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마마님과 기독교의 강요된 오해들[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안티예수를 방문하신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글들입니다.
이 곳의 글들을 꼭 읽어 보신 후 다른 게시판에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손님 마마님과 기독교의 강요된 오해들[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이드 0 3,431 2005.03.05 19:05

[....너이 하래비가 양구신을 믿게 된 건 동무를 잘못 사궤서 기래.저어 장연 솔래포에 양구신 퍼치넌 코쟁이 선교꾼이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 왔다던데, 그 뒤로 장연 사람은 부재나 가난뱅이나 모두 양구신얼 믿어.장연서 왔단던 너이 하래비 동무가 내중에 소핵교 선생 댕기던 아인데 저이 부모부터 저까지 양구신쟁이야.신천 읍내에서두 포교당인가 예비당인가 들어와서 젊은 것들이 매일 모여선 콩이야 팥이야했디.


다 큰 아덜을 에미가 어떠케 이기갔나.마루에 있던 성줏단지까지 깨버리고 겐데내기 힘들어서.


동네 아낙이 와선 큰탈이 났다구 기래.무슨 일이냐꺄,했더니 댁네 아덜이 예비당에서 넋들임을 하구 있시다하넌 게여.넋들임이 무에냐.말하자문 신 내린단 소리 아니냐.나는 뛰쳐갔디.
뭐라 뭐라 물어보고 대답하고 머리에 물을 바르더만. 그거이 양구신이 몸에 들었다넌 표시라더라.
난 예전엔 우리 넝감이 장에 갔다 상투 잘리구 와선 방성통곡을 하던 꼴이 생각나드랬넌데.  나두 하 증이 나서 땅바닥을 치멘 울었다. 그러구 너이 하래빈 아주 높은 양구신 박수가 되었어.


제 새끼 양구신쟁이 만드넌 거야 어찌 또 내가 말리갔나. 너이 애빈 말할 거두 없구 메느리라구 온 것두 야소교 만신 박수 딸이구.....그러니께 너읻덜두 내 말얼 명심하거라.


....  


우리가 어려서부텀 어런들께 들었지마는 손님마마란 거이 원래가 서쪽 병이라구 하댔다.
서쪽 나라 오랑캐 병이라구 허니 양구신 믿넌 나라서 온 게 분명티 않느냐. 내가 너이 하래비 우르 아덜을 둘씩이나 손님마마에 보내고 났시니 양구신에 부아가 나겄너냐 좋다구 믿겠너냐. 사람은 제 근본얼 알어야 복을 받는 게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손님" 열두 마당 중 둘째 마당 '신을 받음'에서 주인공 류요섭 목사의 증조할머니가 증손주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 되겠다.


조선 최초의 기독교 선교 장면을 피부로 체험했던 한 민초의 생생한 육성이 아닌가한다.
그 무렵 조선의 평범한 백성들이 기독교란 새로운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고,반응하며,받아들였는 지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한 명문장으로 오랫 동안 기억에 자리잡을 것 같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 뒤
감동 혹은 동감을 느꼈다면 퍽 다행한 일이겠지만 불편함을 느꼈다면 더욱 큰 가치관에 접근하는 행운을 획득했다고  생각한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이 그러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황해도 신천이라는 마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부터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음을 고백한다. 필자의 부친이 신천 부근 황주 출신이었으며 더우기 뵙지 못한 할머니께서 기독교 선교 초창기 부터 신자였다는 아버지의 옛 이야기가  성큼 기억으로 ....소설을 읽는 내내 나 자신을 괴롭혔음도 함께 고백한다. 게다가 류요섭 목사의 형 류요한 장로의 나이가 아버지와 거의 동년배였음도 더욱 두근거리게 했던 정체의 하나였음이 틀림없겠고.


소설의 첫장면 부터 끝마당까지 필자를 내내 불편하게 한 그 무엇의 정체가 필자의 피내림이었다는 게 확인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아버지에게 무엇을 더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니었으면...하는 바램뿐.


"손님"은  미국 뉴욬 브루클린에  거주하고 있는 류요섭이라는 한인 목사와 그의 형 류요한 장로를 두 축으로 전개되는 불행했던 시절의 처절한 기억들을 그들의 고향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씌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주인공 류요섭 목사의 부친은 장로였으며 할아버지는 목사, 어머니는 목사의 딸, 그의 형은 집사.....
전형적인 기독교 집안의 모범적인  가족 구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들의 가족 중에도 소위 이방인이 한명 존재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증조 할머니가 되겠다.
그 노인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상기 문장을 참고하시라.


소설은 '살인도 습관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라는 화두를 내내 제시하며 소위 빨갱이라 불리우고 있는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예수쟁이라고 칭해지던 기독인들간의  이웃 사람 죽이기 경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처음에는 그저 내 가족, 내 영역 지키기를 위한 것으로 시작되다가 그 다음에는  상대와의 권력잡기 싸움의 결과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다음 차례는 증오에 대한 증오로 되돌려주기가 결론이 되어 버리는 데 류요한이 같은 기독청년 동료 조상호와의 갈등으로 행하는 사람 죽이기로 그 비극의 최절정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두 동료의 갈등을 잠깐 정리해 보겠다.
(기독인들이 소위 빨갱이들을 집단학살하는....삐삐선으로 이웃 사촌의 코를 끼워 끌고 가는.....등의 내용은 생략하겠다.)

 

*같은 기독교인이며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 조상호가 요한의 누이를  살해했음이 확인된다.
*요한의 매부가 공산당원이었다는 게 조상호의 변론이 되겠으며 물론 그 이전에 그의 애비 조장로가 공산 당원에게 죽임을 당했음이 그 뿌리가 되겠다.


