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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답변
글쓴이 : 엑스
기독교와 비교해 볼 때, 불교는 배타성을 전혀 가지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불교는 부처를 섬기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유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교가 공자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불상에 참배하는 사람들을 보고 불교는 부처를 섬기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불교에서는 불상이나 부처를 섬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불교는 배타적이지 않으므로 전통적으로 기복신앙과 융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불교에서 교리에 어긋난다고 타사상과 종교를 함부로 배척한 일은 없다.
남을 배척하는 성질은 개신교 주류의 특성이다. 인천항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기념비가 공원에 세워졌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시비 거는 종교는 없었다. (이것은 MBC의 PD수첩에 방영되었던 내용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와는 대조적이다. 장승공원 조성반대(집단 시위, 공사 방해하기, 헌법소원내기 등),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관광명소화 사업 반대 등 다른 종교에 대한 극단적 배타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배타 행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위의 특징은 많은 사례에 어김없이 적용된다. 종교의 자유를 들먹이며 성남 일화 축구단을 몰아내기 위해 애썼던 목사가 할렐루야 축구단을 창단을 추진했던 점이나 전남 영광군의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관광 명소화 사업에 강력하게 반발했던 장본인인 목사가 영광군 순교자 기념관 건축을 추진했던 점도 눈여겨 볼 만한 사건이다. 다른 사례들이나 자세한 사항은 후술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면 과연 기독교의 교리는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가? 오히려 대한민국 헌법은 기독교의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인들은 나 이외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기독교인이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대한민국 헌법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종교의 자유"가 자교를 보호하고 타종교의 활동을 방해하는데 이용가치가 많기 때문이다.
단군상을 철거하라는 그들의 논거는 내부적으로 "우상숭배 금지"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종교의 자유"이다. 이 얼마나 이중적인 행동인가?
참고자료를 한번 보자.
중앙일보 기사 리스트
단군상 건립운동 논란 가열
1999.06.18 (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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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기독교윤리실천운동.한국복음주의협의회 등 1백여 개신교계 지도자들은 14일 서울 송파제일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소위 민족정신의 회복, 효정신 회복, 조국통일 기원이라는 명목하에 단군을 국조로 적극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공공시설내에 단군상을 설치하고 있음은 개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며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크게 두가지 이유로 단군상 설치를 반대하고 있다.
첫째, 역사적 사실로 정립되지않아 학자들간에 논란이 되고 있는 신화적 인물을 민족전체의 국조내지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심는다.
둘째, 일개 종파의 종교시설물을 마치 국교인 양 공공 시설내에 설립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와 국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실상을 철저히 조사해 이에 대한 신속한 조치를 취해줄 것" 을 촉구한 이날 모임은 앞으로 지역교회와 기독교계, 시민단체가 연대해 단군상 건립저지운동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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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기자
"종교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도 인정하고 공존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헌법일 것이다. 그러나 한기총을 비롯한 기독교 집단은 그러한 취지는 외면한 채 배타 행위의 명분으로만 이 법을 이용하고 있다. 결국 타종교를 배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개신교다.
물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도 더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바이블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으로부터의 탈피
2.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 인정, 타종교에 대한 존중과 이해
1번을 들여다 보자. 과연 바이블 해석에서 문자주의를 탈피하면 기독교의 문제들이 사라질까? 천만에 말씀이다.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의도적인 호도는 아니겠지만) 기독교인들이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원인은 문자주의적 해석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념들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인 것이다. 제7일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이 우리나라의 정통 개신교단으로부터 이단이라 배척받는 기독교인들은 개신교단처럼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없다. 그들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노골적인 배타행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타인을 정죄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그들의 굳은 믿음 때문이고, 둘째로 그들의 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자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바이블 해석 또한 가관이다. 이들의 바이블 해석은 어떻게든 기독교의 신에게 흠집이 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기독교의 신이 타민족을 학살하고 겁탈하라는 구절이나 예수가 지옥과 종말을 반복해서 강조하거나 맹신을 요구하는 구절들은 ‘비유의 표현’을 빙자하여 얼버무리거나 외면한다. 이런 식으로는 문자주의적 해석에 대한 마땅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독단에 맞서기 위한 또 하나의 독단일 뿐이다. ‘해석’의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인 이상 지구상에 절대적인 해석은 없으며 어떤 해석 방법이든지 그것이 맞다는 보장은 없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어떤 해석 방법이 틀리다는 보장도 없다는 말이다. 특히 이성보다는 신앙이 강조되는 종교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해석도 절대적이 될 수 없다. 이성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은 믿음에 의한 해석이 어떻게 절대적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문자주의적’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는 기독교인 역시 독단에 빠져서 다른 독단을 손가락질하고 있을 뿐이다.
