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by 분석가
이제 앞서 언급했던 것들을 요약하고 종합해보도록 하겠다.
1. 올바른 믿음, 진정한 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기독교는 분열과 분쟁의 종교이자 배타적 종교이다.
그 원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가 믿음에 불과하다는 점.
둘째로, 전도를 의무화한 교리.
셋째로, 불신과 의심을 죄라고 규정한 교리.
3. 기독교가 정의한 사이비 종교의 특성이 바로 기독교의 특성이다.
4. 기독교는 그 자체의 존속을 위해, 교리를 불신하거나 의심하는 것을 죄악시한다. 그 결과, 그 교리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거나 억압을 당하고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기독교인들이 분열하게 되었다.
5.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둘 때, 기독교의 신념에 투철할수록 그 해악은 더욱 심각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그 신념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어떤 신념을 무턱대고 확신하는 것보다, 미지의 것을 그에 관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는 태도가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한다. 모두가 이른바 지적 성실성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다른 믿음을 가졌다고 쓸데 없이 서로를 죽이고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6. 기독교의 신념은 역사적 사실로 볼 때, 그 어떤 종교보다도 압도적으로 악행과 몰상식한 행위의 명분이 되어 왔다. 흔히 종교는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악인을 개과천선시키지도 못하고, 악행과 몰상식한 행동의 핑계거리나 제공하는 기독교 신념은 사회에서 전혀 쓸모가 없다.
7. 기독교의 문제는 어떤 특정한 믿음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데에서 파생한다. 믿음 그 자체에 윤리성을 부여하고 선악의 개념을 접목시킨 것은 기독교만의 유별난 특성이다. 하긴 믿음 그 자체를 지켜야 할 덕목으로 두는 방식은 기독교의 존속과 교리의 보존을 위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다. 바이블을 보면, 예수가 자신에 대한 맹신을 줄곧 반복해서 강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가 기독교인들에게 맹신을 가르쳤고 많은 기독교인들의 독단성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가 기독교 자체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또한 타종교, 타사상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믿음이 개인의 선택과 취향에 달려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종교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헌법, 우리의 보편 윤리관과는 거리가 멀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말을 기독교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통 기독교는 중세는 물론이고 17세기 말까지 이단사냥과 마녀사냥을 통해, 다른 믿음을 가졌거나 그렇게 의심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뱅은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고, 그의 저서 정통 신앙 옹호론에서 이단을 처형하는 것은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이단 박멸을 위해 도시의 주민 전부를 말살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의 카톨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카톨릭 교도들에 의한 개신교도 학살이 자주 벌어졌다. 또한 교리에 대한 믿음이 손상된다는 이유로 과학 이론을 탄압한 예도 있다. 대표적으로, 카톨릭은 갈릴레이를 종교재판대에 세웠으며 개신교인들은 다윈을 헐뜯고 조롱하는 데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이 땅의 개신교인들은 기독교 고유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으면 무조건 배척하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단군상을 훼손하고, 이미 세워진 단군상을 철폐하라고 집단 행동을 했다. 종교가 개입해서는 안 될 과학 이론, 즉 진화론에 대한 모함, 비방을 멈추지 않는다. 종교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스포츠 팀, 즉 성남 일화 축구단을 추방하기 위해 집단 행동을 했다. 붉은 악마에 기독교의 적인 악마가 들어갔다고 하여, 개명압력 시위를 벌였다. 불교인 경찰을 위해 경찰서에 불상을 두는 경승실을 철폐하라며 집단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같은 이유로, 장승 공원이나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기념 공원 조성을 막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화폐에 기독교에서 사탄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는 용을 비롯 봉황 열뿔짐승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은연중에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중 음악, 뉴에이지 음악 등을 악마와 사탄의 흉계라고 매도한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신학대 교수를 교단에서 추방시켰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위와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우리가 존경할 만한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땅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기독교인들도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위대한 업적이라는 것들 중에 기독교의 특징적인 덕목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껴질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배출한 훌륭한 위인들은 기독교의 특징인 배타와 독단, 광신과 거리가 먼 기독교인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더구나 훌륭한 기독교인들, 위대한 업적을 세운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는 해악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을 눈감아야 할까?
기독교가 그 해악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믿음의 태도를 잘 살펴보자. 기독교는 증거나 탐구의 뒷받침을 받지 않는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든지 간에, 그것을 그저 투철하게 믿는 것이 도덕적이고 유익한 것이라고 여긴다. 의문이 떠오르거나 반대 증거를 접하더라도 이를 철저히 외면하여 기존의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더 훌륭한 태도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방식의 신앙 주입이 독단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식의 독단은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서로 다른 것을 믿는 신앙 집단 간에 증오와 반감 그리고 무익한 싸움을 초래할 뿐이다.
