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비평에 쓰이는 구약의 사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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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비평에 쓰이는 구약의 사본들

적 그리스도 0 7,012 2006.07.0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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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비평에 쓰이는 구약의 사본들

 

성경의 원본이란 것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다. 현존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생겨난 사본들 뿐인 것이다. 5천종류를 넘는 구약의 사본들은 수없이 모사를 거듭한 사본 인데다가 내용 또한 똑같은 것이 단 한가지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런 사본들을 비교 검토하여 서기관의 필사상의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 히브리어 원본이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고대 역본의 연구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이 중에서 사본들과 역본들을 비교, 연구하여 차이점과 공통점을 밝히고 원래의 본문을 확인해 내는 작업을 본문 비평이라고 한다. 본문 비평에서 권위 있는 구약 본문은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오경, 70인역 등이 있다.

 

본문 비평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본들은 무게로 달아 보는 것이지 수로 헤아리는 법이 아니다.

즉, 문서의 양이 많아졌다고 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오래된 것일수록 원문에 가깝다.

셋째, 번역본보다는 히브리어 본문이 원문에 가깝다.

 

마소라 본문이 우선되지만 사해사본들도 잘 참고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70인역과 마소라 본문과의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위조한 70인역보다 히브리 원어로 기록된 마소라 본문을 더 중요하게 보지만, 예레미야서의 경우 70인역이 마소라 본문보다 7분의 1이나 짧은데 이는 마소라 본문이 나중에 많은 것을 덧붙였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 준다. 그렇지만 70인역과 마소라 본문이 서로 다른 부분은 그 경우 경우에 따라 문법, 어휘, 내용, 전후 관계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보고 어느 것이 원문에 가까울지 판단하여야 한다. 히브리 본문이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지면서 달라지는 좋은 보기로서 이사야 19장25절 후반 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분문의 전승 연대와 사본의 지역적 분포성과,다양한 사본의 족보 사이의 계보성도 파악해야만 한다. 그럼, 본문비평의 자료로 쓰이는 가장 가치 있는 성경의 사본들을 살펴보자.

 

(1) 마소라 사본(the Hebrew Masoretic Text)

10세기 말에  히브리어 본문 중 마소라 사본은 마소라 학파라 불리는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본문을 정확하게 보존하기 위해 전승에 기초하여 연구한 사본을 말한다. 그들이 사용한 본문의 기원은 A.D. 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래 자음뿐이던 히브리어가 헬라어의 사용으로 인해 사어가 되어 올바른 독법을 잃어버리자 모음 부호,억양 법을 첨가한 사본을 만들었다. 마소라 사본 중 AD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은,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의 본문을 모두 담고 있는 사본이다. 지금 구약학계에서 보통 쓰고 있는 여러 종류의 마소라 인쇄 본은, 최신판이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제4판'인데, 이를 보통은 그 출판지 이름을 따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1977), 줄여서 베하에스(BHS)라 한다. 제3판은 그 대표 편집자의 이름을 따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킷텔'(Biblia Hebraica Kittel 3), 줄여서 베하카(BHK3)라 부른다. BHK의 제 1,2판은 야콥벤 하임 벤 아도니아가 편집하고, 1524년 다니엘 봄베르그가 베니스에서 출판한 제2의 랍비경전에 기초한 것이고, BHK3와는 랍비경전가 히브리어 성경 본문비평작업에 미친 기여도가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깨닫고 키텔이 레닌그라드 도서관에 있는 사본을 연구하고 있던 칼레의 제안에 따라 레닌그라드 사본을 자신의 BHK(3판)의 편집기초로 삼게 되었다. 또한 BHS는 사해사본의 단편을 참고하여 제작되었다. NIV는 BHK3에 의거 했으며,NKJV는 BHS를 모티브로 번역했으며, KJV는 BHK1을 기초로 하여 번역되어 졌다.[D.A.Waite Defending the King James Bible, 1996, 2nd edition]

 

