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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주의를 내포한 신약성경<?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영지주의(Gnosticism)란 말은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이 단어를 아람어로는 만다(mand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종교적이고 복합적인 의미 때문에 보통 그노시스라고 흔히 부른다. 그노시스라는 말의 뜻은 이 세상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으로는 깨달아 얻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지혜, 지식 또는 형이상학적 지식을 말하며 근본적 으로는, 하늘에 감추인 영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1~2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로마, 그리스, 소아시아, 이집트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으로 기독교의 탄생의 밑거름을 제공했으나, 나중에는 기독교의 이단으로 배척 받아 소멸되었다.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영지주의가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이라고 함부로 규정짓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조로아스터와 동방의 밀교에서 유래되었으며, 기독교의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영지주의는 이미 조로아스터교, 바벨론 종교, 유대교, 헬레니즘 철학과 종교, 그리고 기독교 등과 관련되어 있는 나라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R.M.Grant / Gnosticism and Early Christianity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6]. 20세기 초 신약학자 빌헬름 부셋(Wilhelm Bousset)은 영지주의의 시초를 고대 바벨론과 페르시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했다.
"영지주의는 무엇보다도 그 자체에 뿌리를 둔 전(前) 기독교 운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 용어로 이해되어야지 기독교의 가지나 부산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W.Bousset/ Kyrios Christos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6]
부셋의 이러한 견해는 타당하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미 기독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유대교의 영지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단순히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서 파생된 분파로 이해 되어서는 안된다. 부셋의 견해에 대하여 언어학자 리챠드 라이첸슈타인은 동의하였으며, 더 나아가, 영지주의가 고대 이란계 종교에서 비롯되었고 조로아스터교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1945년 낙 함마디(Nag Hammadi)에서 복음의 초기 형태를 포함한 여러 문서들의 발견으로 초대교회가 영지주의에서부터 비롯되었거나,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낙 함마디에서 발견된 52개의 본문들 가운데 일부가 기독교 복음의 초기 형태를 대표한다는 사실로보아, 초대교회가 낙 함마디 발견물들 이전에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더 다양한 신앙 형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W.Bauer / Orthodoxy and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로빈슨(J.M.Robinson)은 '낙 함마디 문서와 사해 문서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에서, 영지주의란 기독교 이전에 이미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광범위한 종교 현상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 이전에 등장했던 유대 영지주의를 주목했다![J.M.Robinson / Trajectories Through Early Christianity / Philadelphia: Muhlenberg, 1971]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역성경에는 영지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영지주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요한복음이다. 오늘날 예수의 행적을 나타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4복음서라 지칭하고 있다. 이중,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나머지 3복음서를 공관복음서로 지칭하고 요한복음서를 경외 시 하고 있다. 4복음서 중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행적이 크게 차이가 나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영지주의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두산세계대백과는 요한복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복음 중 가장 뒤늦게 성립되었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마태오 ·마르코 ·루가 등의 복음서)와는 내용적으로는 거의 공통된 데가 적으며 '요한신학(神學)'이라고 할 만큼 그노시스파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신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요한의 복음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항목]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공관복음의 주제는 천국에 있다고 본다면 요한복음은 영생과 생명에 그 주제가 있다. 공관복음은 미래적인 종말을 강조 한데 반해 요한복음은 현재적인 종말을 강조하고 있다. 또, 공관복음은 율법논쟁이나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데 반해서 요한복음은 상대적으로 율법논쟁, 윤리적인 삶의 교훈이 약하며 교회와 회당에 대한 확고하게 다른 입장에 서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선생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비밀을 알려주는 유일한 계시자로 제시된다. 특히, 공관복음에서는 이원론적인 개념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영과 육', '사랑과 미움', '은혜와 율법', '믿음과 불신', '구원과 심판' 등 이원론적인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말씀'의 원래 헬라어는 로고스(logos)이다. 