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교주들의 이력서(김백문에서 신XX까지 1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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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교주들의 이력서(김백문에서 신XX까지 13명)

이드 0 5,772 2005.03.05 18:23
1. 김백문의 배경과 사상
 
1930년 초반에 사회와 기독교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소위 예수교회의 이용도파는 기독교회의 분별력 있는 책벌로 잠적해 버렸다. 그러나 20년후에 그의 신앙과 원리는 삼각산 기슭에서 다시 싹이 트기 시작했다. 바로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운동이다. 그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전리에 기도처를 두고, 새원리를 강론했다. 그것은 이용도의 영적인 신인 합일주의를 이론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김 백문의 첫 시도가 "성신신학"을 쓴 것이다. 이것은 1954년 3월 2일에 발행되었다. 본서의 내용은 요한복음 1장부터 17장까지를 이용도식으로 풀이한 것이다. 여기서 이용도식이란 주관적인 신비체험을 성경의 교리들에 합리화시킨 것을 말 한다.
또한 김백문은 "기독교 근본원리"란 방대한 저서를 1958년 3월 2일에 내 놓았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을 만 3년간씩 3번에 걸쳐서 임상학적 실험과 심령학적 체험을 통해서 완성했다고 했다. 이것이 문제의 작품이다. 그리고 " 기독교 근본원리"에서 통일교의 "원리강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동 양철학의 역학사상에 이론적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을 유추해서 신 을 정외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범신론적 신관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은 혈연적 관계에 의한 성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역사의 순환론적인 귀일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김백문은 "신앙인격론"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신령적으로 신인통일 을 내세우며 성약적 시대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실재를 귀납적 으로 통일시키려는 신비주의 소산이다.
 
김백문은 1916년 9월 4일(음력)에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일제시대 대구의전 3년을 중퇴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적 전환점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신적인 은혜를 받은 데 있다고 했다. 그것은 1930년대의 발광적인 신비주의자들 의 부흥집회에서 받은 감화요, 자신적 결단이었다. 그후에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에 이스라엘 수도원을 세워 포교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서울, 인천, 대구지방에서 소위 이스라엘의 회중을 모아 "이스라엘 총회"를 만들었다. 김백문은 이스라엘 총회의 제사장격인 것이다.
 
 정능의 기독교청수교회의 담임자인 박일환에 의하면, 김백문은 신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의 사람이란 김백문은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하여 중병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포교지인 청수교회는 매주일 불과 20명 내외의 추종자들이 모여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통일교의 문선명와 전도관의 박태선의 집단들은 사회와 기독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기이한 현상이며, 또한 우리나라 기독교회 계통의 이단종파의 역사적 계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용도를 중심한 예수교회파, 김백문을 핵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총회파, 그리고 문선명을 구심점으로 이룩된 통일교와 박태선을 영모로 모시고 있는 전도관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김백문의 사상과 원리를 묵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박태선 장로
 
박태선(朴泰善)하면 전도관(傳道館)이 떠오른다.
1955년 창립된 기독교계 신흥종교로서 초기 공식 명칭은 『한국예수교부흥협회』였다가 그후『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로 불렀고 1980년 1월부터 『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로 변경하였다. 즉 박태선 자신이 천부(天父)가 되었음을 선포하므로써, 많은 이탈자들이 생겨났고 박태선은 1990년 2월 7일 사망했다.
 
전도관(천부교)의 분열의 양태는 몹시도 복잡하여 계열분파만 20여개 파에 이르고 있을 정도이다.
교주 박태선은 평북 덕천에서 태어났으며 문선명과 같이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김백문에게 수련을 받은 바 있다.
 
박태선이 9세 때 그의 모친이 사망했고 2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여 고아 신세가 된 박태선과 그의 형은 고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덕천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해방이 되자 남대문교회를 다녔고 열심 있는 집사로서 노방전도까지 했다. 이때 부흥사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가 신앙생활을 한 지 21년 만이었다. 사흘을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한 결과 사흘째 되는 날 새벽 4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과 동시에 뜨거운 성령의 불을 받았다는 것이며 그후 6.25사변으로 피난 도중 평택역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자신의 피가 소변으로 빠져나가고 성령의 피가 체내에 들어옴을 느끼는 피가름의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과열된 박태선의 광신과 맹신은 걷잡을 수 없었고 1954년부터 전국에 걸쳐 부흥집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남대문교회를 떠나서 창동교회의 장로가 된 박태선은 1955년 1월 1 ~ 7일에 서울 성동구 무학교회 집회를 하게 되었고 3월 26 ~ 4월 5일의 10일 동안 남산에서 천막을 쳐놓고 대집회를 가지면서 기성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1955년 6월에는 칼빈의 예정론을 뒤집어 엎고 자신이 소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떠나 그해 7월 1일『한국예수교부흥협회』를 조직하여 오늘날 전도관의 모체를 이루었다.
 
박태선의 전도관운동이 탈선의 길로 치닫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NCC)는 사이비종교운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1956년 2월 15일 경기노회에서도 박태선을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제 41회 총회(1956. 9. 20 ~ 25)도 박태선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1957년 4월 30일 박태선은 자신이 하늘의 권세를 부여 받았다고 설교 중에 선언했고 5월 18일에는 조작된 성화를 가지고 사진에 은혜의 상징이 나타났다고 선언했으며 6월 9일에는 자신이 식물성감람나무라고 자칭했다.
1957년 9월 1일 말세에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얻으려면 신앙촌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하면서 신앙촌 건설을 서둘렀고 동년 10월 23일에는 자신이 동방의 의인 이라고 선포하고 10월 25일에는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이니 구원이 없고 전도관에만 구원이 있다 고 외쳤다. 1958년 4월 6일 소사에 소래산(蘇來山)이 있으니 예수가 재림하는 산이라고 주장하였다.
 
