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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서안에서 엇갈리는 예수의 행적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예수에 대해서 그의 실존성을 논함에 있어서 4복음서는 증거자료가 될 수가 없다. 앞서 소개 드린 바와 같이 복음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으며, 4개의 복음서 안에서도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무수히 존재한다.예수에 대해서 묘사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를 4복음서라고 말하는데, 이중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적인 저술이라는 이유로 요한복음을 뺀 나머지 3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해서 세세한 점에서는 서로 어긋나고 있다. AD 180년경에 타시안(Tatian)이라는 사람이 기존의 복음서를 종합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이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한동안 이책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기존의 복음서를 대신할 수 있는 것같이 여겨졌지만 결국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우선 예수의 혈통과 출생에 대해서 알아보자.
오로지 두 복음서들만이,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혈통과 출생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두 복음서들도 서로 크게 상충되어 있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아미나답 - 나손 - 살몬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요람 -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 - 므낫세 - 아몬 - 요시야 - 여고냐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 예수 [마태복음 1장 1절 ~16절]
하나님(=야훼) - 아담 - 셋 - 에노스 - 가이난 - 마할랄렐 - 야렛 - 에녹 - 므두셀라 - 레멕 - 노아 - 셈 - 아박삿- 가이난 - 살라 - 헤버 - 벨렉 - 르우- 스룩 - 나홀 - 데라 -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 - 아니 - 아미나답 - 나손 -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 나단 - 맛다다 - 멘나 - 멜레아 - 엘리아김 - 요남 - 요셉- 유다 - 시므온 - 레위 - 맛닷 - 요림 - 엘리에서 - 예수 - 에르- 엘마담 - 고삼 - 앗디 - 멜기 - 네리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레사 - 요아난 - 요다 - 요섹 - 서머인 - 맛다디아 - 마앗 - 낙개 - 에슬리 - 나훔 - 아모스 - 맛다디 - 요셉 - 얀나 - 멜기 - 레위 - 맛닷 - 헬리 - 요셉 - 예수 [누가복음 3장 23절 ~38절]
이것이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족보로,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내림차순으로, 누가는 오름차순으로 기록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윗에서 예수까지의 족보인데, 마태는 다윗이 예수의27대조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42대조라고 했다. 같은 성경 내에서 이럼 모순이 있을수 있을까?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솔로몬을 비롯한 왕을 중심으로 족보를 전개했으며, 반대로 누가복음의 예수의 가문은 장자를 중심으로 족보를 전개했다. 누가복음의 예수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비교하면 약간 지위가 낮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두 복음서의 저자들은 수비학(numerology)에 기반을 두고 신비감을 조장하려고 한 흔적이 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를 42대로(7 X 6) 제시했는데 이것을 각각 14세대(7 X 2)로 나누었다. 이어서 마태복음은 14세대가 3번 지난 후에 예수께서 나온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 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 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태복음 1장17절]
유대인들에게 7은 상징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계보를 7로 나누어지는 묶음으로 만들고, 그렇게 묶음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바빌론 유배와 다윗 왕 자신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을 표시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복음도 예수의 족보를 일련의 이름들을 7의 배수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이 다윗 시대로부터 포로기까지를 14세대(7 X 2)로 보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21세대(7 X 3)로 보고 있으며 포로기로부터 예수까지도 21세대로 보고 있다. 마태가 다윗부터 예수까지를 28세대(7 X 4)로 보고 있는 반면 누가는 42세대(7 X 6)로 보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아담의 77대손(7 X 11)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은 중요한 인물들을 7의 구조에 맞추어 제시하고 있다. 즉 에녹은 7대, 살라 14대, 아브라함 21대, 아비나답 28대, 다윗 35대 ...예수 77대로 제시한다. 초대교회시절 이교도 비평가들은 기독교도가 이집트 학자들로부터 배운 궤변(속임수)과 마법을 수행한다고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족보와 묵시문학등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에 수비학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저자는 반으로 나뉘면 7이라는 숫자의 마법적인 특성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완전한 세 묶음의 14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열왕기상 3장의 계보에 나오는 요아스, 아마지야, 아조리야를 빼먹었고, 여고니야를 두 번 세는 실수를 범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서도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아들로 기록했는데 역대상 3장 19절에 따르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학개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1:1, 12, 14; 2:2, 23, 에스라 3:2, 8; 5:2, 느헤미아 12:1 그리고 마태복음 1:12 등이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역대상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역대상이 맞고 다른 것이 틀린 것인가?) 또한 스룹바벨이 나단을 거쳐 나오는 것으로 누가가 기록한 반면에 역대상 3장 10~19절에 따르면 그가 솔로몬을 거쳐 나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레사가 스룹바벨의 아들로 나오자만 역대상 3장 19~20절까지 스룹바벨의 아들 중에 레사라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누가복음은 아박삿의 아들로 가이난을 첨가하고 있다. 다른 족보와 누가복음을 비교해 볼 때 다윗 이후로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다윗과 요셉 사이에서 스알디엘과 스룹바벨만 일치할 뿐 다른 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째든 간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족보의 불일치 부분에 보수적인 기독교인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쪽이 요셉의 계보이고, 다른 한쪽은 마리아의 계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마리아가 다윗 가문의 후손일 수밖에 없지만, 누가 복음은 레위 가문의 엘리사벳(요한의 어머니)을 마리아의 사촌으로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는 안면이 없는 모르는 사람으로 나온다). 또한 두 복음서 모두 예수의 아버지를 요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 중 하나가 마리아의 족보라면 어째서 마리아의 이름이 없고 요셉의 이름만 등장하는가? 