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변명이 용납되지 않는 것 중의 또하나가 세례에 관한 오해가 아닌가 한다.
몇가지 의문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1)세례란 말이 과연 바이블에 있는 단어인가
*헬라어로 세례는 동사로써 밥티죠(Baptizor)임. "물에 잠그다" 또는 "꽉 둘러싸이다" 하는 뜻을 가지고 있음.
*우리 말 세례(洗禮)는 씻는다는 의미
*영어권에서는 성경의 원어를 그대로 차입해서 사용함
2)예수는 왜 세례를 받았는가
*소위 삼위일체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예수가 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까
*예수가 신이 아니고 인간 즉 선지자의 하나라면 해답은 간단하겠으나
神이라 정의했을 때 이경우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사료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3)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왜 없는가?
4)예수는 왜 세례를 베풀지 않았는가
5)세례를 주는 사람의 자격이 있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
*여기서 너희는 열두 제자를 가르키는데
*세례를 줄 수 있는 자격은 불행히도 더이상 언급이 없다.그러나
너희를 광의적으로 해석함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즉 모든 기독교인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봤을 때 일반 기독교인도 세례를 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현재 세례는 목사 또는 신부 등의 전유물로 변해 버려는데
어떤 연유로 그렇게 변해 버렸는가.
6)세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교회에 입교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이미 구원 얻은 사람이 그 징표로써 받는 것이다
*구원 얻는 한 조건의 절대적인 것이다.
그대는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
7)세례 받고 난 뒤 배교(예를 들면 필자)한 경우에 대해 왜 언급이 없는가
8)요한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거라고 했는데 예수 생전에는 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 기록이 없는가
*마태복음 [Matthew] 3장 11절
[개역]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원죄,천국과 지옥,삼위일체 등이 도그마 이듯
세례(침례)역시 人間이 만든 도그마일 뿐이 아닌가...
세례니 침례니
영아 세례가 옳니 그르니
재세례가 맞니 틀리니....
결국 이역시 털파가 되어
이단 삼단 논쟁의 불씨로 자라는 모자일 뿐인데
기독인들은 그 모자를 벗기를
그 오해에서 벗어 나길 왜들 그리 두려워만 하는가...
참고로
기독 신학자들이 세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올리는 것으로
이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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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Martin Luther-1483.11.10-1546.2.18)
Atreatise on Baptism, 1519에서 다음과 같이 세례의 방법에 대하여 결론을 내렸다.
"세례란 희랍어로 밥티스모스((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라틴어로 멜시오(Mersio)이며 그 뜻은 "무엇을 물 속으로 완전히 가라 앉혀서 물이 그것을 덮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여러 곳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하여 침수기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나 가라 앉히는 습관이 없고 다만 침례기에서 물을 떠서 어린 아이들에게 부어 주지만 그러나 본래의 행습이 반드시 시행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타우페(Taufe)"라는 단어의 뜻에 따르면 어린 아이나 혹은 누구든지 세례를 받는 사람은 물 속에 완전히 가라 앉았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세례란 옛사람과 죄 많은 혈과 육으로 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장사되어야 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례는 의미가 한층 더 깊은 것이다"
루터교 역사가인 Mosheim은 "루터와 칼빈이 일어나기 전에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 오! 늘날 화란 침례교인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비밀리에 있었다"고 침수 형식의 세례를 증거했다.
독일의 종교 개혁자이며 루터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서 시행해 온 것은 침수 세례였으며 루터 자신도 세례의 방법에 대하여 물에 완전히 가라 앉았다가 다시 올라 와야한다고 주장했으며 결코 어느 특정한 교파에서만 행하는 세례 형식이거나 그것을 교파명으로까지 사용하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2. 칼빈(Jean Calvin-1509.7.10-1564.5.27)
"초창기의 세례 방법을 회복하는데 반대 작용을 일으키고 있던 신교 종교개혁(The Protestant Reformation)에서의 중요한 영향은 죤 칼빈(John Calvin)의 이론이었다. 칼빈은 세례를 교회안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그리고 유일한 은혜의 수단으로 보았다. 칼빈은 성직권 존중(Sacerdotalism)에 대한 그의 반항적인 태도와 일반적으로 화려한 행열을 동반하는 의식을 반대하는데서 방법은 아무래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의 입장을 다음과 천명하고 있다.
