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지로 끼워 맞춘 예수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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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로 끼워 맞춘 예수신화

적 그리스도 1 6,789 2006.07.13 01:54

▶ 억지로 끼워 맞춘 예수신화 (2)<?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4) 예수의 이집트거주 끼워 맞추기

 

예수가 이집트에서 거주했다는 것을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도 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2장 15절]

 

위 구절은 호세아 11장 1절의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호세아 11장 1절]

 

그러나 호세아서 11장의 전반적인 글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을 말한 것이다. 어떻게 이 구절이 예수의 이집트 체류의 사실에 적용 될 수 있을까? 표면상으로 볼 때 두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예수와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이집트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만 공통점을 갖는다. "내 아들"이라는 호칭 역시 이스라엘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출애굽기 4장 22~23절에서부터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5) 찾을 수 없는 예언

복음서의 저자들은 한술 더 떠서 가롯유다가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서 밭을 샀다는 일화까지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27장 9~10절]

 

그러나 예레미아서, 또 예레미아 애가 및 그의 제자 바룩의 모든 문서에서 그런 예언은 찾아볼수가 없다. 이런 것은 또 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장 37~38절]

 

이런 예언 역시 구약 어디에도 없다.

 

(6) 사도행전의 궤변

복음서 뿐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예수의 일대기와 구약을 연관시키려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이 구약에서 예언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시편 16편을 인용했다. 문제는 베드로의 시편해석이 거의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점인데, 오늘날 사도행전의 해석을 배제하고 시편 16편 자체로만 볼 때는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가 없다. 또한 이 시편이 당대에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읽혔다는 증거 또한 없다. 시편 16편은 본래 여호와의 보호를 확신하는 '신뢰의 시'로서, 시인이 자기 수명(壽命)에 합당치 않은 횡사(橫死)에서 건짐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베드로는 시인이 자신의 생명이 보전되리라고 확신하는 내용이 담긴 부분을 시편 16장 8~11절을 인용한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사도행전 2장 25절~30절]

 

아래는 베드로가 인용했다는 시편16장의 전문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장 전문]

 

시편16장 전체를 놓고 아무리 읽어 봐도 예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시편16장과 예수부활을 연관 짓기 위해 사도행전 2장 29~36절에서 베드로가 펴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분명히 죽었고 그 증거로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행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2:29). 따라서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시신이 썩지 않으리라'는 언급은 다윗 자신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7장 12-13절에 기초한 시편 132편 11절에서 여호와가 다윗에게 맹세하시기를 다윗의 자손을 영원한 왕위에 앉히겠다고 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자신의 후손으로 올 영원한 왕에 대해 그의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행 2:30). 다윗의 후손인 예수를 여호와가 다시 살렸다. 따라서 이 시편 구절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행 2:31-32). 정말 이보다 더한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해석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시편 16편의 아전인수격의 황당한 해석은 또 등장한다. 사도행전 13장 33~39절에서의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베푼 권면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시편 16장 10절이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사도행전 13장34절에 따르면 바울은 사무엘하 7장 12-13절의 다윗의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이사야 55장 3절 후반절을 통해 상기시키고 그것을 시편 16편 10절의 '썩음을 당치 않는 은사'에 연결시키는 황당한 억지 논리를 펴나간다.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사도행전 13장 35~37절]

 

아마도 초기교회의 교리적 핵심을 이루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예언성취적 이해에는 시편 16편의 억지 해석이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나타난 궤변(詭辯)은 오직 부활의 확실성을 당시의 성경, 즉 구약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취한 해석상의 고육지책(苦肉之策)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신약이 등장한 것은 예수의 시대가 훨씬 지난후 1세기가 지나서야 구두전승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예수의 행적이 기록되어지기 시작한 연유에서다.