믿음을 형성할 때 탐구나 확인의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특정한 믿음에 대해서만 도덕성을 부여하는 기독교의 기본 사상이 대부분의 기독교 관련 불행의 원인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다.
- 어느 신앙심 깊은 부부가 그들의 어린 딸이 배가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병(월름씨 종양)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치료를 거부했던 일이 TV에 방송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부모를 원망하고 있었고 그 병은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이었지만, 부모는 계속 치료를 거부했다. 그 이유인 즉슨, 신께서 그렇게 명하셨고 그 병은 기도를 통해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거의 죽을 때가 되서야 입원을 허락한 부모는 오히려 그 조치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 병은 조기에 치료하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치료가 너무 늦어서 아이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여자가 자신의 세 아들을 돌로 쳐서 두 아이는 살해되고 한 아이는 중태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그 여자는 신이 그렇게 명령했다고 말했다. 단 믿어야 안다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확신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믿음의 태도가 위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기독교인들은 위의 사례들이 잘못된 신앙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신이 명령하면 자식까지 죽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신앙이 아닌가? 오히려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말해왔지 않던가?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를 두고 잘못된 신앙이라고 비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특히 월름씨 종양을 앓았던 아이는 다른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뒤늦게나마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근거가 없기는 위의 신앙을 비난하는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다. 다른 민족을 멸절시키고 임신한 여자의 배도 가르라는 신인데,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근거 없이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신앙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신앙을 기준으로 남의 신앙을 저울질할 자격이 있는가? 자신이 가진 신앙의 확고함이 상대방이 가진 신앙의 그릇됨을 말할 수 있다면, 상대방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진리를 왜 모르는가?
우리는 예수가 성인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예수를 훌륭하다고 믿는 근거는 순환논리적이다. 예수가 왜 훌륭한 존재인가? 예수를 왜 존경하는가? 과연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있어서 예수를 믿는가? 그렇게 보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신의 명령에 따라 자식을 죽였다는 부모를 탓할 자격이 없다.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이나 신의 명령을 받아 아이들을 죽이게 된 과정이나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있다면, 예수를 훌륭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있는 셈이다. 순환논변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신와 같은 존재라는 전제를 깔아두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평가를 해야 한다.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바이블에서 예수가 했던 식으로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예수에 대한 존경이, 그 사람에 대해서도 예수와 같은 평가를 내릴 만큼 공평한 기준으로 판단한 결론인가? 공평한 기준으로 평가한 예수가 아니라면, 예수를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볼 만한 이유는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위한 전제를 깔아 둘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예수를 믿는 것은 윤리나 도덕의 확립이 아니라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을 반대하기보다 기독교 자체에 대해 반대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없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를 믿지 말도록 강요하자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박해나 탄압에 의해 없어진다고 해서 득이 된다거나 기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비판과 설득을 하고자 여기에 있다. 비판과 설득을 통해 기독교가 없어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급하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할 말을 하고 기다릴 뿐이다.
반기독교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떠한 종류의 광신적 독단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넓게는 그가 속한 사회와 국가를 더 이상 좌지우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다. 비이성적인 관념이 지배하는 사회에 건전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발전은 커녕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남길 뿐이다. 히틀러의 나치 지배하의 독일이 그러하였고, 지금의 북한이 그러하며 대한민국에는 기독교 집단이 그러하다. 우리는 더 이상 비이성적인 관념이 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폭력보다는 대화와 타협이, 독단적 신념보다는 이성이 더 우선시되는 의식의 전환이야말로 그 사회의 건전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단순히 신성하다는 이유만으로 종교의 영역을 비이성 지대로 남겨둔다면 기독교는 물론 각종 사이비 종교로 인한 불상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는 이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금기를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금기가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금기가 틀렸다는 것은 다음의 간단한 물음으로 알 수가 있다.
‘신이 내려준 신성한 계명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잘못을 이성 이외에 무슨 근거로 막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 어떤 것도 이성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종교가 그 사회에 참으로 유익하다면 그 종교는 이성의 잣대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성은 그 종교의 존속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를 보자면 이성과 기독교를 조화시키고자 했던 모든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그 존속을 위해 이성을 배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러한 감정적 이유로 나섰다면 우리의 활동에 대한 근거를 상실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 반대 견해를 제시하고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통한 합의를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미신적 고정관념이나 금기를 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앞서 말했던 궁극적인 목적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양심의 자유는 기독교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는 양심의 자유를 통해 우리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며 양심의 자유를 위해 기독교를 반대한다. 믿음은 개인의 선택 사항일 뿐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기독교인들이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큰 보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