"사람이 완전히 침수되든지 또 세 번 혹은 단번에 세례를 받든지 혹은 물을 그에게 붙든지 아니면 뿌리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들도 이 점에 있어서 나라에 따라 자유롭게 달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세례라는 바로 그 단어(원어)는 잠기는 것을 의미하며 침수례가 초대 교회의 행습이었음은 분명하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Jean Calvin)은 세례의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세례라는 바로 그 단어(원어)는 잠기는 것을 의미하며 침수례가 초대 교회의 행습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3.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1-1581.10.11)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인 쯔빙글리(Huldrych Zwingli)의 세례에 대한 견해를 윌리암 L 럼프킨은 "너희가 세례를 받으므로 물속에 침수될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쳐지는 것이며 너희들이 물속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으로 마땅히 연합되어야 함을 표시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쯔빙글리나 종교회의는 1525년 1월 21일까지는 과격파들이 신도들간에 세례
를 주어서 믿는 자들의 침수례(Believers baptism)를 부활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를 비난하거나 그들을 하나의 종파로 단정하여 탄압하지 않았다"
쯔빙글리(Huldrych Zwingli)는 침수 세례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쳐지고 연합
되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4. 웨슬레(John Wesley, 1703.6.19-1791.5.2)
사무엘 웨슬레 목사의 15째 아들로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의 세례관에 대하여 "로마서 6:3-5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는 말씀은 물에 잠김으로써 세례를 받은 옛 방법을 암시한다"
"" "라는 신약 용어가 물에 잠기는 것을 뜻한다고 밝힌 학자 및 저서들 은 다음과 같다. 16종의 표준 영어사전; 7종의 어원사전; 26종의 백과사전; 20종의 성경사전; 50종의 헬라어 사전(침례교인에 의하여 편찬된 것은 하나도 없음); 45인의 고전 헬라어 저술가;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구브리언, 히폴리터스, 아다나시우스, 구릴, 바실, 암브로스, 크리쏘스톰과 같은 18인의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 처음 6세기 동안 13종의 신약성경 번역; 70명의 저명한 성경 번역가(이중에 3명의 침례교인 포함되어 있음); 35명의 저명한 신학자들; 12명의 고대 침수탕에 대한 권위자들; 14명의 희랍교회 권위자들; 38명의 로마 캐토릭 교회의 권위자들; 15명의 루터교인; 60명의 성공회(영국교회) 학자들; 8명의 감리교 학! 자들; 25명의 장로교인들; 8명의 퀘이커 교도들; 79명의 각종 학자들을 합하여 633명의 학자가 되는데 그 중 침례교인 수는 극히 적으며 중복된 사람도 극히 소수이다"
5. 카톨릭 백과사전
"보통 취해지는 가장 옛 형태는 의심할 여지없이 물에 잠기는 것이었다. 라틴교회에 있어서는 12세기에 이르기까지 물에 잠그는 세례가 일반적이었다. 12세기 이후에도 다른 곳들에서는 이 형태를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은 16세기까지 이르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주후 1311년에 라벤나공회(The Council of Ravenna)가 있기까지 유아 세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불행하게도 대다수의 개신교도들은 로마를 따라 이처럼 성경에서 이탈되고 말았다."
6. 쥬리히 종교회의(The Zurich Council)
1526년 3월 7일 회의에서는 재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벌로서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공포하게 되므로 우리에게도 종파(재세례파)의 행습에 관계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게 되었다. 그 종교회의의 포고에는 "다른 사람을 다시 세례주는 사람은 반드시 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해야 한다"라고 기록되었다.
7.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시기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운동 단체였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성인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재세례파"라는 명칭은 그들을 반대하는 이들이 붙여 준 비난의 명칭이었지만 세례만을 가장 기본적인 논쟁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행 정부가 교회 개혁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그들의 증대되는 확신이었다. 1523년 후반기에 취리히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강력한 논쟁이 있었다. 그 당시 시의회는 신학자들이 믿는 성경에 의하여 요구되는 종교적 변화를 강행할 의사가 거의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취리히의 개혁자인 쯔빙글리는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다. 아니
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독교 공동체가 의회의 입장을 무시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운동을 시작해야 하는가? 쯔빙글리의 과격한 제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했다. 논란이 되는 문제들(미사, 세례, 십일조)을 계속 토론했지만 두 파의 사이의 차이는 더 커졌다.
결국 1525년 1월 21일 완전히 분열하고 말았다.그날 취리히 시의회는 급진주의자들의 모? 緞?그들이 그들의 견해를 퍼뜨리는 것을 금하였다. 그날 저녁 급진주의자들은 Zolikon의 근처 마을에 모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들에게 자비를 나타내시기를 기도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이렇게 해서 현대 최초의 자유교회가 생겨났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법적이었지만 재세례파 운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럽 전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재세례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단지 부분적으로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사라고 생각했다. 재세례파는 조직적인 전도를 위해 유럽을 여러 지역으로 나눈 후 그곳에 두 명 혹은 세 명씩 짝을 지어 파송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당황했고 어떤 이들은 경건하게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다. 1524-25년의 농민전쟁 뒤에 나타난 신비주의와 중세 후기의 금욕주의 그리고 환멸주의는 재세례파의 길을 예비해 준 것들이었다. ! 1520년대 후반기에 재세례파는 멀리 네덜란드, 모라비아, 티롤, 멕클렌부르그 같은 지역에도 존재하였다.