 

 

(7) 유대교 영지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 경전해석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생존 시에 생겨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모두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서는 유대의 폭동 66년에서 77년 사이의 폭동과 그리고 132년에서 135년사이의 폭동이 일어난 중간 기간에 기원한다고 추측한다. 복음서들 중 최초의 것은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이라고 생각되고 후대의 그럴 듯한 추가물인 부활에 관한 기사를 제외하면 66년~77년의 기간중의 작성되었다. 아무리 빨리 쓰여 졌어도 AD 90년 보다 빠르지는 못 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다시 말하면 신약이 등장하지 못한 당시의 초대교회 사람들에겐 구약과 간약적 문헌들이 초대교인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간약적 문헌들은 신구약의 중간시기에 등장했던 경전으로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신앙과 묵시문학의 상당한 영향을 받은 문서들이다. 나중에 외경으로 버려지게 된다.) 따라서 예수를 목격하지 못한 초대교회의 신도들에게 사도들은 예수의 존재를 구약을 통해서 증거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여주는 시편 16편의 해석은 초대교회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증명의 논리로서는 기능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성경에 무지했던 당시의 예수 추종자들에겐 그럴듯한 해석으로 이해되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당신도 사이비종교에 심취해 보라. 성경을 이상하게 연결시켜서 말도 안되는 종말론을 주장한다 해도, 일단 중독되면 교주의 말이 전부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은 기독교가 유일할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등장한 유대교의 영지주의자들도 구약을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다음 장에서 필자는 예수의 일대기 상당부분이 이교도의 신화 속에서 가져왔다는 자료들을 여러 분께 설명할 것이다. 특히 에세네파는 예수보다 150년가량 앞서서 예수와 유사한 행적을 보이는 '의로운 선생'이라는 메시아를 숭배하던 유대교의 영지주의자들었다. 이들은 기독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정통유대교와는 거리가 먼, 중근동의 메시아신앙과 영지주의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던 집단이었다.

 

최근에 발견된 사해문서는 에세네파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해문서에서는 현존하는 최고로 오래된 성경의 사본들은 물론, 구약의 주석서까지 다양하게 발견 되었다. 그 중 구약의 주석서는 쿰란의 에세네파의 독단적인 해석방법과,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를 구약속의 구절들과 연결시키기 애를 쓴 흔적이 있으며, 위에서 지적한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잘못된 구약 인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쿰란의 사해문서 중에는 '페샤림'(myrvp)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18개의 문헌이 있다. 이 '페샤림'은 구약 성경의 개별 서들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페샤림'은 구약의 구절들을 쿰란 공동체와 그들의 메시아에 대해서 구약을 연결시키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쿰란 공동체의 독특한 구약 읽기와 해석 방식을 '페쉐르'(rvp)라 한다. 쿰란의 '페쉐르'는 일정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페샤림의 기본 유형은 '레마'(lemma)를 구성하는 성경 구절이 적힌 부분과 그것에 이어지는 인용 구절 해석 부분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불규칙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해석 부분은 rbdh rvp 또는 wrvp로 시작된다. 쿰란의 독특한 성경 해독 방법의 이름이 된 이 rvp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히브리 단어로서의 rvp는 구약에서 오직 한번 전도서 8장 1절에서만 등장한다.  rb'D' rv,Pe ymiW ~k'x'h,K. ymi (지혜자와 같은 이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전 8:1a).

 

쿰란의 사해문서에서는 주로 숨겨진 성경 구절의 뜻을 해석하는 작업에 이 단어가 사용되어 학자들의 다양한 번역을 낳았지만, 전도서의 구절에 기초해 '해석'(解釋)이란 말로 옮기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도입부 다음에는 레마의 성경 구절에 있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쿰란 공동체와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과 연결시키는 해설의 작업이 뒤따른다.

 

'레마'와 해석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 방식은 다양하다. 호르간(Horgan)은 네가지로 분류된 페쉐르 해석의 방식을 발견했다.