1961년도에 덕소에 오토바이공장을 설립하면 집집마다 자가용 1대, 피아노 1대, 전축 1대씩을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고 도리어 신도들의 피땀어린 돈을 빼앗는 방법으로 착취했다. 덕소에 제 1 신앙촌, 소사에 제 2신앙촌, 경남 기장에 제 3신앙촌을 설립하고 신도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착취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박태선 교주에 대한 별칭은 참으로 다양하다. 영모님(靈母任), 감람나무 , 동방의 의인, 이긴 자, 이슬 성신, 참 구세주 또 1980년 1월 1일부터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새 하나님이라고 선언했다.
 
초창기 그가 자신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사41:2에 주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는 바로 박태선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동방은 동양이며, 사41:25의 해 돋는 곳----- 이란 동방 중의 극동을 가리키며 극동은 일본 한국 중국 세 나라가 있는데, 사41:1에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했으니 일본 섬나라는 조용하라는 뜻이고, 사41:9에 내가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했으니 아시아 대륙 모퉁이에 붙은 한국이 바로 동방의 그 나라이며, 41:25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였나니-----했으니 박태선의 고향이 이북으로 북쪽에서 월남했다는 뜻으로 해석, 자신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박태선을 감람나무라고 한 것은 슥4:11 ~ 14과 계11:4에 기록된 것으로 동방의 의인이요 감람나무인 박태선에게 이슬같은 성령의 은혜를 내려 준다 고 전도관 기관지인 국제 기독교 뉴스 (1969. 9. 29)는 말하고 있다.
 
박태선 신앙촌 헌장 제 23조에 의하면 교역자의 심령 성결 여부를 박태선이 안찰 안수한 후 확인을 거쳐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안찰이란 죄를 지적하고 죄를 사하며 성령을 물붓듯 부어주는 이긴 자의 권능이므로 죄 때문에 생긴 병은 안찰을 함으로써 치유된다고 주장한다. 전도관은 생수의 교리 때문에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수를 신앙촌 상품 판매의 경쟁에 악용해 왔고 특별생수권과 정기생수권까지 구분하여 값을 다르게 매기기까지 했다.
 
생수의 근거를 요4:10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행한 대화에서 나오는 생수에 두고 있으며 만병통치약으로 신도들이 믿도록 만능의 물로 선전했다. 생수는 병 치료 뿐 아니라 죄를 사하는데도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1980년 초부터 박태선의 심경에 급격한 변화가 생겨 공공연하게 강단에서 자신이 이 땅 위에 오신 5,798세까지의 새 하나님이며 예수는 99%가 거짓이고 크리스마스날은 마귀날이므로 폐지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때 삭발령까지 내렸는데 그 이유는 모발에 마귀가 붙어 있다며 부부별거, 이혼 명령까지 내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 하나님을 자처하는 박태선이 성경까지 없애도록 지시하는 등 개인 우상화에 몰두하자 신도들이 속속 이탈하여 100만을 헤아린다던 신도수가 1990년 2월 7일 박태선이 사망할 당시  약 2천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몰락했다.
 
3. 교주 문선명
 
문선명은 통일교의 재림주요 메시야이며 교주이다. 그는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 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문용명(文龍明)이 었으나, 1955년 "혼음파동" 이후 1964년 8월 11일 서울 민사지방 법원 판결을 통해 문선명으로 개 명하였다.
 
문교주의 형 문용수는 문교주의나이 열다섯살 때 정신병으로 사망을 하였고, 둘째 누이도 미 쳐 버려 그 일가가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7세때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934년 봄 15세때 평북 정주 오산 보통학교 3년에 편입하여 1년간 다니다가 1935년 4월 에 정주 공립심상 소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여 1938년 봄에 소학교를 마쳤으니 그 때 문교주의 아니 19세였다.
소학교를 마친 해 봄에 상경하여 흑석동에서 하숙하면서 경성 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했다.
문선명은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아서 눈에 띄는 모든 사물에 관심이 많았고 모험성이 강한 소년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던지 생각과 동시에 실천에 옮기는 성미로서 한번 손을 대면 끝까지 결말을 보는 무서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문선명은 16세때 정주 공립심상 소학교 시절부 터 교회의 유년주일학교 반사로서 어린이들을 지도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남달리 광신적이라고 할 만큼 열렬한 신앙생활을 열망해왔던 문선명을 학교생활보다는 교회생활에 더 열심이었고 자기 방식대로 성경을 연구하고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가지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1936년 4월 17일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 부활절 아침에 문선명이 기도하는 중에 홀연히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 에게 인류구원사업의 소명이요 공식하명이라고 통일교에서 지칭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계시를 통 해 주었다고 한다. 문선명은 예수님의 공식하명을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대가 아니고는 이 중대한 책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거듭 당부하면서 "큰 사명"을 맡겼다는 것이다.
 
