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나안 정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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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안 정복설

적 그리스도 0 10,190 2006.07.15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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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모세의 엑소더스가 이집트의 역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음을 말해 두었다. 이번에는 고고학에서 바라보는 히브리민족의 가나안정복에 대해서 연구하는 가나안 정복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이 가설들은 고고학이긴 하지만, 구약학자들이 연구해오는 중요한 가설이기도 하다.

 

가나안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후기청동기 시대(B.C 1550~1200)의 말에 해당한다. 아마르나 시대를 고려하면 당시 가나안에서 발생한 심각한 사회적인 혼란은 이집트의 패권정치의 공백과 북으로부터 밀려온 새로운 이주자들의 소요, 그리고 가나안 내의 도시국가들 간의 정치적인 알력으로 발생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올 시기의 여러 성읍들을 발굴한 후의 고고학적인 결과는 유대인들의 가나안 출현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곧 중앙산지의 벧엘(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쉐펠라의 라기스, 그리고 갈릴리의 하솔(여호수아에 의해 멸망)은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성경의 입장을 옹호한다.

 

하지만 성경의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된 몇 요새화 된 성읍들은 이 시기에 파괴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는 여리고를 초토화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수6:24), 이곳을 발굴한 케욘(K. Kenyon)의 입장은 여호수아에 무너졌다고 주장하는 여리고의 실재 성벽은 기원전 1550년 경의 것으로 이것은 힉소스의 추방과 관련하여 이집트인들에 의해 무너진 것이지 이스라엘의 침공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주장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말에 여리고는 단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는 입장이다.

 

아이 성의 점령사건도 마찬가지다. 초기청동기 시대의 말에 파괴된 이후 후기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는 성읍이 들어 서지 않았던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파악한다. 이런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 고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들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기원에 관해 소개하는 모든 이론들은 크게 5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대민족이 한꺼번에 외부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는 가정,

둘째는, 유대민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나안에 점진적으로 이주했다는 가정,

셋째는, 유대민족이 가나안의 토착민으로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는 가정,

넷째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에 철기문명을 가진 유목민이 정착하여 유대민족으로 발전했다는 가설,

다섯째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틈타 아피루,농민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우선, 유대민족이 외부로부터 가나안에 이주해왔다는 가설을 살펴보자. 이 이론은, 13세기 정복설(13th-conquest)이라고도 불리며, 올브라이트(Albright), 존 브라이트(John Bright), 라이트(G. E. Wright)등의 학자들이 지지했다. 이 이론의 특징은 성경의 기록을 기원전 13세기에 유대민족이 통일된 단일체로써 가나안을 침략했다는 가설이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 연대를 기원전 1220년으로 상정하고 민수기 14장 33절을 바탕으로 기원전 1260년을 출애굽의 연도로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 1장 11절을 근거로 노예였던 유대 민족에 의해 람세스와 비돔성이 건축되었다고 전제했지만, 막상 람세스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했지만 이집트 제18왕조 점령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써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다는 주장이 효력을 잃는다. 그 외에도 여리고, 아이, 기브온 등의 유적에서는 군사적 충돌에 관련된 역사적 증거가 성경적 기록과 맞지 않는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 문제점에 대해서 보완한 것이 점진적 이주설(The infiltration theory)이다. 알트(A. Alt), 노스(M. Noth), 바이페르(M. Weippert), 밀러(J. M Miller)등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이집트에서의 아피루들의 대규모 이동이 없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가나안 정복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점유 또는 정착으로 여겨진다. 여러 차례로 다양한 기원을 갖는 아피루 집단들이 정착해 가면서 가나안 정복은 다윗 시대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처음에는 가나안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은 없었고 단지 점진적인 유목민들의 침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광야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가축들을 먹일 목초를 찾아 인구가 희박한 중앙산지로 이동해 왔다. 그들은 가나안인 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통혼하기도 했지만, 후기에 들어서 유목민들이 가나안의 비옥한 지역인 해안평야, 이스르엘 평야, 그리고 쉐펠라 등으로 확장할 무렵이 돼서야 가나안인들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경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신속한 가나안 정복은 여호와 신앙을 강조하였던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신명기 학파들의 종교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A. Al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단계에서는 전적으로 이주가 평화로웠다. 반유목들(semi-nomadic)들이 가나안 변두리 지역에서 겨울을 지내며 살다가 점차 여름에도 가축 떼를 먹이기 좋은 가나안 구릉 지역으로 정착하여 농경화되었다. 가나안 고원 지대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을 때에는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는 거주민과 갈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착이 완료되고 통합되면서 더욱 수가 많아지자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으로부터 평야와 저지대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했다. 군주제 초기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격렬한 군사적 충돌과 함께 영토확장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유대민족이 원래부터 가나안 토착민이었다는 가설을 설명해 보겠다. 이것은 농민 반란설(The peasant revolt theory)이라고 불리며, 멘델혼(G. E. Mendenhall), 고트왈드(N. K. Gottwald)등의 학자들이 주장했다.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왕국들을 전복하기 위해 그들의 적대세력들과 손을 잡았던 요단 동편으로부터 반란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후 이주한 유대민족들은 요단 서편 지역에서 사회적인 혁명을 주도했다. 이집트의 정치적인 후광을 업고 도시국가들을 유지하는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유대민족이 야합하여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민족은 큰 저항 없이 가나안의 여러 성읍들을 차지했다는 견해이다. 이 학설은 세겜지역을 아무런 반항 없이 점령하게 된 성경의 일부 기록과 파괴된 흔적이 없는 여러 성읍들을 유대인들이 접수하게 된 배경을 일부 지지하는 듯하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등에는 농민폭동에 관한 그 어떤 기록이나 암시도 없다.

