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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비평에 쓰이는 신약의 사본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AD 2~10세기 사이에 쓰여진 사본들만 남겨져 있을 뿐 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본들 역시 내용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초기 번역본에 대한 사본들도 약 1만개 이상 보존되어 있고 교부들의 인용문도 수천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부분이든 전체든 신약이 수록된 헬라어 사본은 대략 5,500여 개 정도가 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은 단편들뿐이지만 신약 전체의 40%가량을 포함한다. 반 이상이 AD 4세기경의 것들이고 그 중 가장 오래된 단편적인 사본 하나는 AD 140년경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파피루스는 모두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본상의 차이로 인해 AD 2~4세기 동안 이집트에서 지배적인 신약의 본문유형이 없었음을 나타내 준다.
신약의 사본에는 대자사본(大字寫本)과 소자사본(小字寫本)이 있다. 9세기까지 신약은 헬라어 대정자 (大正字: 대문자)를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도 없이 연속하여 기록했다. 9세기 무렵부터 현재의 헬라어 성경체와 같은 초자체(草字體,소문자)로 단어와 단어 사이도 띄어서 기록하고 구두점도 생겨나게 된다. 전자에 속하는 사본으로 바티칸 사본(부호 B),시내 사본(부호 S),알렉산드리아 사본(부호 A), 에프레임 사본(부호 C)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사본은 대개 8세기 이후의 것으로, 현재 2,300가지 이상이 있다. 사본을 읽는 데는 후자가 더 쉬우나, 연대가 후대의 것이고 정정 가필 등이 많아 원본을 회복해 보려는 본문비평에는 대자사본이 보다 유효하다. 성경 사본 형성 과정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는 필사자가 자신의 교리대로 설명을 붙이거나, 의견을 붙이거나 해서 점점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듯이 본문비평의 가장 초보적 원칙은 문서의 양이 많아질수록 후대에 변조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란 것이다.(반대로 교리에 맞지 않으면 삭제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럴 경우에는 삭제보다는 내용을 변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본의 자료로는 무엇보다도 파피루스(papyrus)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집트의 나일강(江) 연안에 있는 갈대의 일종인 다년초이다. 이 자료가 BC 11세기부터 문서에 사용되었고, BC 2세기 말경부터는 점점 송아지가죽이나 양 가죽이 이에 대용되게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성서의 사본과 번역본] 5,500여개의 사본 중에서 파피루스 사본은 98개, 대문자 사본 300개(가죽종이), 소문자 사본 2800여개등이다.
각각의 신약의 사본 역시 구약의 사본과 마찬가지로 내용이 같은 것이 거의 없는데, 구약의 경우 서기관들이 필사할 때의 오류와는 양상이 다르다. 영지주의는 물론 수많은 종파로 갈려져 극심한 혼잡을 이루었던 초대교회시절,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 내용을 추가하거나 변조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물론 초대 기독교인들도 구약도 위조했다.) 신약의 문서적 날조라는 문제에 대해 쮜리히의 로버트 케일 박사의 논문집 '현대인의 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대목을 고친 두 명의 수정 자들은 각기 정 반대의 뜻으로 돌려 놓는 수도 있다. 이건 그가 속한 교파의 독단적 교리, 즉 도그마 해석에 따라서 생긴 의도적 변개다. 하여튼 간에 산발적인 교정에 의해 그리고 물론 보다 많은 계획적인 교정에 의해 도저히 손댈 수 없을 정도의 텍스트에 혼란이 일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중략)....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이 애당초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 한 줄로 단정하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 있는 내용들이 옛날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으로 고지식 하게 믿고 있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초기 기독교 겨레는 2백년 동안에 걸쳐 구약성서 이외에는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대개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구약의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 초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했었다는 사실(예수가 설교의 바탕으로 삼고 있던 이사야서도 기원2,3세기 경에 마무리 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학계에서는 지배적이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신약의 본문비평에 사용되는 사본들을 살펴보자.
(1) 시나이 사본 (Godex Sinaiticus)
1884년 시나이산의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독일 신학자 C.티셴도르프(Constatin von Tischendorf)에 의해 발견된 AD 4세기경의 사본이다. 첫 번째로 발견된 것은 구약성경에 속하는 43매의 박피지(薄皮紙)로, 작센 후작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사본이라고 하며, 이것은 라이프치히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에 다시 티셴도르프가 수도원을 3차 방문했을 때 구약성경의 150장과 신약성경 부분 148장을 발견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헌상 했다. 이 자료는 페테르부르크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혁명 후인 1933년 영국에 10만 파운드에 팔아 넘겨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나이 사본은 구약의 상당 부분과 신약의 정경(正經) 전부와 바나바서신 및 허마의 목자와 같은 약간의 외경(外經)이 들어 있는 것으로, 1881년의 영어성경 개정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나이 사본에는 수정된 곳이 무려 1만6천 군데나 된다. 이것은 저자들로 보여지는 7명의 교정자들 손에 의한 것들로 세 번 수정되고 네 번째의 원전에 의해 바꿔진 대목도 허다하다. 히브리어 사전을 저술해낸 일류 전문가 프리 드리히데리츄는 시나이 사본인 이 원전 속에서 3천 군데나 베낄 때 잘못 쓴 대목을 지적하고 있다. 이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나고 요한복음 7:52~8:11의 간음한 여자의 기사,요한복음 5:4; 8:1~11, 마태복음 16:2,3, 로마서 16:24, 마가복음 16:9-20, 요한일서 5:7, 사도행전 8:37 등과 많은 내용들이 없으며 외경까지도 정경으로 담고 있다. (내용들이 없다는 것은 해당구절이 후대의 추가된 내용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
AD 330~340년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본으로 1457년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었으며 10과 1/2X10인치나 되는 큰 사이즈의 필사본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러나 바티칸사본은 구약에서 창세기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1:1~46:28, 시편 105:26~137:6, 사무엘상, 열왕기상, 느헤미야의 부분들이 없고, 신약에서는 히브리서 9:14 이후,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모두 없다.