종래 독일어 권 학자들을 중심으로 비평 판 히브리어 성경을 편집해 오던 것과는 달리 현재 세계 성서공회 연합회가 주선하여 전세계 학자들이 참여하여 2002년 완간을 목표로 하여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제5판' (Biblia Hebraica Quinta=BHQ)을 편집하고 있다. 그 사이에 이런 히브리어 성경들의 밑바탕이 되는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한 세기 앞서 930년 경에 생긴 것으로 알려진 알렙포 코덱스가 발견되었으나, 1947년 반 유대폭동 때 일부가 손상되었다. 그러나 이 알렙코 코덱스를 기초로 해서 히브리 대학에서 독자적으로 비평 판 히브리어 성경을 '히브리 대학교 성경'(The Hebrew University Bible=HUB)이란 이름으로 엮어 내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이사야서(1995)와 예레미야서(1997)만 나와 있다.

 

이처럼 AD 1세기말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어 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마소라 본문이지만 히브리어 사본들 가운데는 세부적인 점들에 있어서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본문들도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보기로 들 수 있는 것들이 BC 3세기 중엽부터 생겨난 70인역 헬라어 성경의 어떤 부분의 대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히브리어 본문,  쿰란 사본을 포함한 사해 두루마리가 보여주는 히브리어 본문, 오경에 제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마리아 전통의 오경 본문이다. 그 밖에도 BC 2세기 후반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무랍바트 두루마리와 마사다 사본 같은 것들도 있는데, 이 모두 마소라 전통과는 차이가 있다.

 

(2)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히브리어 본문 중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으로, 1947년 사해 북방에 있는 쿰란 공동체의 동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동굴은 BC 8~7세기경 건축되어 BC 2세기말부터 AD 2세기초까지 예수와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의로운 선생을 추종했던 에세네파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구약이다.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구약 성경의 단편들이 발견되었고, 구약의 주석서 들과 함께,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들도 발견되었다.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문서들의 대부분은 고문서학적 분석 및 탄소추정 법을 통해 BC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보다 앞서 기록된 것으로 레위기와 사무엘서(BC 3세기)의 단편들도 발견되었다.

 

첫 번째 사해문서가 발견된 뒤 몇 년 동안은 다양한 출판물이 발행되었지만, 제4동굴에서 수만 개의 단편이 발견되자 문제가 달라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설립된 작은 국제학자들이 연구의 공식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두루마리의 공개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8명의 한정된 학자들 중 팀의 한 명이 사망하면 그를 대치할 새로운 학자 한 사람만을 추가하면서 공개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6일전쟁으로 예루살렘동부와 두루마리에 대해서 관할권을 이스라엘이 획득했지만, 역시 두루마리 팀에 대해서 아무런 정책변화는 없었다. 고대 아람어와 고대 히브리어에 해박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상황으로 볼 때 당신의 연구팀은 너무나 적은 인원이었다. 제임스 밴더캠은 "수만 개의 단편들은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여덟 명의 전문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7년 옥스퍼드 대학의 게저 베르메시 교수는 이 일을 가리켜 20세기 최고의 학계 스캔들이라고 불렀으며, 기독교 측이 압력을 넣어 기독교에 큰 타격을 줄만한 내용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그 팀은 마침내 20명의 학자들로 확대되었다. 1990년에는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의 에마누엘 토브의 인솔아래 50명이 넘는 학자들로 확대되었으며, 두루마리의 공개를 결정하게 된다. 1991년에 '미 간행 사해 두루마리 예비 판'(A Preliminary Edition of Unpublished Dead Sea Scrolls)가 발행되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주 산마리노에 있는 헌팅턴 도서관측에서는 사진전체를 모든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사해두루마리 팩시밀리 판'(A Facsimile Edition of the Dead Sea Scrolls)이 출판됨에 따라 사해문서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시작되기에 이르른다.