통일교의 원리강론 17페이지에 보면 "하나님은 이 땅위에 인생과 우주의 모든 근본 문제를 해결 하시기 위하여 문선생을 보내셨으니 이 분은 수십 성상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황망한 무형세계를 헤매시면서 혈혈단신으로 영계와 육계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하는 가운데 모든 천계의 비밀을 밝혀낸 것이다"라고 문선명을 신격화하고 있다. 문선명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철저한 소명감에 불타 올랐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등 보통 학교를 마친 후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며 졸업했다고 하나 일 본 [매일신문]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와세다 대학 졸업생 명단에는 문선명이란 이름이 빠져있는 것을 보면 중퇴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1943년 말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문선명은 1945년 10월 이스라엘 수도원 원장인 김백문으로부 터 약6개월간 성경공부를 한 후, 1946년 6월 6일 월북하여 평양에 광해교회를 세우고 광신적인 신비주의 운동을 편다. 그는 북한에서 1946년 8월 사회질서 혼란혐의로 구속이 되었다가 3개월 만에 석방이 되었으며, 다시 간음혐의로 1948년 2월 22일 구속되어 5년형을 받는다. 그러다 1950 년 6.25 동란으로 그해 10월 14일 국군이 흥남형무소를 점령하므로써 다른 죄수들과 함께 석방이 되어 부산으로 내려온다. 그는 부산에서 그를 따르는 신도 김원필, 박종화 등과 함께 1951년 1월 27일부터 범일동, 수정동, 영도 등지에서 통일교회를 창설하여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그 독특한 신 비주의 운동으로 부산지방 인근교회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54년 5월 1일에 서울에 올라 온 그는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의 초가집에 통일교회라는 간판 을 걸고 전 협회장 유효원과 함께 전도활동을 시작한다. 12월 31일엔 성화기독학생회를 조직하 고, 1955년 1월 17일엔 북학동에서 성동구 흥인동 241의 14로 이전하여 동년 3월 27일엔 기관지 [성화]를 창간하게 된다. 바로 이해 5월 11일을 전후하여 이화여자 대학교 교수 5명과 학생 14 명, 연대생 3명이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교 처분을 당하는데, 그 이유는 말썽 많은 문선명 집단에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1955년 10월 7일 지금의 용산구 청파동 1가 71의 3으로 본부를 이전하고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1960년 3월 41세때 네 번째의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신 부는 복귀섭리에 가장 알맞은 당시 18세의 아리따운 성정여고에 다니는 한학자였다. 이것을 통 일교회에서는 "어린양 잔치"(The Feast of the Lamb)고 부르고 있으며 한학자를 "우주의 어머니", "참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학자가 낳은 자녀들을 통일교회에서는 "죄없는 자녀"라고 부른 다.
통일교에서는 문선명을 신격화시키며 그를 재림주로 묘사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그것을 부 인하고 있지만 통일교 내부에서는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있다. 통일교의 제2인자이며 한국 문 화재단 총재인 박보희는 문선명을 분명히 재림주라고 말한다. "미국 등 외국에서는 재림주로 알 아주는 문을 조국인 한국에서는 오히려 몰라주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세계일보사 사장인 곽정환은 재림주는 동방의 한국에 여인의 몸을 입고 오는데,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재림주는 1918년에서 193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간접적으로 문선명이 한 국사람으로 1920년생이니까 재림주라는 것이다.
 
이처럼 통일교는 문선명을 선지자요 예언자요 참 아버지, 메시야, 재림주로 믿고 있는데, 그러나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은 동방의 의인이요, 감람 나무라고 자처한 전도관의 박태선이나 자칭 예언자라고 한 몰몬교의 요셉 스미스, 안식교의 윌리 암 밀러, 크리스천 싸이언스의 에디 부인,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 럿셀 등과 같이 하나님을 배역 한 자요, 기독교의 암적 존재요,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이다.
 
4. 안상홍, 장길자는 누구인가?
 
  안상홍은 1918년 1월 13일 전북 장수군 개남면에서 출생했다. 1937년에 일본에 건너갔다가 1946년 10월에 귀국하여 이듬해인 1947년 7월에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안상홍증인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침례를 인천 낙섬에서 1948년 12월 16일 이명덕 목사에게 받았다.  1953년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고 하는 안상홍은 1956년에 10년 안에 예수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안식교 목사의 설교에 반박하는 간증문을 통해 초대교회의 진리가 자신을 통해서 회복될 것임을 지시받았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그를 추종하는 23명 신자들과 함께 안식교를 탈퇴하고 1964년 4월 28일 부산에서 하나님의교회예수증인회를 창립하고 교회를 설립해 나갔다.  그리고 교주 안상홍은 1985년 2월 25일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안상홍을 재림주로 믿고 있다. 1985년 3월 22일 본부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고 6월 2일 교회 명칭을 하나님의교회 안상홍증인회로 개칭하였으며 서울 관악구 봉천7동에 자리잡고 있다.
 
장길자(1943년 10월 29일생)라는 여인은 안상홍이 죽은 후에 여교주 노릇을 하며 안상홍증인회를 이끌고 있다. 장길자는 남편 김재훈과 함께 안상홍증인회의 집사였으나 그 후 김재훈과 이혼하고 안상홍의 신부로 자처하고 있다. 장길자는 자신을 어린양의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어머니등으로 주장하며 이 단체의 교주가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5. 신천지교회의 이만희 씨는 누구인가?
 
신천지교회에서 발간한 책 『영핵』과 각종 자료에 기술된 이만희 씨의 이력과 신비체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31년 9월 15일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 702번지에서 아버지 이재문 씨와 어머니 고상금 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 씨는 그의 조부가 꿈을 꾸었는데 해, 달, 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진후 다시 하늘이 열리더니 빛이 나와 그의 어머니에게 비추는 것을 보고 손자의 이름을 萬(만)熙(희) 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17세때 성동구 금호동 형의 집에서 기거하며 건축업에 관여하게 되었고 어느날 집 앞에 사는 전도사에게 이끌려 경북궁 앞 천막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후 고향에 내려가 풍각장로교회에 출석하며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1957년 집에서 『박군의 심정』과 『학생문장독본』이라는 서적을 탐독한 후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집뒤 들판에서 하늘을 향해 눈을 뜨고 기도 하던중 별이 머리 위만큼 내려와 헬리콥터같이 돌고 있어 이에 놀라 취침중인 부친을 깨웠고 그날 이후 별들은 3년이나 같은 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후 집안에 환란이 와 자살을 결심, 산으로 가던 중 환상을 봤는데 하얀 옷차림의 건강한 사내가 나타나 “오늘부터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를 따르라.”고 외쳐 자살을 포기하고 그 길로 하산했다고 한다.
 
그때 이 씨는 냇가에 소를 끌고가 신비 체험을 했다고 하는데 고기를 잡고 싶어 삽을 가지고 물살을 막으려는데 그 순간 물이 멎고 하류의 저수지 물이 몽땅 증발하여 고기떼가 팔딱거리며 노출되었다. 이때 꿈인지 생시인지 멍하니 서 있는데 어디선가 40대 한 여자와 10대 미만으로 보이는 7명이 나타나 물통에 고기를 담아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고 한다.
 
