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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라를 상납한 아브라함<?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창세기 12장에는 깜짝 놀란 이집트의 파라오가 아브라함을 불러 호통을 친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창세기 12장 18~19절]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이주한다. 이집트에 들어가기 전,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 사래를 탐하는 자들이 자신을 살해할 것을 두려워한 아브라함은 미리 아내에게 서로를 누이관계라고 하자고 약속한 후 이집트로 들어간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정말로 오누이 관계였다. 즉 아브라함과 사래는 근친혼을 한 것이다.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창세기 20장 12절]
어머니만 다를 뿐, 같은 형제자매끼리 결혼을 했다는 것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당시 이집트를 비롯해서 중근동 지역에서 근친혼이 횡 횡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집트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파라오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파라오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아브라함을 처남(妻男)으로 여겨 노예들과, 양, 소, 나귀, 낙타 등의 푸짐한 선물을 주게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파라오에게 남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여호와의 재앙이 쏟아진다.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는 속담이 딱 맞는 말이다. 아무래도 창세기 20장의 아비멜렉의 왕과 달리 재앙까지 받은 이집트 왕은 아브라함의 아내와 동침(同寢)까지 한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파라오가 깜짝 놀라 아브람에게 가서 이럴 수 있느냐고 호통치는 대목이 위 구절이다. 이집트에서 추방된 아브라함은 파라오에게 받은 선물까지 챙겨 가지고 나왔다. 마누라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돈을 번 남편처럼 괴상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친 여동생과 결혼 했다는 것은 더 엽기적이다. 이런 사람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으면 '기독교 윤리 실천 본부'같은 단체에서 입에 게거품을 물며 정죄하려고 달려 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 속에 나오는 거룩한 인물들의 행동이란 말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를 넘겨주는 이야기는 창세기에 두 번에 걸쳐 중복되어 기록되었는데, 첫 번째는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창세기12장에서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두 번째는 창세기20장에서 아브라함 부부가 그랄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 이니라." [창세기 20장 1~3절]
이집트에서 벌어졌던 황당한 사건이 또 한번 벌어졌으니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지만, 한가지 우스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그의 아내를 넘겨줄 때 사라는 90세정도의 노파였다는 점이다. 원래 그들이 성경에 등장할 때인 창세기 12장 4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벌써 75세였으며 아내 사라는 65세였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창세기의 인물들이 장수를 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나, 그랄에서 사라를 아비멜렉 왕에게 넘겨주는 사건이 있기 전, 여호와는 100세가 된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데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월경)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세기 18장 11~13절]
이렇게 창세기 18장에서 90세의 사라는 자신이 늙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창세기 20장에서는 아비멜렉 왕이 사라를 또 한번 아내로 맞아들인다. 아브라함은 월경마저 그쳐서 임신도 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90세의 할머니로 아비멜렉왕을 농락하였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한편, 창세기 26장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으로 가장시켰다가 아비멜렉왕에게 들통난 이야기기 또 반복되고 있다.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창세기 26장 7~10절]
즉,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삭이 사람들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한편 아비멜렉왕은 창 밖을 보다가 황당한 일을 바라본다. 공동번역판의 동 구절에는 다음과 같다.
"불레셋 왕 아비멜렉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이사악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애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친 여동생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 해놓고는 거리낌 없이 낯뜨거운 애정행위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아비멜렉왕은 경악한 것이다.
이런 짓이 성경에서 되풀이 되는 이유는 중근동에서 유행했던 여러 종류의 신화들이 마지막에 문서화 되면서 생긴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아내를 되찾는 남편의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케레트(Keret) 서사시를 들 수 있다. 고대에 내려오는 여러 전승들에 따르면, 어떤 신화 속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집트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어떤 신화 속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또 다른 신화 속에서는 이삭이 아내를 여동생으로 가장시켰다가 낯뜨거운 애정행각이 발각되는 등의 여러 종류의 전승이 내려왔을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로 전해 내려오던 전승이 바빌론 유수 이후 문서화 되면서 똑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쨌던 간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런 황당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경전을 언제까지 거룩하다고 여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