌)으로 가라고 인도한다고 판단했다. 나는 또한 공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고등학교의 모든 과목들에서 잘 했고 적어도 어느 정도 과목 대부분을 즐겼으나,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 과목이나 분야는 하나도 없었다. 이리하여 몇 몇 공돌이 삼촌들이 “너는 수학과 과학을 잘하니 공학을 공부해라: 그것이 일자리와 돈이 있는 곳이야 (번역자 의견으로 이는 잘못된 판단, 적어도 돈 측면에서)” 라고 말했다. 또한 나는 공대 학위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는 다른 나라에 가는 한 방법으로 쉽게 취직될 수 있는 기술들을 이용하여, 내가 “천막치기 선교사, tentmaker missionary”(적어도 부분적으로 천막사가 됨으로써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사도 바울을 참고[사도행전 18:3])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텐드메이커라는 조직이 있으나 나는 특정 그룹과는 관계하지 않았다; “천막사”는 이런 종류의 선교적 노력의 일반적 은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더빌트 대학교에서 최근에 교수로서 은퇴하신 아버지의 삼촌이 그 학교를 추천해주었다. 그 대학교는 훌륭한 공학 과정과, 내가 하나님의 인도를 잘못 읽었던지 그가 추가로 다른 공부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간에, 다양한 다른 강력한 분야들을 가지고 있었고, 수 많은 기독교 학생들을 위한 조직들도 있었는데, 한 예가 내가 중추적 인물이 되었던 교내 기독교 교제(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IVCF) 그룹이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내 종교에 대해 계속해서 더욱더 진지해졌다. 나는 복음교파들에서는 너무도 흔한 전형적 조시 맥도웰이나 씨에스 루이스 타입 책들을 읽었고,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마음과 머리에 받아들였다. 나는 또한 성경 해설서들과 다양한 복음주의 기독교 저자들이 쓴 영적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책들도 읽었다. IVCF그룹에서 나는 성경 공부를 인도했고, 공동체 봉사 프로젝트를 조직-운영하는 것을 도왔고, 그리고, 대개 나의 사회 생활을 1차적으로 그 그룹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또한 교내 라디오 방송국 같은 다른 비종교 활동들에도 관여했는데, 각 그룹들의 초점에 관심도 있었고 말씀 뿐만 아니라 행위에 의한 복음전파 목적도 있었다(오직 의미 있고, 충만한 기독교 삶을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 안에 있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학교 방학 동안 집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들 중 우리 교회의 부목사가 나의 성장하는 “영적 지혜”를 발견했는데, 그는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진지한 성인들을 위해 어른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그가 휴가로 없는 동안 자기를 대신해 자리를 채워줄 것을 부탁했다. 따라서 이곳에서 대학생이던 내가 믿음에 진지한 어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는 내 부모들과 많은 내 친구들의 부모들도 있었다.
2학년이 끝나던 여름, 나는 뉴햄프셔의 주의 맨션이라 불리는 곳에서 기독상담가 훈련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그곳으로 이주한 부모 친구들 중 몇 명이 거기서 제공한 프로그람에 관계했다. 그리고 그건 굉장한 프로그람이었다. 사람들이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증거에 관해 예기한다! 주의 맨션(내가 아는 한 지금도 그렇지만)은 두 가지 임무를 갖는 자립형 기독 농장/공동생활체 이었다. 한 임무는 문제 있는 10대와 젊은이들, 마약, 술 혹은 육체적, 성적 혹은 감정적 남용에 삶이 망가진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거나 문제가 있는 일반인들을 도울 수 있는, 주의 맨션 상담가건 혹은 다른 환경에서 직업적인, 혹은 자원봉사로서의 기독상담가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삶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고, 자살자나 증오스럽고 비열한 범죄자가 되었다가 하나님의 힘에 의해 속죄 받고 거듭나 전환한 사람들을 보았다. 이 사람들은 그의 맨션 공동체에 데려와져 보살핌과 섬김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책임도 주어졌는데 그것은 공동체가 운영되도록 돕고 이익을 내는데 기여하도록 기대되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그러나 그들은 또한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교육 받았고, 만일 문제가 있을 경우,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육체적 혹은 기술적인 문제이건 그들의 책무들에 대해 받아들이거나 행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 혹은 심리적 문제이건, 도움을 받았다. 행동으로 상담가들은 이 과거 사랑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시켰다. 거의 예외 없이 사람들은 그 환경에서 잘 살았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되거나 기독교로 되돌아왔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기독인이나 기독교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비록 다른 환경에서 어떤 이들은 과거의 종교적 남용과 관련한 문제들을 여전히 갖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 기독인들이나 이 기독 종파에 대하서는 아니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의 삶은 종종 놀랄 만큼 개선되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은 그 환경을 떠났을 때 해결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이 멀었으며, 모두가 떠난 후 삶을 함께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놀라왔다.