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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자체를 반대하는 이유 by 분석가
기독교를 맹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인간을 일거수 일투족으로 감시한다는 것을 정말로 믿음으로써 못된 일을 저지를 수 없다.
2. 살면서 겪는 고통을 더는 정신적 의존처이다.
3. 사람들이 모두 선행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예수는 그렇게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면 그것을 믿지 않는 것보다 그의 가르침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므로 선행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
1번의 경우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감시가 두려워 사기를 치거나 강간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뒤집어 보자. 강간, 사기 목사들의 짓거리가 먹혀든 또다른 이유는 기독교를 신실하고 열성적으로 믿는 대다수의 순진한 기독교인들이 사기를 당하고 강간을 당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독교를 열심히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사후의 상벌에 대한 협박과 회유를 반복적으로 주입당하고 확인없는 맹목적 추종을 미덕으로 삼아 온 평신도는 종교를 빙자한 사기꾼들에게 잘 길들여진 희생양일 수 밖에 없다.
2번에 대해서 반박하자면, 개인의 고통에 대한 정신적 위안처로서의 기능은 기독교의 해악성(맹신, 배타성, 독단성)을 상쇄할 만큼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기독교가 강조하는 원죄설은 자기에 대한 의미없는 비하와 학대를 심어준다는 면에서 정신적으로 유해하다. 이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 집착하고 후회하게 만들므로 이런 버릇에 길들여진 사람은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도 자신을 향해 화를 내게 된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야 개인적으로 정신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쳐도, 다른 사람들에게, 또는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사회에 그 특유의 배타성으로 인해 불쾌감과 피해를 준다면 존재 이유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기독교 말고도 정신적 위안처가 될 만한 것들은 많으며 꼭 기독교가 아니면 안 될 만한 이유는 찾을 수가 없다.
3번에 대해 반박해보자.
일단 첫째로, 버트란드 러셀의 지적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그에 따르면 3번 같은 식의 주장은 선후관계가 뒤바뀌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윤리관 때문에 이웃사랑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기독교리에 바탕을 두고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리를 말하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고 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윤리관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신성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웃 사랑 정신의 근원은 결코 예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석가나 노자, 랍비 힐렐 등이 가르쳤던 것들이다. 결국 3번과 같은 주장은 예수의 신성보다 자신의 윤리관이 앞선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된다.
둘째로, 기독교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게 되면 이웃 사랑의 정신이 사라지고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 기독교 신앙인들 중에서는 실제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 넌센스를 진짜라고 맹신하기 때문에 기독교 전파에 안달이고 신도수의 증감에 과민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기독교 없이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선행을 하지 않았거나 이웃 사랑의 정신이 부재했다는 말인가? 선행, 이웃 사랑은 말 그대로 착한일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며 도우면 되는 것이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수보다는 보편적 상식을 믿는 편이 오히려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예수를 최고선이자 최고의 지혜를 갖춘 성인으로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혹시나 예수의 완벽성에 흠집이 가지나 않을까 하여 예수에 대한 약간의 비판도 용납치 않으려는 독단을 보인다. 사람들은 보통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더 잘 믿는 경향이 있다. 예수가 최고선이고 가장 현명하며 신과 같은 존재라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사람으로서는 예수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굳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친 것들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판단의 여과 없이 주입되기 쉽다. 그래서 예수의 훌륭한 가르침과 더불어 해로운 가르침조차 옳다고 믿게 된다. 바이블에 따르면 예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지옥의 형벌에 대한 묘사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을 더 잘 믿고 따를수록 사후에 더 많은 보상이, 자신을 거역할수록 영원하고 잔인한 형벌이 가해진다는 식으로 말했다. 마태복음10장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고통에 빠지기를 원하는 심리를 정당화시킨다. 반셈족주의에서 비롯된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나치에 의한 학살도 여기에 해당한다)이나 이단사냥, 마녀사냥 등에서 볼 수 있는 적대감과 잔인함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물론 복수심은 어느 정도 인지상정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비롯한 기독교의 교리가 복수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예수의 가르침이 훌륭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명백하다. 러셀은 이러한 점을 들어, 기독교는 진실성도 없을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웃사랑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바로 상대방에 관한 이해다. 많은 다툼들이 상대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 눈감고 귀막으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맹신자들과 의사소통이 잘 될 리가 없다. 그들의 대화 방식은 일방통행 이외에는 없는 듯 싶다. 어떤 것을 100% 확신하는 사람에게 그에 대한 비판이 귀에 들릴 리가 없다. 기독교인들의 우월감은 아마도 여기에서 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장 큰 해악성은 바로 맹신에서 온다. 기독교 사상은 의심 없는 투철한 맹신이야말로 가장 선하고 칭찬받을 만한 태도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인들의 사고 기저에 깔려 있는 배타적, 독단적 성향과 우월감은 모두 맹신으로부터 온다.