이만희 씨는 그후 다시 서울로 상경해 18세 어린종 유재열 씨 집회에 참석해 성경을 읽고 “진리를 찾아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유재열의 장막성전과 인연을 맺게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유재열 씨의 장막성전을 추종하던 이 씨는 67년 2월 재산을 다 털리고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서 이탈했다. 1971년 9월 7일에는 40개 항목의 혐의로 유재열 씨와 김창도 씨를 고소해 법정에 세우기도 했으며 백만봉 씨의 솔로몬재창조교회의 12사도 조직의 하나로 있다가 이탈하여 한때는 고 탁명환 소장이 이단 이탈자들을 위해 설립했던 국종제일교회에 잠시 출석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 씨는 1980년 3월 14일 그를 따르는 세력을 규합해 안양에 현재의 신천지중앙교회를 설립했다. 장막성전에서 이탈한 사람들 중 이 씨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씨를 가리켜 ‘한비천’이라고 하는데 이는 멸망의 아들이라는 말로 이 씨가 장막성전에서 영명조차 없이 일개 일꾼으로 비천하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씨는 유재열 씨를 비판하다 유씨 측에 의해 명예훼손혐의로 고발돼 1980년 10월 성북 구치소에 98일간 수감되는 등 3년 6개월간 집행유예 기간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 씨는 3년 6개월의 형기가 요한계시록 11장 11절의 ‘3일 반’과 ‘다니엘 7장 25절’의 한 때, 두 때, 반 때를 뜻한다며 자신이 증거의 실상이라고 주장한다. 신천지교회에서 출간된 『신탄』에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마침내 장막성전은 삼켜버린 멸망의 아들 모씨와 나라를 넘겨준 첫 장막의 치리자는 두 증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증거의 서한을 보내지 못하도록 조처한다. 그들의 묘책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두 증인을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죄인으로 몰아 붙이고 법정에 고소한 것이다. 장막성전의 간판을 내리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해낸 모씨를 에덴동산의 뱀이라고 한 사건이나 어린종 삼손을 언약을 파한 배도자로, 뱀의 꼬리로 몰아 붙였다는 것 등을 내세워 검찰에 고발한 것이다. 그 결과 두 증인인 이만희 선생님과 홍종효 선생의 어이없는 옥살이가 시작되었고 전쟁을 일으킨 짐승들은 승전고를 올리게 된 것이다. 재판결과 선고 유예로 풀려났다.”

이만희 씨의 저서로는 『천국비밀-계시록의 진상』 『계시록의 실상』 『계시록의 완전해설』 『계시록의 진상』 2권 『성도와 천국』 1.2.3.4.5권 『계시록 완전해설도』 『종교세계의 관심사』 『신천지 소식』 『기독소식』 『감추었던 만나』가 있으며 도서출판 신천지에서 발행한 김건남·김병희 공저 『神 誕』이라는 교리서도 있다. 이중 계시록과 관련된 출판물은 청계산 내의 장막성전과 그계열을 요한계시록의 축소판으로 보고 흩어진 신도들을 대상으로 불러모으려는 내용이고 『신탄』은 이만희 씨를 신격화한 내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탄』의 내용이 통일교에서 이탈한 변찬린의 『성경 의 원리』와 유사함은 물론 통일교의 원리강론과 흡사하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을 실패자로 보고, 부활을 불교의 윤회로 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6. 이초석 목사는 누구인가
 
이초석은 1951년 11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이 춘석이다. 「현대 종교」에 실렸던 그의 이력서에 따르면 1969년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1972년 고려대 결영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현대 종교」의 박형성기자는 대학을 3년만에 졸업할 수 없다는 것과 고려대 졸업생명부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초석의 고려대 졸업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후 이초석은 빌딩 임대업체인 대풍산업 대표이사를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세상적인 향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이초석은 친구의 전도와 부인 김모애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 입학하여 1984년 2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정통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해 9월에는 경기도 광명시에 예루살렘 교회를 개척했으며 12월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S측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교회를 인천 직할시 남구 숭의동에 있는 전도관 자리로 이전하고 한국 예루살렘 교회라고 불렀다. 이 교회는 창립 3년이 지난 1988년에 출석인원 5천여명, 6년이 된 1991년에는 1만여명으로 급성장을 했다.
 
  또한 이초석은 1985년 초석 예수 전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으며 현재는 이것을 땅끝 예수 전도단이라 부른다. 이 전도단은 문서전도를 하는 동시에 세계 31개국 5만여명에게 매월 10만여개의 설교 테이프를 보내고 있으며 이초석목사를 강사로 잠실 학생 체육관과 올림픽 역도 경기장 등에서 집회를 개최한다.
 
  한편 이초석은 튼튼한 재력을 바탕으로 인복유치원, 인복여자 실업학교, 선교 총회신학교등 교육사업과 장성 예루살렘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일보에 "길"이란 고정 칼럼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이초석목사는 목회, 전도집회, 기도원 및 학교운영, 집필 등 다방면에 걸쳐 의욕적으로 팔동하고 있다.

7. 김기동 목사
 
김기동 목사는 1938년 6월 25일 충남 서산에서 출생하여 예산농고를 거쳐 명지대학교와 대한신학교, 총회신학교, 대한신학교 대학원 및 침례회 신학대학 목회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 Sweetwater Bible College와 Luther Rice Seminary(신학석사)를 마쳤다.
1957년 10월 예산 감리교회에 입교한 다음날, 김형태전도사(당시)가 이웃 교회에서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중, 강단에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환상은 오늘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1963년 7월 충남 예산 부근 비봉 감리교회에서 평신도로 목회하던 중 침례교 목사를 강사로 한 부흥회에서 120여 명의 감리교인에게 침례를 줌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965년 3월에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예수교 성경 장로교회 성락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66년 8월 11일에는 국제독립선교회 하나님의 성회에서 독립선교회의 규정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9년 8월, 침례회 연맹에 지교회 설립 신청을 하고, 서울 신남동에서 신개척
1971년에 영등포구 신길3 동으로 이사했으나 신앙문제로 인하여 인준이 지연되다가
1973년 5월 31일에야 한국 침례회 연맹에서 인준을 받았다. 그는 또
1978년 10월에 베뢰아아카데미를 설립하였는데 그 본과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3동 기독교 한국 침례회 성락교회 안에 설치되었었다.
 