2번을 들여다 보자.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는 종교다원주의와 양립할 수가 없다. 바이블은 타종교를 배타할 수 있는 명분으로 쓰일 수는 있어도, 타종교 관용이나 인정의 명분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기독교만이 진리, 오직 예수,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말들은 모두 기독교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만한 것들이다. 다음은 바이블에서 예수가 한 말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3:18)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으리라고 한 것이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와 같이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요한8:2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위의 구절들이 과연 "오직 예수"나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은 구호와 무엇이 다를까? 물론 이러한 구호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그 안의 깊은 뜻을 보라고 할 것이다. 결국 해석방법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기독교인이 있으면 자신의 해석 방법이 옳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필자로서는 어떤 글을 해석할 때, 그 글이 어떤 비유나 상징이 들어 있음을 암시하지 않는 한, 어울리지도 않는 무관한 개념들을 끌어다 덧붙이는 해석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만일 예수의 의도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니었다고 할 지라도 위의 구절들은, 옳은 해석 방법을 모르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타종교 관용은 사악한 짓이라는 관념을 심어준다는 점은 부인의 여지가 없다. 어떤 기독교인은 의로운 사람만이 바이블을 바르게 해석한다고 주장한다.(사실 이 주장은 자신이 의롭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말은 이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 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도 올바른 해석을 아는 것이 낫지 않는가? 올바른 해석을 알지도 못하게 해놓고 그것을 모른다고 벌을 주는 신이 어떻게 공의롭다고 생각하는지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또한 단지 해석상의 차이가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간에 불화를 조장하고 오만을 부추길 뿐이다. 보편적인 상식을 지닌 현대인이라면, 타인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사실이 타인의 부도덕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자신과 다른 믿음과 생각에 대한 저주를 정당화시키는 일들이다.
바이블의 내용을 두고 볼 때,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느니 차라리 기독교를 버리는 것이 나을 정도다. 예수의 사랑을 아무리 확대 해석한다고 해도, 타종교에 대한 관용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명심해야 할 바이블 구절이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알고도 종교다원주의 운운하는 기독교인을 이해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고린도전서16:22)
1992년 감신대 학장 변선환씨와 교수 홍정수씨는 종교다원주의와 예수의 육체적 부활 부정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감리교에서 축출당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대한 불신과 의심을 죄악이라 여긴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배타성을 제거한 기독교를 과연 기독교로 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기독교가 배타성을 띨 수 밖에 없는 원인은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교리에 대한 맹신이다. 예수가 동정녀 탄생을 하고, 부활했다는 것을 아무 확인도 없이 믿었는데, 단군상을 훼손하는 짓이 올바르다는 믿음에 대해 따져 볼 필요가 있겠는가? 맹신주의는 결국 독단성과 배타성을 낳는 법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신중한 사람도 때로는 독단적일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신중한 판단은 독단성을 막아주는 유일한 약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적 신앙은 독단성을 부추길 뿐이다. 확실하지도 않고 증거도 없는 것들을 철썩같이 믿도록 교육받은 사람은 자신이 가지게 되는 의견에 대해 의구심이나 확인도 없이 확신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이 신앙인 이상, 기독교에서 배타성과 독단성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