*이제는 요한의 차례다.
*공산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노리개감이 된 마을의 윤선생이라는 처녀를 술집에서 집단 강간하는 그 현장에서 상호외 다른 기독 청년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요한은 그 처녀를 총으로 살해한다.

 

*이제 사십오일간의 축제도 끝맺음을 할 시기인데 중공군의 참전으로 모두들 남쪽으로 피난가야만 했단다.


*요한은 상호의 약혼녀 박명선의 누이들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을 살해하고 난 뒤 남쪽으로 피난함으로서 그의 증오에 위로를 하고져 한다.
*상호 역시 요한의 남은 누이를 살해하고 남쪽으로 도주함으로 그의 증오를 다시 확인한다.


*그들은 남쪽으로 무사히 피난을 했다지만 평생 서로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가슴에 흉터로 자라나게만 한다. 그리고 타인들이 그 흔적을 훔쳐갈까봐 두려워하다가....변명을 하다가....그렇게 그렇게 평생 동안 가슴을 열지 않고 살다가 죽음과 악수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을까?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물론 이 소설은 피내림이 손님일 뿐인 맑스주의나 기독교 보다 우선해야함을 강조하는 그리고 이제는 악수하고 화해해야만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소설이다.
(수구적인 민족주의 마저 초월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만을  추구하는  이데올기가 있었으면....하는 게 필자 개인의 의견임을 참고했으면 한다.)


이러한 글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아마 또 다시 일부론을 거론할게 틀림없을 듯하다.

혹은 예수 잘 못 믿은 인간들의 잘못일 뿐지 예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하는 주장도 있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 22:37~40) >>


과연 그러한가?
*사실 예수는 이웃 이전에 가족 사랑도 실천을 하지 않았고 모범도 보이지 못 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은 흔하게 입술로 내 뱉었지만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야훼 사랑만이 최고의 가치임을 주장했고 나머지 사랑은 오직 주안에서의 사랑 즉 조건부 사랑만을 강요했었다.....


바이블이 가르치는 이러한 오해들의 한 결과가 상기 손님에 등장하는 요한 그리고 상호의 변명들이 아닌가한다.


손님.
그는 우리가 초대해서 왔든 스스로 왔든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쁨으로 맞이할만큼 반가운 이도 있지만 불편하고 때론 도망치고싶은 손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에게 왔다는 그 사실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 그들도 우리에겐 손님인 것이다.


예전엔 마마를 큰손님이라 했다. 한번 다녀가면 생사를 가를 수 있기에, 그렇게 지나간 마마는 삶을 준 대신 평생 그 흔적을 남겨놓는다. 병을 앓을때는 힘들고 어려워도 참아야 하고 쓴약과 주사도 맞아야 한다. 그리고 남겨진 흔적을 볼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참고 이겨내야 생을 찾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모습으로 다가오는 손님을 맞이해야 할까?


끝으로 작가 황석영의 후기의 한 귀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감할까한다.


...... 이작품에 그려진 사실들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었으므로 북이나 남의 어떤 부류들이 매우 싫어할 내용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도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도에 비해 희박했던 북선지방은 이 두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 서구에서 냉전이 사라진 지 십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변방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실상 무서운 '손님 마마님'은 아직도 미국이 아닌가.

 

                                                              2001년 5월 황석영 _ 책 뒷편의 작가의말 중에서

 

 

 

사족:불편한 소설 "손님"의 일독을 기독인들에게 정중히 권한다.

예수 그리고 맑스보단 민족이 더욱 소중하고 민족에 앞서 인간의 선함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면 한다.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454 ▶초대교회의 십일조... 이드 2005.03.05 3339
453 ▶헷갈리는 야고보 이드 2005.03.06 3340
452 ▶보물찾기(사울에 대해) 이드 2005.03.06 3343
451 ▶원죄론 다시 생각하기 이드 2005.03.09 3357
450 ▶기독교가 미신 혹은 사이비임을 증명하는 일곱 가지 명제 이드 2005.03.05 3360
449 ▶기독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기독인들의 저주) 이드 2005.03.10 3365
448 ▶교회를 청소년 출입금지 장소로 지정할 것을 요망하며.... 이드 2005.03.05 3366
447 ▶목사 그리고 얻는 것과 잃는 것 이드 2005.03.05 3375
446 ▶피를 먹고 자라는 기독교(부제:드라큐라는 야훼의 또다른 이름) 이드 2005.03.10 3379
445 ▶목사들이 기를 쓰고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 이드 2005.03.05 3379
444 ▶새바다는 어디로 사라졌지? 이드 2005.03.10 3386
443 ▶인류를 증오하는 기독교....성만찬의 비밀 이드 2005.03.05 3389
442 ▶루터와 칼빈에 대한 소고 이드 2005.03.05 3395
441 ▶소위 짝풀이에 대하여... 이드 2005.03.06 3395
440 ▶개혁이냐 박멸이냐 이드 2005.03.05 3404
439 ▶기독교의 천박함 그리고 캬바레 이드 2005.03.05 3407
438 <b><FONT color=#0162f4>제3장:누구의 음모인가?....개역판 바이블의 문제점</font></b> 이드 2005.03.06 3407
437 ▶성령은 왜 이름이 없을까? 이드 2005.03.05 3415
436 ▶발바리에 대한 추억과 기독인들의 유형 다섯가지 이드 2005.03.05 3424
열람중 ▶손님 마마님과 기독교의 강요된 오해들[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이드 2005.03.05 3432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177 명
  • 오늘 방문자 1,615 명
  • 어제 방문자 5,217 명
  • 최대 방문자 5,411 명
  • 전체 방문자 1,581,117 명
  • 전체 게시물 14,416 개
  • 전체 댓글수 38,042 개
  • 전체 회원수 1,668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