그러나 1985년 그의 추종자이던 한만영과 성락 교회 안의 영동일반 연구과에서 그를 따라 모여들었던 신도들이 함께 모여 그레이스 아카데미를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28 주택은행 신사동지점 4층에 설립하였으며, 여기에 개최한 부활의 교회에는 마산 신혜원〔산혜원〕장로교회 목사였으며 같은 계열인 "드로아"의 창설자인 이태화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김기동 목사는 1987년, 기독교 한국 침례회 제77차 연차총회에서 이단시비기 일자 동 9월 30일 총회 현장에서 교단을 탈퇴하고 후에 그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남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8. 정명석
 
1945년 충남 금산에서 정팔성의 4남 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 진학을 포기하고 용문산 기도원에서 20년간 있으면서 그의 젊음을 보냈다. 17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은사와 사명을 받앗다고 한다. (요셉이 17세에 애굽에 팔림과 연관시킴.)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작정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산하여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라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입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 소속 기관인 '국제승공연합회'강사요원으로 반공 활동과 통일교 포교활동을 2년간 하였다. 그는 1980년 통일교를 떠나 몇몇 추종자들과 함게 서울 신촌에서 선교회를 만들어 대학생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벌여 드디어 애천교를 조직하였다.
 
 82년 5월에 강남구 삼성동130-1에 빌딩5층을 세내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 애천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신학교에 다닌 바도 없지만 83년 11월 26일에 예장 감리회 웨슬레 신학교측에 의해 자신의 추종자 김시희, 안구현, 서인순, 김형만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되어 예감 웨슬레측 총회임원으로 활동을 했다.
 
 애천교회가 이단으로 종교잡지에 고발되자 천성교회, 명성교회, 영동교회 등으로 바꾸어가며 예수교 대한 감리회 교단 간판을 내걸고 기성교인들을 미혹하다가 낙성대 감리교회(현재는 신촌, 창동, 성내 등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다.)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고 한다. 86년 경에는 전국 50여개 대학에 자신의 이름 명석의 영문 첫 자를 따서 M.S(Morning Star)서클을 마들어 등록하고 교도소와 직장에서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87년에 전국 작은 도시까지 지도자를 파송하여 중.고.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포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9. 이재록 목사
 
이재록 목사는 1943년, 전남 무안에서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3세때 전남 장성군의 분향리로 이주했고 한학자였던 부친 덕분에 별 어려움이 없이 성장하여 대학까지 진학하였다. 한때 입시에 실패, 자살소동도 벌였고 미리 물려받은 재산을 사기당해 날리기도 했다. 결혼 후 신문사에 취직해 친구들을 초청해 한턱을 내는 잔치를 벌렸다가 과음을 하는 바람에 건강을 해쳐 7년동안 자리에 눕는 폐인이 되었다. 1972년이었는데 가진 병명을 나열하면 위궤양, 식욕부진, 체중감소, 신경성 노이로제, 심한 두통, 악성 빈혈, 축농증, 중이염, 동상, 무좀, 습진, 온몸의 피부염, 목의 임파선 염, 관절염 등이었다고 한다.
 
1974년 4월에 둘째 누나와 함께 현신애 권사 제단에 갔다가 그 병이 몽땅 치료되었고 아내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신앙과 상관없는 병 고침이었다. 1974년 11월에 금호동성결교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신앙적인 도전을 받았고 확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가계를 꾸려 나갔고 기도생활을 쉬지 않았다. 그후 만화가게를 운영하였다. 1978년 5월,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만세 전에 택한 종아! 내가 너를 3년 연단하였으니, 3년 말씀을 준비하라…. 3년 말씀을 무장하고 나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다니며 기적과 이적을 행하리라."
 
이듬해에 성결교신학교(연합)에 입학했다. 다른 시험은 모두 백지를 내고 성경은 100점 맞았다. 그 해 6월 마지막 주의 철야기도가 끝나는 날 새벽 4시에 마지막 때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1980년의 겨울 방학 때는 40일 금식기도를 했는데 기도 중  "사랑하는 종아, 성경 찬송 외에 인간이 쓴 책을 일체 보지 마라"
는 지시를 받았고 금식이 끝난 후에는 성경 66권을 풀이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82년 5월부터 만민교회의 개척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의 아내가 전도한 한정애라는 여자가 교회에 등록한지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음성을 들었다고 상담하러 왔다. 하나님이 그녀를 대언자로 보내 주셨다. 그 해 6월, 그러니까 신학교 4학년때 '대언의 말씀'으로 인해 이단시비가 생겼고 제명의 위기까지 몰렸다.

1983년 2월 24일에 신학교를 졸업했고 5월부터는 성경난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요한이 밧모섬에서 오직 하나님과 교통하며 계시를 받았던 것처럼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받기 시작했다. 1984년 5월에는 강원도의 백양리에서 천국계시를 받았고, 198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0. 이뢰자(이유성)
 
`여호와 새일교단 창설자 이뢰자는 본명은 이유성으로 1915 년 11월 4일 황해도 신계군 촌면 사현리(공촌)라는 동네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에  출생하였다. 그는 출생한지 1주일 만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빈곤한 생활 가운데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으나 그는 곡산에서 7년간 한문 수학을 하던중 15세에 이르러 인생종말과 죽음의 공포에 떨게 될 정도로 조숙했었고 인생문제에 대해 생각을 했다. 17세때 30리밖에 있는 교회에 찾아가 성경을 한권 얻어 가지고 와서 읽던 중 예수를 믿게 되었고 요한복음에 대해 탐독을 하게 되었다. 한문 서당에서 한문밖에 배우지 못한 이유성은 일제 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핍박을 받아 옥고로 목회자가 부족하던 시기를 맞던 시기인 19세 때에 황해도에서 처음으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게 되었고 집사직을 맡아 전도인으로 일 하다가 1946년 4월 26일 38선을 넘어 월남하여 강원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개척교회를 세웠고  6.25동란 후에 어떤 미국 선교사의 소개로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 전수과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에  중퇴하였다.
 