물론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이 곧장 배타성과 독단성을 불러 일으킨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남을 돕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말을 맹신한다면 그것이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이 진리라는 생각과, 기독교 전파를 위해서라면 배타성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맹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맹신은 그야말로 반성, 타인과의 대화와 타협, 양보의 여지가 없는 믿음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러한 맹신에 비해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일단, 다른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쓸데없는 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또한 다른 사람의 믿음이 옳을 수도 있으므로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확산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웃사랑이 실현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기독교가 퍼뜨린 맹신의 확산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 왔는지를 살펴 보자.
지하철에서 고성방가하면서 울부짖는 광신자들은 그들이 기독교를 대충 믿어서가 아니라 신실하게 믿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서의 광적인 무차별 학살 행위는 교회에서 배운 가르침을 그대로 이행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기독교를 대충 믿었다면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를 겁탈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일 필요성은 단지 광적으로 믿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온 것일 뿐이다. 다음은 역사학자 시드니 페인터의 말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십자군의 구원에의 길이라는 진실로 종교적인 열정과 완전한 확신에 의해 움직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지를 양도하거나 또는 매각까지 하여 그들의 아내들과 가족 곁을 떠났으며, 그의 적들에 대항하여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적지와 가공할 바다를 경유하면서 오랜 정벌에서 발생하는 모든 두려움에 맞섰다. 일반적인 가설에 의하면 십자군은 결코 귀향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많은 병사들이 항상 초췌하고 파산된 채로 귀향하였으나,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먼 외지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중세인의 신앙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에게 십자군은 결정적인 반박의 증거가 된다. " (시드니 페인터, 서양중세세계사)
단군상 목을 자르는 행위는 또 어떠한가. 그것이 과연 기독교의 믿음에 소홀해서 저질렀다고 할 것인가? 오직 예수라는 신앙의 순수함은 단군상을 훼손하고 절에 불지르는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다. 진해 청룡사에 난입해 쇠파이프를 휘둘러 불상 3개를 완전히 부수고 탱화를 찢는 등 30분 동안 난동을 부린 어느 목사도 경찰서에서 『하나님과 배치된 그 어떤 우상숭배도 있어선 안된다는 신념으로 일을 결정했다』며 『나의 행동은 하나님이 용서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96/04/30)
그 밖에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실제로는 마녀사냥은 17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으며 중세보다 오히려 나중으로 갈수록 더 많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사실이다)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불태워 죽였던 것들이나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소환한 일 등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 역사가 6000년보다 길다는 생각은 살인만큼 중죄라고 여겼다. 종교 개혁가라 불리는 칼뱅은 교회 불참이나 춤, 연극 등 모든 오락 행위를 금했고 이를 어길 경우 무거운 형벌을 가하도록 했다. 삼위일체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를 화형장으로 내몬 장본인도 바로 칼뱅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광신 개신교인들은 바로 칼뱅의 뜻을 이어받아,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는 또한 나라는 망해도 기독교는 전파되어야 한다는 정신을 충실히 지켜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류 개신교는 일제 시대에는 부일 협력을 통해 기독교 전파의 자유를 지켰고, 군사 정권 때에도 권력에 빌붙지 않았던가.