 

사해문서가 공개 되자, 기독교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의 발견으로 구약성경의 권위가 많이 쇠퇴 하였으나, 이 사해문서의 발견으로 기독교는 또 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예수의 존재를 위협할 만한 에세네파의 메시아의 존재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3)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

사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서 분리해 나갈 때, 그들이 경전으로 인정하는 것은 오경뿐이었다. 1616년 이탈리아의 한 여행가가 다마스커스에서 처음 발견하였고 당시에는 오경 연구의 가장 빠른 자료로 여겨졌다. 단편들까지 합쳐서 150여 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최초의 것은 9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고 대부분은 14~15세기의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꼽히는 사마리아 오경은 세겜의 그리짐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이 붙여져 아비샤 두루마리라고 불린다. 아비샤 두루마리는 적어도 9명의 필사 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가운데 1149년에 기록된 것이 가장 최초의 것으로 밝혀졌다.  사마리아 오경은 BC 108년에 하스모네 왕조의 히르카누스 왕이 그리짐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오경과는 신학적 차이를 반영하는 독자적 경전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마리아 오경만의 독특한 히브리어 서체가 쿰란에서 발견된 소위 고어체 히브리어 두루마리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당시부터 사마리아 오경이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오경은 각각 그리스어, 아람어,아랍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사마리아 오경은 약 1,900군데에서 마소라 오경보다는 칠십인 역의 오경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칠십인 역과 사마리아 오경이 같은 자료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마리아 오경이 마소라 오경과 가장 큰 차이점은, 복수형인 엘로힘 대신 단수형 엘라를 사용하거나 야훼를 의인화한 표현들을 고치는 등 절대적 유일신론을 더욱 강조하였고,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이 언급된 구절들을 의도적으로 고쳤으며, 신이 지정한 거룩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세겜의 그리짐산이라고 한 점이다. 특별히 이 마지막 관점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끝부분에 그리짐산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별도의 규정을 구체적으로 첨가하여 명시했다.

 

(4) 70인역(Septuagint=LXX)

BC 3~1세기경 등장한 70인역은 이집트 왕 프톨레미(Ptolemy Ⅱ Philadelphus)의 요청에 따라 BC 8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70(또는 72)일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터툴리안', 성 '어거스틴', 성 '제롬' 등등의 초기 교부들은 모두 이 번역 본들이 신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저스틴 교부는 70 인이 따로 번역 했으나 글자 하나 까지 일치 된 신의 영감에 의한 작품이라고 치켜 세우면서 프톨레미 왕이 헤롯 왕에게 친서를 보냈다 운운 하면서 실수를 범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헤롯은 프톨레미보다 근 200 년 뒤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LXX)은 하나의 통일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번역 기술이나 히브리어 지식이나 문체 등에 있어서 서로 매우 다른 여러 사람의 번역들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70인역은 욥기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6분의 1정도 짧으며, 예레미야서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8분의 1정도 짧고 그 순서도 서로 다르게 되어있다. 내용 또한 많은 부분이 잘못 번역 되었는데, 70 인 역에 의하면 창조의 시점 이 1195 년이나 당겨져 있고 '무드셀라'가 '노아'의 홍수가 나고도 14 년이나 계속 살아 남은 것으로 계산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이 70인역이었다. 그들은 70인역 성경에서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독교적인 내용들을 덧붙이게 되었다. 카톨릭백과사전은 70인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70 인 역을 채택 하였다. 70 인 역은 히브리 원본과 달랐다. 몇 권의 책과 구절들이 더 추가 되었을 뿐 아니라.....(중략)....... 부분적으로 번역의 실수가 있었고....(중략)..... 더구나 70 인들은 유대 랍비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히브리 경전을 토대로 번역하는 바람에...." [카톨릭백과사전 vii, 316]

 

"70 인 역은 믿을 바가 못 되니 제 멋대로 번역되고 변조 되었으며....(중략)....따라서 교회에 의해서 거부 되었다"

[카톨릭 백과사전 iv, 625]

 

이에 반발하여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구약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경전을 위조했다고 기독교인들을 배격했으며, AD 2세기 경에 히브리 본문에 맞도록 새로운 희랍어 역본을 만들었다. 2세기초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아퀼라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위조한 70인역의 구약의 메시야 관련 위조부분을 히브리 원전에 맞게 번역함으로 아퀼라역(a')이라는 헬라어 축어적 역본을 만들었고, 2세기 말엽 심마쿠스는 아퀼라의 축어역과 달리 히브리적 표현을 없애고 순수한 헬라어를 사용한 의역본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레오도티온역, 역자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세 개의 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을 위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AD 230~24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은 6500쪽이 넘도록 각 쪽에 여섯 란을 두고서 그 때 구할 수 있던 히브리 성경, 그것의 발음을 헬라어로 바꾸어 적은 것, 아퀼라 번역본, 심마쿠스 번역본, 70인역, 레오도티온 판을 각각 적어 넣어 서로 비교하도록 하는 헥사플라(Hexapla)를 편찬했다. 오리겐은 히브리원문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인들이 70인역을 위조한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의 논쟁을 적당히 무마시키기 위해서 이 6가지 본문을 비교하면서, 그 나름대로 다섯 번째 란의 70인역을 새롭게 수정했다.