그후 1955년 12월 27일부터 9일간에 걸쳐 강원도 대한수도원에서 기도할 때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듣고 계신 환상을 보여주며 불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인 1957년 5월에 생수체험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3월 기도하는 중에 요한계시록 4:1-14까지의 해석을 세 번이나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근본으로 삼고 있는 《말세의 비밀》이란  책이다. 즉 그가 고려신학교를 중퇴하고 본격적인 이단을 걷게 된 배경과 시발점이다. 이는 여름방학을 맞아 더욱 잘 믿고 성령충만을 받고자 입산기도하던 중 마음에 뜨거운 중생의 체험을 느끼고 기독교 종말관과 계시록을 깨닫게 되어 모든 선지의 비밀을 계시록에 비추어 통달하게 되므로 고려신학교 3년을 중퇴하고 교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다.
 
1958년 5월 충남 부여군 세도면 세도교회(독립침례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1961년 11월 목사 안수를 받고 1964년 9월 24일 계룡산 신도안의 상봉에 새일수도원을 세우기 직전인 1964년 여름에 계룡산 숫용추에서 천막을 치고 부흥회등 각종 집회를 가진 사실이 있다. 그러나 독단적인 행보를 가지게 되는데, 그 계기는 이렇다. 계룡산 숫용추 집회시에 비가  억수로 쏟아져 모든  물건과 천막이 물에 떠내려 가고 모든 사람들은  산으로 피하여 다행히 인명의 피해는 없었으나 집회는 중단되었다. 이 즈음 교주 이유성과 불미스런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여인들이  주최측에 사실을 고백하므로 이유성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 하며 스캔들의 뉘우침이 없자  주최측에서는 이유성과의 관계를 청산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유성은 계룡산에 새일수도원을 건축하고,  1963년 9월 24일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었다면서  그 이름을 "우뢰의 아들"이라 개명하고, 1964년 9월 24일 짖기 시작한 수도원을 대구에 있는 김모 권사가 250만원을 내놓아 1965년 5월 15일 헌당식을 갖게 된다. `말세의 종`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이유성 목사는 정력적인 남성으로서 반공사상을 강조하면서 계시록 중심의 계시 신비에 열중했다. 활동하다가 1972년 8월 2일 새일수도원 옆 개울에서 목욕하다 익사하는 단죄를 당하였다.
 
시체를 놓고 강경파인 이유성의 부인등은, 5년 전부터 내가 죽으면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5일간이나 기다렸다. 뜨거운 여름 악취를 견디지 못한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개입하여 시체를 매장하였고, 이후부터 새일교회의 정통파과 개혁파로 양분되었다.
 
11. 김민석(에덴문화 연구원)
 
교주 김민석(金旼奭)의 본명은 김윤렬(金允烈)로 1934년 4월20일 (음력3월18일) 축시(丑時)에 부친 김태순(金太順)과 모친 유정애(劉正愛)사이에서 5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면 신양리에서 태어난 교주 김 민석은 최종 학력이 고려대학교 졸업이라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설악산 신흥사 주지1년, 불국사 총무 2년. 해인사 교무2년의 경력을 가졌다고 본인은 주장하고 있다.

현 주소지는 강서구 화곡동 57-107호이며, 서울 성동구 사근동 125번지라는 다른 주소도 있다. 1960년 3월1일 교주는 설악산 신흥사 주지시절에 입산하여 비선대에서 300일간 기도생활을 했는데 3백일째 되는 마지막 날에 하늘로부터 민석(旼奭)이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기도중에 '민석아!'하는 공중의 소리에 윤렬이란 이름의 교주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므로 대답을 않고 있었더니 다시 '민석아!'하는 재차 부름에 혹시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고 다시 세 번째 '민석아'라는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나기에 무조건 예! 라고 공포에 질린채 큰 소리로 대답하면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찬란한 태양이 몰려 오는 것 같더니 그만 입속으로 태양이 들어오기에 먹어 삼켰더니 온 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완전히 무아경(無我境)에 빠졌다.
 
민석이란 이름을 받은 후 해인사 뒤에 기도원을 마련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성서를 내라고 했을 때 어떻게 감히 성서라는 이름을 붙일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서 처음에는 민석복음으로 책을 낼까 했으나 1974년 민석성서로 냈다. 민석성서는 일어판, 영문판도 내고 각국 원수 및 언론기관 종교단체에도 배포했다. 교주가 민석성서를 전 세계 대통령 수상 및 언론기관에 보내자 지미카터 대통령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12. 양도천(세계일가공회)
 
세계일가공회의 공식적 명칭은 1969년 6월 13일에 양도천가 명명한 것으로써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집공회"라고 하였다. 그는 1965년 3월 1일에 서울삼일당에서 하나님의 집공회의 창설을 선포했고, 계룡산 성도봉아래 삼신당에서 발족하였다. 그 이전에는 양도천가 1964년 3월 1일 관악산 벧엘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중에 신적 환상을 보고서 "하나님의 집"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그는 "우주는 신의 집이요, 신은 부모요, 그의 자녀는 인류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계일가공회의 핵심원리이다. 자세한 비판은 후론하겠지만, 세계일가공회의 원리는 문선명에 의한 통일교의 원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것은 양자가 세계의 통일을 지상목표로 삼는 점이요, 혈연적 권속화를 시도하는 것 등이다.
 
이상에서 보는대로 양도천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돌연변이가 1964년이후 부터이다. 그것은 자신이 세계적인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그러나 양도천은 그의 신앙인격 형성과정에 있어서 오래전부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신오동에서 1924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주군 운전장로교회의 집사였다. 그러므로 양도천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을 따라서 교회를 다녔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암송하는데 특출하였다고 한다. 특별히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탐독하고, 외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영적세계의 실제성을 갈망하였고, 깊은 영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환언하면 양도천은 십대에 벌써 광적인 신비주의에 감염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또한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면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신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양도천 역시 그 중에 예외자는 아니다.
 