재세례파는 쉴라이타임에서 1527년에는 신교 종교개혁의 최초의 "대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채택된 "형제연합"은 대단히 중요한 문서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유럽 전지역에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재세례파는 그 문서가 명시해 주고 있는 신앙 내용에 동의를 표하게 되었다. 1540년경 전체적 운동의 특징을 드러낸 신앙 단체가 생겼다. 이 신념들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제자도(discipleship)"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내적 경험과 교리의 용납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달은 바대로 제자됨의 결과는 폭 넓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그들은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 가운데 있는 예수의 분명한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참을 말함에 있어서 어떤 단계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두 번째 원리는 사랑의 원리로서 이것은 첫 번째의 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재세례파가 아닌 사람들을 대하? ?데 있어서 그들은 온화함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들의 박해자들에게 대적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강압 정치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사랑의 윤리는 재세례파 공동체 내에서도 상호간에 도움을 주거나 부를 재분배하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모라비아 재세례파는 일부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교회에 대한 재세례파의 신념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단순한 개혁에 흥미가 없었고 활기차고 신앙이 훌륭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회중적인" 견해를 상세히 설명했는데 루터와 쯔빙글리도 개혁 초기에 그러한 경향을 띠었었다. 회중의 모든 구성원은 참된 신자여야 하며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성인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의견 결정은 전 회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한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분리되며 사회가 기독교화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개혁자들은 재세례파가 신교의 설교를 방해하며 그들의 교구! 민 중에서 가장 열심있는 자들을 미혹시킨다는 소식이 퍼지자 크게 놀랐다. 개혁자들은 또한 신앙뿐만 아니라 생활을 강조하는 재세례파의 주장이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재세레파는 그들의 윤리적 가르침이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에 대한 필수적 표현이라고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신교와 카톨릭 양쪽에게 똑같이 재세례파는 위험한 이단인 동시에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 세기의 다음 25년간의 대학살 시기에 수 천명의 재세례파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고, 수천 명 이상의 재세례파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철회함으로써 생명을 건졌다. 재세례파에 대한 당국의 박해는 1530년대 중반에 일어난 뮌스터 반란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듯 했다. 1534년 경 천년왕국을 기대한 일단의 재세례파 신자들이 베스트팔리아에 있는 감독도시 뮌스터를 장악하였다. 주교가 군대를 모아 그 도시를 포위하였을 때 재세례파는 무력으로 그들 자신을 방어하였다. 포위 공격이 계속됨에 따라 보다 더 극단적인 지도자가 통솔하게 되었다. 뮌스터의 ? 低?지도자들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선지자적 권위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윤리가 여전히 적용된다고 주장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일부다처제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뮌스터에서 주장된 많은 주요 원칙들은 교회의 전형적인 주장이었다.
뮌스터 진압의 영향으로 기가 꺾인 낮은 라인 지역의 재세례파는 메노시온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새로운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전에 사제였던 그는 북부 유럽에 흩어져 살던 재세례파의 모임을 찾아다녔고 야간의 설교를 통해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평화주의를 가르쳤다. 다른 재세례파 신자들은 티롤과 모라비아 같은 동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알프스 지역을 따라 동쪽에서 티롤까지 말씀을 전파했던 초기의 선교사는 죄르그 카야곱이었는데 그는 성인으로서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다. 티롤 지역의 카톨릭 당국은 그들을 심하게 박해했으며 많은 재세례파 신자들은 모라비아의 몇몇 예외적인 온건한 군주의 통치 지역으로 피난을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브루터호프라고 불리는 매우 오랫동안 지속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부분! 적으로 그들은 초기 사도 시대의 공동체와 같은 형태를 따르는 데 목적을 두었으나 또한 실제적인 이유도 추구하였다. 그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형제애가 자기 자신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쟈콥 후터의 지도 아래 강화되어진 그들의 단체는 "후터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로는 세 단체가 정리된 공동체로 생존해 갈 수 있었다. 즉 스위스와 남부 독일 지역의 "형제파",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메노파, 모라비아 지역의 후터파이다.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 후손들은 재세례파의 특징 중 많은 부분을 상실하였다. 순수성을 되찾는 가운데 그들은 율법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단순히 생존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들은 복음적 열심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우수한 농부, 선한 사람, "땅의 조용한 사람들"로 알려 졌다. 19세기가 될 때까지도 그들은 부흥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1970 년대에 급속히 성장하였다. 1950년부터 1975년 사이에 메노파의 수가 두 배로 증가하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도수가 48만 명에 달한다. 많은 메노파 신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종교개혁 속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 자들로 만들었던 영적 활동력과 복음적 열정과 급진적인 제자도를 다시 되찾아 줄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