이 단어는 다분히 영지적인 사상, 또는 헬라적인 사상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BC 540?~BC 480?)는 "만물은 하나의 로고스에 의하여 지배되고, 이 로고스를 인식하는 것 안에 지혜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로고스 개념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되어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영지주의분파에서 크게 퍼진 사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 of Alexandreia.250 ?~328)는'로고스'의 영원성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아리우스와 격한 논쟁을 하기도 했다. 숨겨진 성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로고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4복음서의 말씀 또는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를 플라톤의 이데아세계와 연결,로고스를 초월적존재인 하느님을 아는 수단으로 만든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20년경~기원후 40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유명한 성서 구절에서도 그리스화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의 중개를 통하여 당시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의 흐름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1권 / 이동진역 ,P.13]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가 말한 천국의 이미지는 오늘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다. 누가복음 20장,마가복음 12장,마태복음 22장에는 예수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져 함정에 걸리게 만드려는 사두개파들이 등장한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파 사람은 유대 율법에 관련되어 예수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유대율법에 따르면 자식을 낳지 못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물려받게(?) 된다. 그런데 어느 7형제가 차례로 죽음을 당하면서 형수는 동생들에게 차례로 되물림(?) 되었다. 그런데 부활의 때가 오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사두개파의 이 질문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술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이혼과 재혼은 널리 행해지고 있고, 배우자를 정말로 사랑했어도 죽음으로 인한 사별(死別)로 인해 재혼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들이 천국에 간다면 누구의 아내와 남편이 된단 말인가?
예수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대답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누가복음 20장 34~36절]
목사들은 설교를 통해서 바리새파의 세금질문을 자주 언급하지만 사두개파의 질문은 애써 회피한다. 기껏해야 "사두개파들은 율법문제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등의 간단한 언급만 할뿐, 깊이 파고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내세관(來世觀)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흔히 천국에 가서 부모님과 가족들이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는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내세관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예수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세상의 가족관계는 천국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관계의 가장 기본 인 것은 남자와 여자의 결혼인데 천국에서는 그런 관계가 없다. 부부관계가 없으니 자녀 관계, 부모관계 같은 것도 있을 턱이 없다. 다만 천사와 동등할 뿐이다. (예수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천국에서는 남녀간의 성 구분도 없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것 같다). 천국에 가서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추와 젖가슴을 달고, 니 마누라니 내 마누라니 하면서 아등바등 영생을 누릴 것 이라고 생각하는 유치 찬란한 기독교인들의 내세관과 예수의 내세관은 맥을 달리한다.
누가복음 21장 5절에서 예수는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을 가리켜 전부 무너질 것이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그리고 예수는 진정한 예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5~6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주여, 주여...", "아멘!!!"을 부르짖는 한국의 기독교인이야 말로 예수의 경멸 대상이다. 예수는 당시 유대교의 성전중심 종교행위를 경멸했다. 그리고 바울은 "내안의 그리스도" [골로새서 1장 29절], "그리스도가 내 속에 나타냈다." [갈라디아서 1장 16절],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로새서 1장 27절]를 가르친다. 바울 자신과 그를 따르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장 18절]
위에서 인용한 개역한글판 구절이 뜻 전달이 잘 안되기에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옮기면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장 3~6절]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예수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옛사람(옛날 자아)도 함께 못박혔고 무덤 속에 장사 지내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6장 1~6절]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바울의 말이다. 회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세례, 부활, 심판... 이 모든 것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버려야 할 초보적 교리이다! 성숙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 계속해서 초보적 교리에서 맴도는 사람들은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매다는 사람들이다.
