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 : ▶ 기독교와 이성에 관하여 by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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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6,290 2005.06.14 05:58

▶ 기독교와 이성에 관하여 by 분석가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 - 이성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성의 한계만을 강조한 나머지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성으로 따지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이성을 배제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맞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 수가 있다. 어떤 것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버려야 한다면 이 세상은 온통 버려야 할 것 밖에는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닥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다. 이성은 그것이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유독 종교에 관해서만 이성의 개입을 거부할 만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어떤 기독교인은 종교의 도그마를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부자라고 믿는다고 해서 정말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기독교가 큰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복감의 정도와 진리는 독립적이다. 배부른 돼지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하다는 의견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 어떤 기독교인은 이성 또한 하나의 신앙일 뿐이며 진리추구의 참된 전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성은 어떤 결론을 향한 ‘전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이성에 의지한다면 최소한 물음은 던질 수 있다. 이성은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한 ‘수단’ 또는 ‘방법’일 뿐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성이 없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해 다른 수단을 취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거나 감정에 호소를 한다던가 고집을 부리는 것 등이다. 이쯤에서 이성에 관한 적절한 정의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버트란드 러셀은 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할 때, 실제 의미는 세 가지 특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힘보다는 설득에 의존하는 것.
둘째, 논증을 수단으로 설득하고자 하는 것. 물론 이때 그 수단을 쓰는 사람은 그것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는다.
셋째, 소신을 형성할 때, 가능한 한 관찰과 귀납을 많이 쓰고 직관은 적게 쓰는 것.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에서



위의 정의에 의하면, 이성은 힘보다는 설득을, 비논리보다는 논리를, 직관보다는 관찰과 귀납을 선호한다. 이것은 실제로 쓰이는 이성의 의미와 거의 다르지 않으며, 이성의 실제적 의미를 적절하게 진술했다고 볼 수 있다. 이성보다 더 좋은 판단의 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의 직접적인 해명이 없다면 우리는 이성보다 더 열등한 수단을 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기독교와 독단

오늘날 독단이 합법적으로 정당화되는 분야는 종교 이외에는 극히 드물다. 특히 기독교는 독단을 심어 주는 대표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각자 자신의 경전 해석이 가장 옳기 때문에 같은 기독교인들끼리도 싸움을 하고, 자신의 종교가 가장 우월하기에 다른 종교와도 마찰을 일으키곤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이성을 통해서는 결코 전파될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독단적인 선전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서 독단이란 이성과 반대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도 독단은 그러한 의미로 쓰인다. 기독교의 선전기법들은 결코 논증이 아니며 심리적 오류일 뿐이다.

기독교에서 실제로 애용되는 선전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은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단 한번도 죄를 저지르지 않았나요? 악한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까?”

이 말은 죄의식을 자극하는 방법이다. 이 말은 일종의 원죄론으로서,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주어 의지를 마비시킴으로써 교리를 주입시키기 용이한 상태로 만든다. 일단 이 질문에 수긍하는 대답을 하면 질문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믿음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대로 “나는 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말을 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오만함이 바로 죄라고 말해줄 것이다. 죄책감이 없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억지로라도 심어 주는 방법은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주리라 보기 어렵다고 본다.

2.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저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정말로 행복합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호소하는 방법과 허위과장을 혼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기뻐서 미칠 정도의 흥분이 지속되는 것이거나 종교적으로 영성을 추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허위과장 광고에 대한 유혹도 강하게 느낀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 특히 종교적인 진리를 추구해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은 편견에 불과하며, 행복의 원인은 그 외에도 굉장히 다양하다고 본다. 내 의견으로는 거짓이 만들어 낸 환상을 믿음으로써 얻는 행복은 많은 부작용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행복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깨닫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며 진실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에 반해, 진실을 깨닫는 것이 때로는 혹독하다고 해도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웬만한 어려움이 닥쳐도 거뜬히 극복해 냄으로써 진정한 만족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3.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 말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전도 구호이자 공포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사실 야훼는 물론 복음서의 예수는 이런 겁주기 방법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을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협박의 방법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므로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한국 기독교만큼은 여전히 심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협박의 방식을 혐오하는 기독교인들은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을 경멸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경멸은 별로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문제는 결국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협박은 악이다. 신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는다. 고로 신은 협박을 하지 않는다.”
라는 믿음과,
“신께서 하시는 어떠한 일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불신지옥’은 협박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이다.”라는 믿음의 대결이다.
이것은 둘 다 창과 방패 중에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창을 강조하자니 방패가 아쉽고 방패를 강조하자니 창이 아쉽게 된다. 나로서는 후자를 믿는 쪽이 그들의 교주(예수)의 가르침과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바이블 속에는 전자의 믿음을 지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야훼와 예수의 협박이 들어 있다. 그러나 어쨌건 간에, 두 믿음은 단지 믿음일 뿐이지 어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면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하겠다.

4.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또는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입니다.”

이 말들은 우리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버트란드 러셀이 정확히 지적한 바 있다. 위대한 절대자가 당신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당신의 자존심을 지켜줄 것이다. 믿음이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개념은 예정설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 되는 것으로서,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앞서의 경우보다 훨씬 더한 우월감을 심어 준다. 이 방식 또한 복음서의 예수가 매우 선호하는 방식이다. 산상수훈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라고 하겠는데, 사회의 약자들이 내세에서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선언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들의 자존심을 북돋아 주는 말임에 분명하다. 히틀러와 나찌 또한 이와 같은 방법을 써서 크게 성공한 사례가 있다. 아리안족이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는 말은 패전과 경제파탄으로 인해 열등감에 사로잡힌 독일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적어도 그들에게만큼은 진리로 여겨졌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설사 이 말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할 지라도 진실과는 무관한 말이다.