그는 1946년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월남하였기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 성결교신학교에 편입하였다. 그 리고 6.25동란이 일어난 1950년 5월 23일에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한국교회와 국가가 과도기였을 때에 신학을 하였기 때문에 충실한 사명자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치명상이었고,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지를 물색하던 중에 전남 무안군의 도서지방을 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8월 3일 전남 신안군 지도면 중동리 성결교회의 전도사로 일을 하였다. 당시에 함께 동역을 했던 문중경 여자 전도사가 있었다. 그는 그 여자를 신앙의 어머니로 삼었다고 한다. 물론 양도천은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고독하였을 것이며, 모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교회안에서의 청년 전도사가 신앙의 어머니를 삼고 교역을 한다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다. 실로 양도천을 추종하는 무리 가운데는 부녀자들이 많다. 그것은 그에게서 어떤 신비적인 매력을 느낀 까닭이다.
 
즉 그의 금욕주의와 독신주의가 주는 상대적인 신앙의 환상 때문이다. 양도천은 비록 자신은 중생의 체험을 했으나 여전히 자기의 내심은 명예, 물욕, 그리고 이성에 사로잡혀 있어 "성결"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항상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2년 11월 11일 신안군 지도면 방축리 도덕도라는 섬에 오두막을 짓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죄적 요소를 없애 버릴려고 했다. 그는 성적 욕구를 제거하기 위해 그해에 자신의 성기의 일부 를 거세하였다. 다시 말하면 양도천은 스스로 고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결은 자신적 노력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에 있는 것이다. 즉 성령의 도움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도천은 자신적 행위로써 극복하려고 했다. 이미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신앙보다는 신과 자신의 합일의 경지에서 오는 자신적 확신과 화답으로써 신앙생활을 영유하였다.
 
그는 1952년 11월 30일 새벽 5시에 영음이 들려오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는 성경에 있는대로 대답을 하고(요 21:15-17), 자신적 사명을 가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기도처소에서 머리를 바위에 대고 기도했던 자리에 태극의 표시가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했다. 이것은 그의 세계적 사명의 증거라고 하였다. 이미 양도천은 자신의 절대화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도덕도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서 자아의 초월을 시도하였다.
 
그후 그의 나이 30세 때에 그는 1953년 4월 26일 성결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부터 양도천은 기독교회의 부흥사로서 등장하였고, 흑석동 벧엘교회 에서 목회를 하였다.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은 자신적 문제가 있으면 금식기도를 하는 습관이있다. 그는 그의 기도처인 도덕도에서 40일간 기도를 하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줄기의 신적내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가 1953년 6월 13일이었다. 즉 그의 한손에 신적권능이 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노래를 읊었다. "호렙산 올라간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 들림같이 황폐한 이 강산 내나라 위하여 내 손에 주권능 들리셨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것처럼 양도천은 자신이 우리 민족의 영적 지도자로써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민족인 사명이란 일종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우리 민족의 선민의식 고취였다. 이것은 양도천 뿐만 아니라 똑같은 계룡산 계통의 여호와 새일교의 이뢰자 역시 자신은 우리 민족의 새사명자이며 우리나라는 신이 택한 나라라고 했다.
 
그밖에 통일교의 문선명도, 전도관의 박태선도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은 주장을 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민족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구약적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같은 신적사명을 오늘에 반복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어떤 개인이나 지역, 그리고 민족에게 국한하여 역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은 벌써 과격한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 버렸다. 그는 1964년 3월 1일에 관악산 벧엘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중에 신적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집"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에 계룡산에 입산하여 그곳이 자신의 민족적 사명의 본산지로 간주했다. 즉 계룡산과 신도안이 신의 시대적인 섭리가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용문산 운동과 나운몽씨 계통은 용문산이야말로 성산이며 신의 뜻이 실현되는 원산지로 본다. 물론 계룡산과 용문산 그리고 그밖에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산을 신성시하고 그곳을 신의 택지로 보며 그곳만이 신의 계시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동양의 미신적 사고이며 하나님을 산신령적 존재로 보는 경향인 것이다. 양도천은 결국 기독교회에서 이탈하였고, 그가 속해 있었던 성결교회는 그를 제명처분 하였다.
그는 1969년 6월 13일에 소위 세계일가공회를 창설했다. 양도천과 세계일가공회는 기독교, 유교, 불교, 그리고 동학교 등을 혼합한 하나의 혼합주의이다. 계룡산의 양도천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과 인과 그리고 물의 통일을 주장한다. 이것이 "한님의 사상"이다. 그는 말하기를 본래 신인물이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 가정, 국가, 세계, 그리고 우주적인 발전적인 단계를 통한 하나의 통일이다. 이것이 일가제도이며, 한님이 다스리는 일주정치이다. 그리고 이 통일을 위해서 세워진 기구
가 바로 세계일가공회요, 또한 세계일가공회를 통해서만이 통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통일의 종교적 범신론이요, 혼합주의이며 인본주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일대 이단자인 양도천을 중심한 하나의 세계, 하나의 종교는 실현불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후 양도천은 1970년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한국종교인 친목회"를 계룡산 기슭에서 가졌다. 그 당시의 결의문을 보면 "...국조단군의 경신사상과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의 건국이념을 계승하며 (중략) 한민족이 하나의 세계건설의 사명이 있음을 확신한다. 우리는 진리가 하나님과 인류가 한 형제임을 믿어 종교민족국가의 차별이 없이 한 가족을 이루어 통일된 이상세계 건설을 기한다."
 
결국 이것은 모든 종교를 세계일가공회의 산하에 두고, 그것들을 흡수하려는 술책밖에 다른 것은 없다. 그리고 그때에 모인 종교들이란 대부분이 계룡산에 기생하고 있는 이단종파들이었으며 그들의 모인 상황을 연상하면 마치 이단종파들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13. 여목사 xxx
 
 'XXX 목사 자칭 하나님說' 파문
                                                     이탈자와 신목사 측 '사이비 목사다' '아니다' 대립
                                             “XXX 목사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릴 위험한 인물”
                                                 “성도들을 미혹해 돈을 갈취하는 사이비 목사”
                 일부 교계언론과 인사들은 이탈자들의 주장을 허위사실 수준으로 일축하며 신 목사 변호에 나서

 

<이 기사는 주간 <교회와신앙>2003년 1월 8일자 보도입니다> 정윤석 기자

 

한국기독교복음단체총연합 여성총본부장 등 기독교계 각  기관의 요직을 맡으며 교계 언론 홍보 기사 및 광고 등을 통해 유명 부흥사로 선전돼 온 xxx 목사(43·부산 수가성세계선교교회 담임·사진)와 관련해 월간 <현대종교>가 폭로한 ‘자칭 하나님설’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현대종교>는 2002년 12월호  기사에서 수가성세계선교교회(수가성)에서  활동하다가 빠져나온 17명의 이탈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신 목사가 ‘하나님’으로 자처하며 교인들의  죄를 사해 준다는 명목으로 대가성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이비적 행각을 자행했다고 폭로했다.

