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의 종교로 알려져 있으며 예수는 비폭력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전쟁과 광기 그리고 증오로 이어져 왔음 또한 사실이다.
이 역설적 괴리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예수의 설교와 그 행동을 분석해 보면 그 모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고 본다.
우선 예수가 사랑에 대해 설파한 장면을 보기로 하자.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 그 유명한 산상설교 중의 한 귀절이다.그리고 마태복음19장에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19) >>하고 사랑 타령을 한다. 그리고 산상복음의 다른 내용을 예를 들면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마태 5:40) >> 정말 사랑의 화신같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복음서의 전체적인 흐름은 갈등과 긴장으로 가득차있다.그리고 그 갈등은 종종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주인공인 예수 뿐만 아니라 조연 격인 그 주변의 인물도 마찬가지겠다. *공관복음의 첫 작품인 마태의 전승은 족보 이야기 다음의 첫머리 삽화로 헤롯의 유아 대학살로 시작하는데 이 이야기는 복음서의 갈등을 예고하는 첫머리 화두로 보여진다. *야훼 혹은 예수 자신이 갈등의 대상으로 때로는 폭력을 야기시키거나 옹호하는 모습으로 묘사됨을 보면 그 증거됨을 확인할 수 있겠다.
화합 보다는 갈등을 조장하는 그 문제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서두에 마리아가 야훼를 찬양하는 장면이 나오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누가 1:52) >> 권력에 대한 굴종을 주장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권력에 대한 증오감은 사회의 불안 요인이 될 수 밖에 없음은 역사의 교훈이 아닌가한다.권력의 남용에 대해 경고를 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마리아의 찬양처럼 행동하다 보면 쿠테타적 발상만 생기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게하는 귀절이 되겠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마가 1:52) >>
마가복음도 악령과의 투쟁으로 예수의 공적인 활동이 시작됨을 보여 주고 있다.
왜 복음이라는 예수의 말 그리고 그 행동이 갈등으로 그 긴장감을 고취시켜야할까? 소위 사랑을 주창하는 종교라면 그 대상이 권력이 되었던 마귀가 되었던 갈등 요인을 해소하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사탄 마저도 사랑으로 개심시키는 신의 모습을 왜 보여 주지 않을까? 기독교의 본질이 복음서의 첫 삽화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부유층에대한 갈등 조장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6장20절에서 24절을 보면 빈부에 대한 극단적 이분법으로 그 갈등을 조장하며 심화시키고 게다가 확대까지 시키는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
가히 쿠테타적인 발상이 아닌가? 굶주린 사람에겐 빵을 주던가 그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부유한 자들에겐 그 부의 배분에 대해 방법론을 제시해야지 예수는 그저 갈등의 긴장감만 조성하고 있다.
예수와 종교적 대립자라 할 수 있는 바라새인들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그들을 설득코쟈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며 저주로 일관하는게 예수의 일관된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이상 누가 11:37~52)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 역시 저주로 일관한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잘 들어라. 아벨의 피를 비롯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살해된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이상 누가 11:37~52)
빌라도의 갈릴리인 학살에 대한 예수의 발언도 끔직하기만 하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 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누가 12장)
로마의 폭정에 시달리는 민중들에게 그저 맹목적 신앙만 요구하고 있다. 위로는 커녕 오히려 저주을 퍼붓는 예수의 폭언에 그대는 무엇을 느끼는가?
바리새인이 예수를 나름대로 걱정하여(예수는 그들에게 저주를 퍼 붓기만 하는데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헤롯의 관하로 부터 피신할 것을 권고하자 예수는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헤롯이 싫어하는 행동만을 계속할거라고 말하는 치기를 보여 준다.그 바리새인은 예수의 그 교만에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어서 이 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 >> <<예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고 전하여라>>...(누가 13장)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후 대대적인 환영에 고무되었을까? 성전에서의 행위는 사랑의 예수란 말 자체가 무색한 그저 교만하고 폭력적인 모습만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거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 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마태 21:12) >> 당시 유대에는 여러가지 화페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전에 예물로 드리는 돈은 오직 유대 화폐만 요구되었다하는데 이러한 관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앙적 관점에서의 행위만 요구하는 예수의 독선에서 그대는 무엇을 느끼는가?
예수는 폭언도 불사한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마태 23:33) >>
예수에게는 설득과 타협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자신을 따르던가 아니면 저주 뿐이다. *사단 마귀는 말할 것도 없고 *바리새인,율법학자,사두개인 *헤롯왕 *부유층...등등
예수가 진정 사랑을 주창한 인자였다면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소위 그 원수된 자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모습을 보여 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행위는 포기하고 그저 독설과 저주로만 일관했다.
예수 이후 기독교가 인류에게 행한 악행의 그 뿌리가 되겠다.
사족 하나:그러나 로마의 권력에 대해서는 너무나 순한 양같은 모습을 보여줬던게 또 다른 예수의 모습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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