구약을 보면 타민족을 학살하고 겁탈하라고 야훼가 명령한다. 그러나 십계명을 보면 살인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원죄설을 믿다보면 도대체 범죄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신실하게 예수를 믿고 바이블을 인생의 지침서로 삼으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를 신실하게 믿고 바이블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몰상식하고 잔인한 행동을 일삼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이 계속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저 "기독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쁘다", "보이지 않는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더 많다" 같은 판에 박힌 변명으로 일관해 왔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다른 종교들에서도 기독교만큼의 문제가 발생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결국 기독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교리는 그들의 신이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하며, 신의 말씀에 충실한 삶이 가장 선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맹신자들은, 일반인들의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신의 명령이라면,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살아가면서 두 가지 이상의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가장 많이 겪는 상황 중에 하나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와 "상대방을 배려하라"라는 두 윤리관의 충돌이다. 우리는 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위로할 때, 가끔씩은 거짓말도 섞는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보통 좋은 뜻으로 "선의의 거짓말"이라 불리기도 한다.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우리는 살면서 여러 윤리관이 복잡하게 얽혀서 서로 충돌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보통, 충돌하는 가치관 중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가치관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의 인생 지침서이자 구원의 길인 바이블이다. 바이블이 어떤 책인가를 여기서 서술하지는 않겠다. 다만 바이블이라는 유대 신화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잘 살펴보자.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판단할 때 아무리 정신 나간 짓이라도 그것이 신의 가르침이라면, 기독교인들 특히 맹신자들은 따를 것이다. 그래서 단군상의 목도 자르고, 절간에 방화를 하며, 붉은 악마의 명칭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처음 기독교를 믿기 시작할 때처럼, 무턱대고 믿고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 야훼가 천지창조를 했고, 예수가 부활해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을 아무 확인도 없이 믿었듯이, 다른 사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몰상식한 기독교인들의 작태에 반대하고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
"그런 몰상식한 행위는 신께서 가르치신 바가 없다. 기본적인 상식도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신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상식을 지키는 것이 참되고 성숙한 기독교인의 태도이다"
라는 식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첫째로,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둘째로, 그 자체로도 부당하다.
1. 효과가 없는 이유는, 그 몰상식한 행위가 신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믿음이요, 그 행위가 신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주장 또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증거나 확인도 없이 믿는 행위"를 선하고 옳은 행위라고 여긴다. 예수는 이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 바 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20:29)
즉 확인없는 맹신이야 말로 복을 받을 만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그것을 저주하여 말라죽이면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보자.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 무화과나무에서 본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21:21)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말을 하고 있다. 바이블에는 예수가 이런 식으로 맹신을 요구하는 구절이 많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이 기독교인들에게 맹신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태도가 옳은 행동인 것이다. 신념의 문제로 다투는 기독교인들을 살펴보면 누구의 고집이 더 센가를 겨루는 것 같다.
2. 그 자체로 부당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신의 가르침과 인간의 상식적 윤리관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짓도 신이 보기에는 참되고 올바른 행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가르침을 행한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기본적 상식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결국 몰지각한 신도를 계도하기 위해 예수나 기독교리를 끌어들여 보았자 효과적이지도 않고 타당치도 않다. 그저 상식적 윤리관만 있다면 충분히 비판이 가능하다.
이제 종합해 보기로 하자. 기독교를 맹신하면 맹신할수록 도덕이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게 되고 모순에 둔감해진다. 신중한 판단은 사람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많은 실수를 예방해 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므로 기독교인들은 신중함조차 내버리고 오로지 신에게 매달리려고 한다. 자신의 신중한 판단조차 의심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종교적 도그마에 충실한 것이다. 그들은 양심에 따라 살고는 있지만 그것은 종교 노예의 양심일 뿐이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존속에 필요한 교리들에 대해 생각과 확인 없이 믿을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 능력을 퇴화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기독교를 맹신할수록 어떤 것이 중요한 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가치관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해답을 찾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별 쓸모도 없고 오히려 맹신으로 인한 독단과 배타성을 퍼뜨리는 종교이므로 사회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예방을 하거나 삶의 고통을 덜기 위해 꼭 기독교를 찾을 이유는 없다. 기독교의 교리가 주는 교훈은 대부분 현대인의 윤리관과 맞지 않으며, 그나마 쓸만하다는 것들(예를 들면, 이웃사랑)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 기독교가 무너진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이웃사랑 정신"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기독교에 바탕을 둘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