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능력을 경외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그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나는 주의 맨션에서 배운 심리 및 철학에 매료되었다.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공학에 흥미를 잃었음을 알았다. 사실 나의 관심은 정말로 일반 과학이었고, 2학년으로서 몇몇 “응용” 공학 과정 수강을 시작하면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나의 다른 관심사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전공 공학 과정인 3학년을 맞이했고, 이 때 나의 관심들은 명백히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는지 알기 위해 기도하려고 한 학기를 휴학했는데, 답은 내가 돌아갔을 때 매우 확실히 철학을 공부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학교에 돌아가기 바로 전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한 IVCF 학회에 참석했을 때 확인되었고, 거기서 나는 가용한 철학과 관련이 더 많은 세미나에 집중했었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철학 주제에 관한 InteVarsity 출판사 책들을 구했는지를 확실히 했는데, 이는 내가 세속 철학 교수들이 내게 던지는 어떤 질문들에도 영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대응할 준비기 되어있기 위함이었다. 나는 특별히 프란시스 세이퍼의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그것들은 나를 지적 높음, 깊음 그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넓음으로 인도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하라고 하는 것으로 확실히 느꼈다. 나는 바울이 골로새에서 경고했듯이 “그리스도에 의지하지 않고 현세의 기본 원리와 인간적 전통에 의거하는 속 빈 기만적 철학을 통해 포로”되는 위험들을 깨달았다. 더욱이 나는 전심을 다해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이고, 내가 주의 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면, 내가 가능한 한 내가 알아낸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리고 해답들에 대한 증거들이 나를 인도한 곳에 대해 정직하면, 결국에는 내가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고 그에게 더욱 가까이 이끌리게 될 것이라고 또한 믿었다. 나는 내가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한 것들에 흥분되었고, 더 많이 배운다는 것에 흥분되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많이 배웠다. 나의 첫 철학 수업(윤리학 기초)에서 읽은 첫번 째 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였다. 우리가 그 책을 시작하면서 교수는 우리를 주제들과 친숙하게 만들려고 서론적 강의를 했다. 공리주의란 선하고 올바른 행위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윤리 이론이다. 나는 밀이 “느낌이 좋으면 해라”라는 의미에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라고 생각하면서 강의를 떠났다. 만일 그것이 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식인들의 헛된 철학이 말하고자 했던 종류의 것이었다면, 그러면 나는 이 물들(waters)을 항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어진 몇 개의 강의들과 토론들 그리고 그 책을 읽는데 보낸 시간이, 그러나, 더 많은 세부적인 것과 숨은 의미들을 채웠고, 그리고 밀을 더 잘 이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처음에 그를 잘못 판단했었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그의 관점들에 대해 더 많은 존경을 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공리주의가 옳다고, 적어도 완벽하게 옳다고 동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치에는 맞았다. 그것은 “진리(Truth)” 그 자체인 예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참진리(The Truth)”에 대한 아주 감탄할 만한 요약이라고 내 뇌리에 남았다. 우리는 칸트와 플라톤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나갔다. 플라토에 대해 우리는 그의 대화집 유사이프로를 읽었는데, 거기서 그는 선이 신이 좋다고 해서 좋은 것인지 혹은 선이 좋기 때문에 신이 좋다고 말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알아본다. 대화집은 결론적으로 후자임을 가리킨다: 신은 선이라는 것이 좋기 때문에 좋다고 말한다. 내 기독교적 사고방식에서 나는 이것을 선의 실존적 확증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내가 믿는 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존과 선함의 더 많은 증거였다. 나는 다른 강의들에서 플라토에 관해 더 많이 읽었고, 그는 특히 심오한 사색가로서, 내가 믿는 바 나와 모든 진정한 거듭난 기독인들이 갖는다고 믿었던 참진리가 안에서 내재하고 인도함 없이, 가능한 한 가장 근접한 자신만의 “참진리”를 소유한 것처럼 보였고, 이점이 특히 나를 놀랍게 했다. 나는 또한 이 수업들에서 내가 읽었던 것들이 씨. 에스. 루이스와 프란시스 세이퍼보다 논쟁에 있어서 더 활발하고 철저할 뿐만 아니라 더 깊고 심오한 지적 수준에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루이스나 세이퍼의 글들이 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어서 더 진리라고 믿었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놀라운 사상들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그것들 모두를 나의 복음주의적 관점과 틀 안에서 수용할 수 있었다.
다음 장(The Next Chapter)-추후 올릴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