이 70인역이 나중에는 헥사플라와는 따로 떨어져서 그것만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을 70인역의 헥사플라 개정판(BHK의 GH) 또는 오리게네스 70인역(BHS의 GO)이라고 부른다. 그 뒤로도 70인역은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개정판 사본이 생겨났다.

 

70인역의 가장 중요한 사본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을 들 수 있다. 오늘 우리가 70인역을 연구하려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70인역 사본들을 비교하여 만들어 놓은 비평 판 헬라성경으로는 1931년부터 나오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괴팅겐에서 나오는 것과 1935년에 간단하게 나온 랄프스의 것의 둘을 본다. 괴팅겐의 70인역은 여러 사본을 비교하여 가장 원본에 가까와 보이는 본문을 재건한 것이고, 랄프스 70인역은 70인역 사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5) 페쉬타(Peshitta)

시리아 정교회가 전수해왔으며 '페쉬타'라고 일컬어지는 시리아어역 성경의 기원에 대하여는 정확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페쉬타가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페쉬타가 반영하고 있는 본문이 마소라 본문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거나 근접하는 것으로 보아 페쉬타는 AD 2~3세기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한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페쉬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AD 5세기의 것이 있고, 나머지는 5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기록된 사본들이다.

 

(6) 아람어 탈굼(Targum)

바벨론 유수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히브리어보다 상용어(常用語)인 아람어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BC 2세기에 이르러 이런 구두 해석이 정교해지고 고정화되어 전승되면서 문서화 되게 된다. 여기서 탈굼이라는 아람어 역본이 등장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타르구밈'(탈굼의 복수형)이라고도 불리는 탈굼은 그 형태가 아주 다양하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비교적 문자적 번역만을 시도한 온켈로스의 탈굼이 있는 반면, 일명 '가짜 요나탄 탈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탈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나중에 아람어 역시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아람어도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을 겪었다.

 

(7) 라틴어 역본(Latin Vulgate)

라틴어로 성경이 처음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에서였고, 3세기 경에는 유럽에서도 기독교 공동체가 발전하고 헬라어에 대한 지식이 보편화되면서 유럽개정판이 만들어졌다. 어거스틴은 "신앙의 초기에 희랍어 사본을 우연히 입수한 자가 스스로 두 가지 언어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번역에 뛰어 들었다"라며 당시의 무분별한 번역에 대해 말했는데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역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역본들은 문학적 언어가 아닌 지방어나 투박한 평민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본들을 통틀어 고대 라틴어역이라고 부른다. 무절제한 수정이 본문의 와전을 더해 나가며 혼란을 일으켰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대 라틴어 역본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이 인식하게 되었고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는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한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먼저 번역하여 405년에 번역을 완성하였다. 제롬의 역본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그 가치가 인정되어 결국 서방 기독교 국가 전역에서 받아 들여져서 공통적인 (vulgata : '대중적인'이 라는 뜻도 있음)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본도 오늘날 약 8,000개정도 있으며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제롬의 라틴어 번역본 역시 오늘날 원본이 없는 실정이다.  원래 성경에는 장(章)의 구분이 없었는데, 13세기에 스테판 랑튼이 라틴 번역에다 장을 구분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 역본은 로마 교회의 공인 본문이 되어 교회 용어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로만스어로 발전하는 과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롬의 역본 역시 전달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와전되었고 원형을 되찾으려는 또 다른 수많은 수정 본이 만들어 졌다. 트렌트 공의회 (1546년)의 결정에 따라 교황 클레멘스 8세 때(1592년)에 당시 수집 가능한 모든 사본을 모아 수정본을 만들었는데 이 수정본이 현재 로마 교회의 공인본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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