(3)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dreia)
5세기초에 기록되었고 1627년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루카리스에 의해 영국왕 찰스 1세에게 헌정되었다. 원래는 외경을 포함한 헬라어 성경 전체를 담고 있었으나 현재는 구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신약도 일부가 빠져 있다. 구약은 2명, 신약은 3명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4) 기타사본들
이 외에도 중요한 사본들로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베자 사본(5, 6세기)등이 있다. AD 4세기부터 10, 11세기의 언셜체 사본은, 대부분은 단편들이지만, 그 고대성 때문에 과거 신약 성경 본문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여겨졌다. 소자사본(小字寫本)들은 초서체로 쓰여진 9세기에서 17.8세기의 것들이다. 모두 2,500여 개가 넘는 사본이 남아 있지만 역시 대부분 단편들이다. 이 밖에도 매일매일의 예배 중에 읽혀지던, 신약 성경에서 발췌된 글을 수록한 독서성구집등도 신약의 원문을 복원해 내는 중요한 비교문헌 중에 하나이다.
(5) 기타 역본들
AD 1000년경 이전에 헬라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된 라틴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고대 슬라브어, 고대 그루지아어 역본들도 신약 성경 본문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이다. 어떤 경우에는 구약성경이 이미 사용되고 있기도 했고 구약의 완역이나 부분 역에 이어 신약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콥트어(Coptic)는 고대 이집트어의 가장 후기 형태인데 3세기경에 처음으로 한 방언으로 신약이 번역되었고 4세기 후에는 거의 모든 성경이 이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콥트어 역본 대부분은 12~14세기경의 것으로 3세기의 것과는 다른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트어(GOTHIC) 역본은 번역자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번역자가 알파벳을 만들어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몇 개의 역본 중 하나이다. 4세기 중엽 울필라스가 만든 역본의 일부가 전해지고 5,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렌테우스(Argenteous) 은(銀)역본은 보라색 양피지에 은색 잉크를 사용한 호화판 사본으로 고트어 역본 중 가장 완전하게 남아있다. 아르메니아어(ARMENIAN) 역본은 예배 시에 시리아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 반대해서 5세기초 성경과 전례서의 번역이 시작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8세기에 원래의 역본을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이 역본은 어법의 아름다움과 번역의 정확성이 매우 탁월하여 역본 중의 여왕이라 불린다. 이 외에도 시리아어, 그루지아어, 이디오피아어, 아랍어 역본들이 전해지고 있다.
(6) 교부들의 인용구
많은 교부(敎父)들이 글을 쓰면서 자기들이 볼 수 있었거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사본의 내용을 인용한 것들이 있다. 비록 짤막한 인용일지라도 그들의 인용은 역시 그가 사용한 사본의 필사본으로서, 본문 비평가들이 원본을 찾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교부들은 자기가 가진 사본을 자기의 글에 인용하면서 실수로 잘못 인용할 수도 있고 고의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1901년 이집트 룩소에서 발견된 모들렌 파피루스(Magdalen papyrus : P64)라는 세조각의 파피루스가 있다. 이 작은 파편은 1953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감정되었으나 1994년 티데라는 사람이 AD 66년의 것이라고 주장한적이 있다. 이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모들렌 파피루스는 2단(段)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2~3세기의 파피루스 사본은 모두 1단 형식이고, 2단형식은 구약성경의 사본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1세기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AD 5세기 경의 알렉산드리아 (Alexandrinus) 사본도 각 페이지 마다 2단(段)으로 나뉘어져 있고 한 단에는 46~52행의 글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 사본도 1세기의 유물이 될 수 있을까? 또한 작가는 2~4세기에 사용된 언설체와 글씨체가 약간 다르다며 이 사본이 1세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1세기의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붓 또는 두터운 펜을 사용해 흘려 쓰는 러스틱(rustic)체가 유행했다. 나머지 그의 주장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들 이다. 글자 몇 개밖에 나오지 않은 작은 파편을 가지고 마사다 요새에서 발굴된 문서와 비교하거나, 일부의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을 가지고 쿰란의 사해사본과 비교한다.
필자가 이 사본의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글자가 붙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신약의 사본이 두루마리 사본과 달리 대부분 양면을 기록한 코덱스 사본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필자가 확인한 사진이 한쪽 면 뿐 이었다고 해도, 그 한쪽 면에 붙어 있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E와 T의 글자 끝부분이 아주 살짝 겹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미미해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글자는 확실하게 전부 떨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그 작가는 야고보가 처형되자 그 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가리켜 노미나 사크라라고 불렀다고 주장하면서 사본에 기록된 글자와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형되자 그 때부터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그렇게 불렀다는 것은 어디에서 근거를 찾는지 모르겠다. 야고보가 산헤드린에 끌려온 것은 요세푸스의 저서에 나오지만(물론 요세푸스의 저작물은 위조 가능성이 크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 한 것일까? 또한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들렌 파피루스는 너무 작은 파편이라서 방사성 동위원소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유다 복음서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AD 220~340년쯤의 것으로 판명했는데 왜 과학적인 검증을 피하는 것일까? 그리고 티데라고 작가의 이런 궤변은 신학 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