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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받기 까지
유대교적인 문헌과 기독교적인 문헌은 무수히 많다. 그 무수한 문헌 중에서 정경을 추려내는 과정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모든 과정에 성령이 역사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신약의 유다서를 읽어보면 알 수가 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 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다서 1장 14~15절]
에녹은 창세기 5장에 나타나는 인물로 965년간 살았고 여호와가 데려갔다라고 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정경화된 구약 속에서는 에녹의 예언이나 그가 남긴 말 따위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위에 언급된 에녹의 예언은 외경에 해당하는 에녹서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구약의 중간시기에 무수히 많은 묵시문학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문헌이 등장했는데 이를 간약적 문헌이라 부른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것들을 열심히 읽었다. 따라서 유다서의 저자는 에녹서를 인용해버린 것이다. 유다서의 말이 맞다면 에녹서는 어째서 정경에서 제외된 것일까? 결국 정경을 추려내는 과정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히브리성경의 정경화 과정은 긴 세월과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바벨론 유수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체성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기존의 전승들을 묶어 펴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토라(Torah), 즉 모세 오경이 유대교의 정경으로 공인되었다. 후대의 편집과정을 거쳐 BC 400년 무렵 오경은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성경은 토라(Tanak=Torah,율법), 네비임 (Nebiim=Nevi' m, 예언서), 우케투빔(Kethubim=Keth v m, 그리고 聖문서)로 분류된다. 이 세가지 명칭의 순서는 이런 문서들이 성경으로 채택된 역사적 순서를 말해주기도 한다.
(1) 오경의 형성
오경은 1개 이상의 문서 편집으로 형성된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다. 오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아무도 그 정답을 줄 사람은 없다. 오경과 아울러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언 자들의 설교가 언제 문서화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학문적 추구를 통하여 얻을 수 있었던 최선의 설명은 율리우스 벤하우젠의 '문서설'이다.
족장시대와 그리고 가나안 정복 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법률을 모은 것들이 구두(口頭)에 의해 대대(代代)로 전승되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유대민족은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혼란기를 얼마 동안 가졌다. 이런 난국에 관한 이야기들 곧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등의 정벌담 (征伐談) 들이 민중 속에 계속 인기를 모으며 이 입 저 입으로 전해졌다. 그 후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확립되어갈 무렵에는 상당한 부피의 법률과 이야기들과 찬양 시들이 구전으로 혹 문서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먼저 남쪽의 유대 왕국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문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 문서에는 신을 야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야훼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따서 'J문서'라고 부른다. 그 다음으로 북왕국에서 발생된 것이 'E문서'라고 한다. 이것은 J 문서보다 1세기 이상 늦게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기원전 621년에 유대왕국의 요시야 왕의 대 혁명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성전에서 발견된 책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학자들은 이 책을 현재의 신명기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문서를 'D문서'라고 한다. 이렇게 D문서가 발견됐을 때는 이미 J, E라고 하는 서사적 역사 문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D문서를 모세가 준 율법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J, E 와 D를 함께 섞고, 모세의 죽음 이전까지의 이야기 속에 삽입했다. 이렇게 하여 오경은 점진적으로 진화해 갔다. 그 다음 문서가 거룩에 대한 규칙과 원리를 규정한 'H문서'가 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되었던 문서가 'P문서'(제사장 문서)이다. P문서의 특색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제도나 절기들의 기원을 말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5개,혹은 4개의 각각 독립된 문서들이 수집, 편집, 삭제, 첨가의 과정을 거쳐 오경이라는 오늘날의 문서형태가 되었다.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BC 400년 경에 유대교에서 성경 으로 인정 받았다.
(2) 예언서와 성문서의 형성
오경 이외의 문서와 유대교의 성립에 대해서 두산세계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 모세시대에서 그들의 시대까지의 역사인 '신명기(申命記)'에서 '열왕기(列王記)'까지가 편찬되었다. 5세기 후반에 느헤미야 ·에즈라 등이 귀국하면서 새로운 법전(法典)이 나오고 민족이 재건되었으며,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대 시련이었으나, 약 반 세기 동안 포로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접하여, 구약성서의 근간이 된 헤브라이의 여러 문서를 집성하였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다인 공동체 회복의 원동력이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바빌론유수 Babylonian Captivity항목]
이렇게 바빌론 유수 이후에 여러 전승들이 오경으로 묶여지면서 유대교가 정립되어가고, 이때쯤부터 예언서와 성문서라 불리는 문서 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네비임(Nebiim), 즉 예언서들 (여호수아, 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서,예레미야,에스겔,이사야,소예언서)과, 케투빔(Kethubim), 즉 성문서 (聖文書) 들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룻기)은 역시 동일한 정체성의 위기에 몰렸던 마카비 혁명시대(BC 2세기)와 예루살렘 멸망(AD 70년경) 이후에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되었다.
예언서의 경우 마카비 시대에 쓰여져 과거의 유명한 선지자들의 이름을 빌려 지나간 사건들을 예언인 것처럼 조작이 이루어졌다. 성 문서들은 거의 대부분 운문(韻文)들이며, 일부는 역사를 서술한 서사시들이다. 정확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 전설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성경의 여러 문서들이 모이고 수집되어 정경화 되었다는 것이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분되는데,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4권의 책을 말하고 후기 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소선지서를 말한다.
성문서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모여서 되었기에 율법서나 예언서처럼 동질적 통일성을 가지진 못했으며, 여기에 속한 여러 문서들은 개별적으로 대중의 수납에 의해서 성경으로 간주된 것이지,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정경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성경이라기 보다는 종교 문학으로서 간주되어 내려왔었다. 성문서는 대부분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 솔로몬, 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간주했다.
(3) 유대교의 경전으로 공인 받기까지
대부분의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졌는데,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즈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등)은 아람어로 쓰여졌다. 이 아람어는 유대인 포로기 이후에 점차로 유대인의 구어(口語)로써 히브리어를 대신하게 되었던 방언이었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사무엘,열왕기를 상,하권으로, 소예언서 12편을 각기 1책씩으로 분리하여 편집했으며,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24권의 책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39권으로 재편집 했다. 구약성경의 정경이 지금의 39권(히브리어 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AD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 였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게 지자 위기감을 느낀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정경을 확정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오경만을 고수하던 사두개파가 괴멸된 이후 바리새파가 주도하여 AD 90년경 팔레스타인 지중해 연안의 작은 마을 얌니아(Jamnia)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이 회의에서 결정된 유대교 경전을 토대로 정경으로 확정 지었으나, 카톨릭은 외경을 구약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수용했다. 구약성경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의 일부분 등 몇몇 부분이 그러한데 카톨릭에서는 이것을 '제2정경(7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