바울이 남긴 말 중에는 영지주의 문서인 도마복음과 유사한 말도 등장한다. 앞부분에 소개했듯이 도마복음은 초창기에 등장한 Q문서중의 하나로 추측되는 문서이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장 9절]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 본적 없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을 주겠노라." [도마복음 17절]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가리켜 저주라고 폄하하고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장 10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라디아서 3장 19~20절]
바울은 율법을 저주라고 말하며, 그것은 중보(중재자)가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중보가 모세라고 생각할 기독교인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중보는 한쪽에만 속한 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보를 모세라고 해석한다면 모세는 선과 악의 편 모두에 서게 되는것이다. 모순일수 밖에 없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지주의 교리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자체를 부정하며, 모세의 율법을 가르켜 저주라고 폄하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여호와는 '데미우르고스'(Demiurgus)이며 불완전한 하급 신이다. 그런데, 바울은 반영지주의자이며, 그의 서신 중에는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고 반론을 제기 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디모데전서 6장 20절]
위의 구절에 등장하는 '지식'의 헬라어 원문은 '그노시스'(Gnosis)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노시스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을 살펴보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서 1장 9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 [골로새서 2장 3절]
여기서도 '지식'의 헬라어 원문은 '그노시스'(Gnosis)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그노시스를 얻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 [골로새서 2장 2절]
위에서 인용한 개역한글판 성경구절은 잘못된 오역(誤譯)이다. 공동번역판의 동 구절에는 "하나님 비밀의 지식 그리스도"라고 표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위의 '지식'도 '그노시스'이다. 바울은 예수가 그노시스라고 말하고 있다! 그노시스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예수가 그노시스라는 말을 남긴 바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앞서 필자는 '신화를 벗겨낸 예수'라는 글에서 두 얼굴의 예수를 언급한바 있다. 예수는 자기가 남긴 말도 지키지 않고, 심지어 예수의 말이 또 다른 예수의 말과 대치된다. 복음서의 경우에는 전해 내려오는 예수의 전승들이 문서화 되는 과정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겠지만, 바울 서신의 경우에는 후대의 반영지적인 성향을 가진 교인들의 손을 거쳐서 그 문제가 발생했으리라고 본다. 사도행전 같은 경우에는 사도들에 대해 내려오는 여러 전승이 문서화 된 것이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도행전 9장 7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사도행전 22장 9절]
둘 다 같은 장면에 대한 설명인데,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9장에서는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22장에서는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사도행전 안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어째든 바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하고, 이번에는 세례요한과 엘리야에 얽힌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최후의 심판 전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하지만, 예수가 직접 자신이 재림한다는 말은 한적이 없고 단지 자신의 부활만을 예언했을 뿐이다. 더욱이 구약 속에서 종말의 시기에 재림할 사람은 엘리야라고 말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라기 4장 5절]
그런데 신약에 엘리야가 등장한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가르켜 엘리야라고 말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내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7장 12~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하는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장 11~15절]
즉, 예수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부활이라고 말한 것이다.(반면에 요한복음 1장21절에는 세례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한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은 우리를 정말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세례 요한이 정녕 엘리야라면 그것은 재림이라기 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누가복음 9장 18~19절]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군중들은 예수를 가리키어 엘리야나 옛 선지자중에 하나가 살아났다는 식으로 평가한다고 제자들은 대답한다. 예수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스라엘 민중들도 이미 윤회(輪廻)를 믿고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기독교 성경속에서 윤회(輪廻)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윤회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불교인데, 불교는 기독교와 동떨어진 종교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의 힌두교에서 파생된 종교다. 이슬람 세계가 중세유럽과 원한관계로 돌아서기 전에는, 인도와 페르시아의 사상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서로간에게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이미 인도에도 퍼져 나가서 불경에도 배화교를 믿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미트라는 인도의 오래된 경전에도 등장한다.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는 짜라투스트라, 붓다, 예수의 가르침을 혼합하여 로마와 인도에까지 영향력을 뻗어갔다. 카톨릭의 성자 중에는 붓다를 흉내 낸 가짜 인물이 끼워져 있다. 두산세계대백과는 윤회를 설명하면서 그리스 등지에서도 윤회사상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부분적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 중에도 이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말한 이가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니체의 영겁회귀(永劫回歸)사상 등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윤회 輪廻 항목]
사실, 인도,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가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드는 고대사회의 사상가들은 영혼의 존재와 윤회를 믿었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고대 영국에 살던 켈트족의 드루이드교도, 프랑스, 스칸디나비아의 부족들도 이 개념을 믿었다. 특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서양철학의 한 뿌리인 그리스의 플라톤(BC 427~347)도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인간영혼의 존재와 윤회전생(輪廻轉生)에 대해 가르침을 남겼다는 점이다.