이러한 주장은 두 복음서의 불일치를 어떻게든 입막음 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헛수고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리고 복음서들 사이의 불일치는 예수의 가문과 족보에 관한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누가 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출생했을 때 목자들의 방문을 받았지만,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또한,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 가족은 나사렛에 살고 있었으며, 인구 조사를 위하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나 그곳의 구유 속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가족은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 쭉 베들레헴에서 살아 왔었고, 헤롯대왕의 유아학살 때문에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나사렛에 정착한 것은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였다. 정리하면, 누가복음서는 '나사렛-베들레헴-나사렛'이라는 장소 이동을 따라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서는 '베들레헴-이집트-나사렛'의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마태복음 20장 29~34절에 따르면 예수는 여리고를 떠날 때 맹인 두 명이 눈을 뜨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예수가 그들의 눈을 손으로 만지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0장 46~52절에 따르면 바르티매오라는 맹인 한 명이 예수에게 자비를 구한다. 두 사건은 똑같은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두 복음서 모두 예리고를 떠날 때 예수가 베푼 기적이었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는 맹인의 하소연이나,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예수의 말이나 모두 똑같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맹인의 숫자와 그 치료방법도 각기 다르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와서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반면에 마가복음 10장 35~37절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마태복음 27장 44절,마가복음 15장 32절]
십자가 사건 때 누가복음에는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회개해 구원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 모두 예수를 모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말에 대해서도 불일치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누가 복음에선,"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의 하는것은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단지 "다 이루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의 승천 역시 문제가 있는데,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승천에 관한 말이 없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승천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승천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을 왜 기록하지 않았는가? 참고로 가장 오래된 마가 복음의 사본에서는 동굴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 하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즉, 예수의 승천은 후대에 추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역시 제 각각이다. 마태복음에는 두 마리아가 예수에 무덤에 갔다고 하였으나, 마가복음에는 두 마리아와 살로메가, 요한복음에는 막달라마리아 혼자서 예수에 무덤에 갔다고 나와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가에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다고 기록한 것은 마태복음뿐이다. 새벽에 무덤에 가본 사람들의 숫자와 정체가 불분명 하고, 동굴 문 바위가 치워지는 데 지진이 나기도 하고 이미 치워져서 조용 하기도 하고, 문지기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무덤 안에 한 천사, 한 청년, 두 사람, 두 천사가 각각 서 있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고, 보고 만지기도 하고 만지지 말라 하기도 하고, 베드로도 달려가 보기도 하고 가지 않았기도 하고, 베드로 외에 또 다른 제자가 있다고도 하고.... 부활 후 예수가 나타내 몸을 보인 횟수, 보인 무리, 장소, 승천 하기까지의 시간 등등에서 4 복음서는 모두 다르게 기술 하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5~8절에서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대가로 받은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는 "이것은 피 값이니 헌금 궤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말하고는, 의논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 18절에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판 대가로 받은 은전으로 밭을 샀으나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오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이 모두 가롯 유다의 초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그 밭을 아겔다마(피의밭)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마태복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12제자를 파견하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는 대목 중에 사소하게 어긋나는 것도 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마가복음 6장8절]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태복음 10장 10절]
마가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했으나, 마태복음에는 지팡이마저도 소유하지 말라고 나와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도 사소하게 어긋나고 있다. 또한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에서 30 년 동안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예수의 공생애, 즉 전도활동은 얼마나 오랫동안 행해졌을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공생활은 약 1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의 전도는 3년에 걸쳐 행해졌다. 공관복음들은 예수의 공생애가 대부분 갈릴리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에는 죽기 얼마 전에 1번 방문한 것으로 기록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대부분이 유대아에서 행해졌으며, 예수가 3 번에 걸쳐 예루살렘에 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갈릴리와 유대아 사이에는 사마리아 지방이 놓여 있다. 만일 예수의 전도 중 마지막 몇 주를 뺀 전부가 그의 고향 갈릴리 지방에서 수행되었다면, 그 전도의 상당 부분이 두 지방이나 떨어져 있는 유대아에서 행해지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쫓아 낸 것이 전도 초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르면 그 사건은 그의 전도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으며, 이 행위로 인해 그에게 유대교 사제들의 분노가 쏟아졌고, 그래서 그들이 그를 처형시킬 방법을 찾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말씀이 서로 짝이 맞는 말, 즉 다른 구절과도 서로 뜻이 통하는 말이어야 하며, 반대가 되는 말이 있다면 가짜요, 짝이 있는 말이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다."[이사야 34장 16절]라는 말하는 구약의 구절을 무색하게 하는 신약의 복음서들이 아닌가! (사실 구약도 마찬가지 이지만)
기독교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그 복음서중에 하나만이 사실이던지 아니면 4복음서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 복음서들이 서로 상충되고 있는데 어떻게 신성불가침의 것이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