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 사두개인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부활 신앙에 대한 몇가지 문제점과 그 소모적인 논쟁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자.
[누가 20:27~33]
*사두개인들이 칠형제의 부활을 예로 들어 육체의 부활에 대한 비윤리적인면과 모순점에 대하여 예수에게 질문한다.
*예수는 부활 후의 삶에 대해 현실의 육체적 삶과는 전혀 다른 상태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천사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 죽는 일도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출애굽기를 인용하여 야훼는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설명하며
*야훼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라고 끝맺음을 한다.
*이에 율법학자 몇 사람은 예수의 말에 동조를 하고
*더 이상의 질문이 없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보편적으로 부활 신앙은 현실 삶의 연속성을 기대함 즉 영생관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즉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다.백번 양보하여 육체적 부활을 한다고 인정해 줘도 생존시의 인과관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주장했다.
섹스가 부재한 삶이란 다른 육체적 본능 즉 식욕,수면욕,명예욕 그외 고통 등도 없다는 뜻과 동일하다고 보면 부활 후의 존재는 전혀 인간이라고 할 수 없겠다.예수 역시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리라고 했다.부언하면 부활한 후의 존재는 죽기전의 존재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말이 되겠다.
*부활해봐야 전생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는데 왜들 부활문제에 그리들 집착할까?
그다음 예수의 대답은 앞의 설명과 전혀 별개의 논리로 모순의 극치를 이룬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
과거형의 야훼가 아니고 현재형으로 아브라함의 야훼라고 출애굽에 서술되었다고 산자의 야훼라고 주장하는데
*이미 죽은 자는 이름도 소멸된다고 해야 앞선 말과 논리의 일관성을 이룬다고 볼 때(마누라도 몰라보고 섹스도 없는 삶에서 전생의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죽은 자인 아브라함의 야훼란 말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예수는 간파하지 못 했던 것 같다.
다음 글 예수의 대답은 그저 자아도취로 끝나고 만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들을 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였고
감히 그 이상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
율법학자 전체 혹은 대부분이 아니란 말을 기억하시라.
몇 사람만이 예수의 말에 동조했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등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아닌가?
아마 부활관의 너무나 상이함에 더이상의 토론이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예수의 무식함 내지 모순에 실망하여 질문을 포기했다고 추증된다.
그저 허무한 말장난이라고 사두개인들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만약 사두개인들이 예수의 설명에 공감했다면 예수의 추종자가 나왔어야하는데 바이블은 이에 대해 전혀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인간이 부활을 원함은
* 생의 연속성을 원한다던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도피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부활은 왜 필요한가?
우리가 부활을 원하는 것은 현실의 괴로움에 대한 승화의 의지가 아닌가?
바이블엔 그리고 현실의 삶엔 부활의 증거가없다.
백번 천번 양보해 예수가 부활의 증거라고 해도 그것은 신의 부활이지 인간의 부활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이다.그러므로 인간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지 신의 부활 같은 예시는 우리 인간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의 부활 사상은 그저 마취제 역활 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