신 목사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이탈한 김홍연 전도사(46)는 “신XX 목사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릴 위험한 인물”이라며 “성도들을 미혹해 돈을 갈취하는 사이비 목사”라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친 X현X 성향을 보이는 일부 교계언론과 인사들은 이탈자들의 주장을 허위사실 수준으로 일축하며 신 목사 변호에 나서고 있어 파문이 커지고 있다.

교계 B, C 신문 등은 수가성 이탈자들에  대해 “폭력전과 내지는 사기전과가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며 “거짓 사실을 현대종교에  제보해 (수가성 교회)성도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신 목사 자칭 하나님설’에 대해서도 수가성측의 말을 인용 “이탈자들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말”이라고 주장했다.

신 목사의 ‘자칭 하나님설’  파문은 부흥사계에도 번져가고  있다. 국민비전부흥사협의회(총재 피종진 목사)는 앞으로  게재할 교계 신문  광고에 ‘신 목사의 사진을  빼느냐 넣느냐’하는 문제로 한차례 격론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L, K 목사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는 여자와 내 얼굴이 함께 나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신 목사를 뺄 것을 요구했지만 피종진 목사가 반대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신 목사 파문’은 법정공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탈자 대표인  김홍연 전도사는 “C신문이 나를 폭력전과자라고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며 “국민일보를 비롯한 교계신문에 사과 광고를 게재하지 않으면 법정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탈자 17명은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에 신 목사를 사이비 목사라며 철저한 조사와 구속 수사를 해 달라고 진정한 상태다. 이에 따라 현재  부산 남부경찰서가 이 건을 수사중이다. 수가성측 또한 이탈자들과 <현대종교>를 대상으로  법정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종교>는 신 목사의 ‘자칭 하나님설’ 외에 또 다른 문제점들을 계속해서  폭로할 예정이다.

한편 신 목사가 2001년 5월  15일 수가성세계선교교회에서 A목사와 면담하며  “나는 성령 하나님으로 와서 이 세상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역사한다”고 발언한 내용이 담긴  테이프가 본사에 입수되어 ‘신 목사 자칭 하나님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어 이에 관한 신 목사측의 해명 등 교계의 반응이 주목되고 있다.

이 테이프는 ‘수가성’을 이탈한 A 목사가 신 목사와 2001년 5월 15일 ‘수가성’에서 상담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 목사는 당시  A 목사에게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오라가라 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영이다 △마리아가 간음해서 예수님을 낳았다 △나는 성령 하나님으로 와서 이 세상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역사한다는 등의 황당한 발언을 했다. 이탈자 대표인 김홍연 전도사도 테이프 발언 내용에 대해 “신 목사가 말해왔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수가성측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한다는 박석권 목사는 테이프 내용에 대해 “신 목사와 거의 매일 동행하지만 그런 말을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다”며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A목사-XXX 목사 상담 녹취록

 

“내가 하나님의 영이었더라”

 

A 목사: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은 항상 한 시대에 한 번씩 역사를 한 겁니까?

XX옥 목사: 지도자로 계시고 똑같이 하나님의 신의 영이 아들의 영속에 들어가요. 그게 뭐냐하면 제자죠. 14만 4천, 일곱 촛대, 그 사람들 속에는  다 똑같은 아버지의 영이 들어가서 역사할 텐데 나가는 농도가 나는 100%,  목사님은 95%, 그러니까 창조주 피조물,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언제든지 아버지 오시옵소서, 가시옵소서, 아버지 이것 보여 주세요, 마세요.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나 외에 사람들은 어떤 때는 역사하고 어떤 때는 역사 안 하고…
아버지 뜻에 합할 때만 역사하고 합하지 않을 때는 역사 안하고, 나는 100% 아버지가 항상 역사하지. 아버지 말이 내 말이고, 내 말이 아버지 말이고. 그게 다르다는 거죠

 

☜XXX목사

A: 그러니까 제가 이해 안 되는 것은 그거거든요. 전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다이렉트로 역사하는 분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신:  그렇죠!). 목사님은 처음에 그것이 들어왔을 때 귀신이라고 생각해서 내 쫓았는데 안 나가더라(신: 예).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의 영이 나한테 들어왔더라.

신: 나한테 들어왔더라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영이었더라.

A: 그런데 그게 목사님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면 거기(다른  신도들을 뜻함: 녹취자 주) 들어갈 필요가 없잖아요.

신: 아니 들어갈 수 있죠. 자, 하나님의  영은 내 속에도 계시고, 누구 속에도 계세요?  아들 속에도 있고, 그러니까 다 들어갈 수 있죠. 나만 독재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나가는 권세가 나를 따를 수가  없지.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나는  대장 하나님, 아들 하나님, 제자 하나님, 선생 하나님, 제자 하나님, 파워가  나는 100%, 언제든지 나는 오십시오, 가십시오, 움직일 수가 있고… 진짜 하나님이라면 내 마음대로 되지.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요. 언제 어느 곳에든지 이것이 그 동안에 많이 감춰졌다가 이제는 확산되는거지.

A: 신학교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예수님은 남자없이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죄가 없으시다고 하는데

신: 그러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죠. 100%, 성경에 써 있잖아요. 다윗의 자손이요,사람의 씨요, 다윗의 혈통이다, 다윗의 자손이  뭐예요, 다윗의 새끼라는 거죠! 사람의 씨가 뭐예요, 사람의 새끼라는 얘기죠. 그리고 다윗의 혈통이라! 피가! 다윗의  피라고.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써 있었어요. …마리아가 누구네 집 맨날 가  있었어요? 세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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