① 레마의 구절에 있는 행위, 생각, 단어들과 유사한 현재의 상황을 찾아 맞추어 설명한다

② 레마의 기술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어근, 개념 등의 연상(聯想) 작업을 통해 현실 상황에의 적용을 유도한다

③ 레마에 있는 인물이나 사건과 은유적인 동일시(同一視)를 유도하기도 한다

④ 레마와 그 해석이 드러나는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억지로 연결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이와 같이 구약속의 예언이 자신들의 에세네파 공동체와 현재 일어나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구약을 끼워맞추는 페쉐르의 형태를 롱게넥커(Richard N. Longernecker)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This is that) 방식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또, 쿰란의 에세네종파는 그들의 교리를 합당화 시키기 위해서 구약속의 문장이나 단어를 변경시켜 인용하기도 했다. 티모시 림(Timothy H. Lim)은 하박국 주석에서 원문을 변경시키는 경우를 두 차례 찾아냈다. 사해문서의 하박국 주석 12장 1~10절에 보면, 하박국 2장 17절이 인용되고 '사악한 제사장'에 대한 페쉐르가 주어진다. 여기서 레마에 인용된 본문과(1a) 해석에서 다시 인용하는 본문이(6b-7a) 다르게 나타난다.

 

hyrq #ra smxw ~mda ymdm (1QpHab 12.1a)

#ra smxw hyrq ymdm (1QpHab 12.6b-7a)

 

해석의 재인용에서는 hyrp와 ymdm 사이의 단어들을 생략함으로써 원문의 "사람들의 피 때문에"를 "도성(都城)의 피 때문에"로 읽어 그 내용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악한 제사장'의 사건에 맞도록 조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석가가 하박국 1장 13절과 '압살롬의 집'의 옳지 못한 행위를 연결시키는 1QpHab 5.8-12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본문 변경이 발견된다. 하박국 원문에서 두 미완료시제 동사 jybt와 vyrxt의 주어는 여호와이고 두 동사 모두 2인칭 단수를 받고 있다. 그런데, 하박국 주석의 저자는 jybt를 wiiIjybt로 변경하여(5.8) 여호와 대신 '압살롬 집'이 문장의 주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의(義)의 선생'이 핍박을 받을 때 침묵한 것은 여호와가 아니고 '압살롬의 집'이 된다.

 

이런 아전인수격 구약의 인용은 쿰란의 에세네파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구약을 바라본다는, 자신들만의 공동체 중심의 '페쉐르'로 읽어야만 한다는 신학적 부담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페샤림의 저자들에게 암시되어 있는 논리는 마태복음에게서 읽혀지는 논리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역시 상당히 영지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이단으로 배척 받아 사라졌지만, 정작 기독교의 원류는 영지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스텐달은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 방법을 "페쉐르 유형"(pesher type)으로 정의했고 롱게넥커는 "페쉐르 처리법"(pesher treatments)이라 명명(命名)했다.

 

물론 신약과 사해문서의 페샤림은 형식상으로는 서로 다르다. 신약은 내러티브(narrative)나 서신의 형태로 전개되고 이야기 진행이나 주장 서술의 중간 중간에 구약의 인용이 삽입되어 사건과 인물과 개념의 예언 성취를 증명한다.

반면에 사해문서의 페샤림은 주석의 형태를 지니며 성경구절을 읽는데 있어 쿰란 공동체의 인물과 사건이 해석의 열쇠로 기능한다. 하지만 구약을 예언으로 보고 그 예언이 자신의 공동체 속에 성취되었다고 보는 해석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좀더 이야기를 발전 시키면 에세네파와 같은 유대교 영지주의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속에서의 잘못된 구약인용, 즉 예수의 행적에 억지로 구약에 끼워 맞추기는 기독교의 원류가 영지주의였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해 진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엄연히 다르며,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은 예수를 증거하지 않는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장 23절]

 

이것은 구약에 등장한 사형에 관련된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구약의 저자가 예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기록했음은 위의 구절로써도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Comments

귀곡산장 2011.04.13 13:41
토기장이에게 은삼십을 주었다는 얘기는 예레미야에는 없고, 스가랴에 있긴 한데,  그 의미는  신이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깬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역시 마태의 예언 구절과는 아무 상관없는 구절이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져 버려라." 그것은 그들이 내게 알맞은 삯이라고 생각해서 쳐 준 것이다. 나는  삼십 개를 어, 주의 성전에 있는 토기장이에게 던져 주었다 - 스가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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