두산세계대백과는 그의 저서 파이드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들 주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철학자의 정의(定義), 방법의 문제, 로고스(言語)의 문제, 영혼의 윤회와 불사(不死)의 설명 등도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파이드로스 Phaidros항목]
그리스의 플라톤, 피타고라스, 플루타크 등을 비롯하여, 서양의 대표적 지성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윤회론을 믿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혔던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로마의 시인이었던 에니우스는 카르마와 환생의 개념을 로마사람들에게 소개했고, 로마의 대시인 버질(BC 70~19)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환생을 설명했다. AD 2세기경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겐(Origenes)과 성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St.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 서로마제국에서는 오리겐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있었고, 여러 기독교 영지주의파들과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그러나 개인적인 노력과 발전으로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정치적 우려에 따라 윤회를 가리키던 당시의 용어인 선재론(先在論)의 개념이 교회신학에서 삭제되었다. AD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없애기로 결정하여, 서기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버렸다.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김영우/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 / 정신 세계사]
현재의 기독교에서는 영혼 유전설(Traucianism .카톨릭과 루터교)과 영혼창조설(Creationism. 칼빈 장로교)로 나뉜다. 전자에 따르면 영혼은 부모로부터 유전한다고 하고, 후자는 잉태 시 신이 영혼을 별도로 창조한다는 주장이다. 두가지 모두 선재성(先在性)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속에서도 영혼의 선재성이 내포되어 있는 구절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 1장 4절~5절]
또, 욥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못 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이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기 3장 11절~19절]
시험받은 욥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몹시 후회하는 대목이다.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보면 더 뜻이 확실해 진다.
"나 지금 누워서 안식을 누릴 터인데. 잠들어 쉬고 있을 터인데. 저 허물어진 성터에 궁궐을 세웠던 지상의 왕들과 고관들과 나란히! 황금을 자랑하고 은으로 집을 채웠던 성주들과 나란히! 나는 어찌하여 낙태되어 묻힌 핏덩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빛도 보지 못한 벌거숭이가 되지 못하였는가? 그 곳은 악당들이 설치지 못하고 삶에 지친 자들도 쉴 수 있는 곳, 포로들도 함께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노예를 부리는 자들의 욕설도 들리지 않는 곳,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들이 주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곳." [욥기 3장 13~19절-공동번역판]
욥이 말하고 있는 태어나기 전의 세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彼岸)의 세계같이 느껴진다. 외경 속에서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영혼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또 하나의 창세기인 하가다서의 인간의 영혼에 관한 대목을 보자.
"천사가 지적 받은 영혼을 데리고 온다. 영혼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나타나자 허리를 굽혀 절하고 바닥에 엎드린다. 그 순간 하나님이 이 정자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영혼이 입을 열어 '오오, 온 세상의 주님. 당신이 나를 창조한 이래 나의 거처로 지정한 세상에 대해서 만족합니다. 나는 거룩하고 순수하며 당신 영혼의 일부인데, 왜 불경한 정자 속에 들어가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탄원한다......(중략).......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그 천사가 나타나서 '나를 알아 보겠는가?' 라고 묻는다. 사람이 '그래요, 그렇지만 왜 다른 날 오지 않고 오늘 오는 겁니까?'라고 대답한다. 천사가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 데리러 온 것 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이 통곡을 시작하고 그 울음 소리가 세상 끝까지 들리지만, 수탉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피조물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1권, 하가다中 / 문학수첩]
신은 인간의 영혼을 불러 정자 속에 들어가 인간으로 태어나도록 명령하고 있고, 인간은 태어나기 싫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후 죽음이 다가오면 다시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 외경에서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신과 함께 피안, 또는 천국과 같은 곳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