기독교를 이성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으며, 그 결과 교회에서는 여전히 위와 같이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방법이 판을 치고 있다. 위에 열거된 방법들을 굳이 나쁘다고 할 이유가 있냐고 궁금해 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서 믿음을 얻어내는 방법은 사기꾼들에게나 쓸모가 있을 뿐이다. 기독교와 사기꾼은 이런 면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둘 다 믿음을 먹고 살고 그 믿음을 얻어내는 방법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도 그러하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사기꾼은 자신의 직업이 잘못인 줄 알지만, 기독교인의 동기는 순수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기의 순수성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며 종교적 독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다른 분야의 독단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면에서 비판의 의의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은 비이성적으로 보일 지라도, 기도를 열심히 하고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일단 이것 저것 의심을 품지 말고 믿어보면, 나머지 문제는 신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실 것이다.”
“하찮은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신의 위대하고 심오한 뜻을 알 수가 있는가? 의구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
”이해하고 믿으려고 하지 말아라. 믿으면 저절로 이해된다.”



어떤 교회에서든지, 위와 같은 것들을 은연중에라도 가르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할 것이다. 일단 저러한 가르침이 성공한 뒤에는, 올바른 믿음으로 포장되는 비이성적인 것들이 얼마든지 주입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정당화는 좁게는 교회의 존립, 넓게는 기독교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하겠지만, 불합리한 관념이나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잘못된 점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하찮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판단이라는 명분으로 쉽게 묵살될 것이다. 많은 비판자들은 “믿음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외면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성적 판단의 여과를 거치지 않은 많은 독단적 확신들이 “독실하다”는 칭찬을 받을 만한 태도로 여기는 기독교의 현실 속에서 그러한 결과는 당연하다. 비판문화가 자리잡지 못하는 곳에 부패와 부정이 생기기 쉬운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성을 불신하는 이유로서 신에 대한 겸손을 말한다. 그렇지만 이성에 대한 불신은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존립을 위해 훨씬 더 많이 작용한다. 독단적 신앙이 지배하던 서양의 중세에는 신앙과 이성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오캄의 사상이, 과학이 종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 종교와 과학은 각각 신앙과 이성의 고유 영역으로서, 그 중 어느 하나가 다른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성이 다시금 중요해지자, 기독교는 점차 존립에 위협을 느끼고 이 관념을 방어적으로 사용한다. 기독교의 공격으로부터 과학을 보호해 주고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그 사상이 오늘날에 와서는 기독교의 방패 노릇 밖에 못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 관념은 지금에 와서도 막강한 영향력이 있지만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이제는 독단과 맹신을 위한 핑계거리 이상의 쓸모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에 관한 비판의 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비판자들에게 자주 하는 반론은, “신은 이성에 초월한 존재다. 이성을 초월한 존재를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은 몰상식한 행위가 아닌가?”이다. 그러나 이성을 초월했다는 존재인 신에 관하여 가장 많은 판단을 하는 것은 정작 기독교인들이다. 삼위일체설, 원죄설, 예정설 등 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늘어 놓는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지 기독교 비판자들이 아니다. 반기독교인들은 그저 기독교인들이 이루어 놓은 교리와 신학 이론들에 대한 반박을 할 뿐이다. 여기서, 예수에 대한 비판이 신을 비판하는 행위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박할 기독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하려면 먼저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순서이다. 비기독교인으로서는 예수가 신이라거나 예수가 훌륭하다는 것을 독단적으로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반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비판할 때 덮어놓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대상을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로 한정한다. 예수가 복음서에서 나타난 것과 같다면,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 어떠한 것은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예수의 이미지를 놓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이블이라는 텍스트 상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가르침을 놓고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이블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이상, 그것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이성에 의한 판단이 개입될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실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엄밀히 밝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명백하다. 그러나 과학적인 방법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는 말할 수 있다. “아직까지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신뢰할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상은 분명히 기독교의 고유의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유대 고유의 전통적인 관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이미 신화를 연구한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밝혀진 증거들은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이블과 기독교 신앙도 다른 이방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예수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므로 예수에 관한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많은 증거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이러한 지식을 알면서도 신자들에게 그것을 감추거나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이라면 진실을 감출 이유가 없다. 기독교가 하나의 진리로서 떳떳하다면 성직자들이 신학대학에서 배웠던 것들을 감출 이유가 있을까? 진실 앞에서 떳떳하지 않은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부활해서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지상명령을 내리는 구절이 기독교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첨가되었다는 것은 신학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이것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직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하는 일이란 이성의 역할을 폄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갖가지 자기네들의 교리를 주입하기 쉽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러한 과정에는 공포와 죄의식에 부당하게 호소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교리가 의심되거나 이상하게 느껴져도, 자신들이 혹시 신성모독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의 한계성을 강조함으로써 맹목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존속을 위한 것일 뿐이다. 기독교 자체에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혼자 잘 믿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의 내용을 잘 들여다 보자면 결코 혼자 잘 믿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성의 건전한 성장을 방해하고 독단을 심어준다는 면에서 기독교가 없어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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