 

멘델혼(G. E. Mendenhall)은 아피루(Apiru)와 히브리(Hebrew)라는 두 어휘를 동의어로 보고, 그 뜻을 '자신에게 입지를 부여했던 사회조직으로부터 의무를 폐기하고, 그것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거부한 자'라는 뜻으로 재정의 했다. 멘델혼은 "만약 초기에 유대인이 히브리인라고 불려졌다면, 그들이 관계를 끊었던 정통적 사회의 관점에 의해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초기의 유대인들은 폭압적인 도시 통치 체제하에서 빠져 나온 가나안의 토착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소수의 아피루 집단이 가나안에 당도했을 때 전제군주에게 핍박 받던 가나안 농민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가나안 농민들에게 모세의 언약이 호응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멘델혼의 사회학적 접근방식이 처음 제기 되었을 때 학계에서는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러나 브라이트(Bright)의 '이스라엘의 역사'(A History of Israel)의 제2판에서 이 이론이 거론되자 크게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 후에 이 이론은 강력한 기반을 제공하는 지지자들이 나타났다. 멘델혼(Mendenhall)은 정치적,주체적 반란을 주장한 반면, 고트왈드(N. K. Gottwald)는 물리적, 지리적 반란을 거론했다. 고트왈드는 멘델혼의 모세의 언약 개념이나 종교적 이념들을 제거하면서, 출애굽의 역사적 가치에 큰 회의를 품었다. 멘델혼이 단기간에 일어난 반란과 이스라엘의 출현을 설명했다면 고트왈드는 그 과정이 약 2세기에 걸쳐 사회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지대의 철기 1기(Iron 1)의 문물의 정착은 저지대에서 철수한 반란 집단의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번에는 핑켈슈타인의 이스라엘의 유목 기원설(Finkelstein's view of Israel's nomadic origins)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이론은 철기 1기의 정착 과정의 연구로, 고고학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여 이론을 세운 것이다. 이 이론을 먼저 제기한 것은 프리츠(Fritz)였는데, 그는 후기 청동기의 가나안 문화와 오랜 접촉을 가진 초기 유목민들이 철기 1기의 정착민이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프리츠는 이들 유목민이 원래 어느 지역에서 유입해 들어왔다고 보는 반면, 핑켈슈타인은 가나안 철기 1기의 정착민은 토착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철기 1기의 정착민을 유대민족의 시조로 여겼고, 프리츠도 정착과정중인 고지대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핑켈슈타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초기 철기 1기 정착민은 중앙 산지와 작은 산간 분지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목축과 농업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과수 농업은 에파래미트(Epharaimite)고지의 서쪽 경사면에 정착한 후에 진행되었다. 이런 식의 정착은 정착민이 유목민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철기 1기의 취락 형태는 중앙에 공간을 두고 그 주위에 거주지가 둘러싼 전형적인 타원인데 그것은 유목민의 취락구조(duwwar)와 닮았다. 또한 철기 1기 거주민들의 지하 저장 시설의 광범위한 사용은 정착중인 유목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간결하고 넓은 실내, 기둥과 4개의 방으로 된 집들은 베두인 양식에서 발달된 것이다. 이 양식은 철기 1기 정착민보다 앞선 유목민의 것임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칼라웨이의 해변 평야로부터의 인구 대체설(Callaway's theory of displaced population from the coastal plain)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칼라웨이는 철기 1기 정착민이 해변 평야와 세펠라(shephelah)로부터 온 농경민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 근거로, 옥상 물탱크를 지닌 주택이 고지대에서 발견된 사실과 당시 비탈에 계단형 농지를 만들었던 점 등을 들어, 유물이 세펠라와 해변 평지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그는 고지대 철기 1기 정착민은 바로 세펠라와 해변 평지에서의 인구증가와 충돌로 발생된 피난민이라고 한다. 이 가설이 농민 반란설과 비슷한 점은 철기 1기 정착민들이 저지대로부터 올라온 피난민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도 렘체의 진화적 이스라엘 설(Lemche's evolutionary Israel)이 있다. 렘체는 혁명적 기원설을 거부하고 대신 진화적 이스라엘을 설명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재구성 하기 위해서는, 바빌론 유수이후에나 등장한 성경은 역사적 근거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고고학적 자료로써 재구성하려고 했다. 렘체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 BC 14세기 전에 아피루의 거주지가 중앙 고지대에 있었으며, 아피루는 팔레스틴의 작은 성읍과 분지로부터 도망 온 토지 보유권자이거나 이전의 예속된 농민들로 구성된 반사회적 구성원들이었다. 아피루는 그 당시 정착민이 아니었고 일부는 농작을 했지만 대부분 무법적인 약탈자로 살았기 때문에 고고학적 자료로써 그들의 생활상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는 100년 후에 고원지대에 새로운 정착민이 등장했다. 이때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했고 철기1기 정착민은 농경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단일 종족화가 진행되어 이스라엘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R. B.쿠트와 K. W. 휘틀럼의 종합이론(The synthesis of Coote and Whitelam)을 설명해보겠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성을 거부하면서, 역사가의 직무는 비교 역사학과 인류학적 정황 안에서 고고학의 기록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기 1기 정착의 성격과 지역을 검토한 결과, 그들은 고고학적 증거가 정복설, 이주설, 반란설과 잘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쿠트와 휘틀럼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후기 청동기 시대의 끝 무렵에 발생한 경제적 쇠퇴라는 정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크게 의존했던 지역간의 무역이 약해지면서 가나안 성읍의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지대에 있는 성읍 중심지의 경제가 쇠퇴함에 따라 유목민, 농민, 약탈자들이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 동안에는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고지대에서 농업이 발달하여 여러 집단들을 불러들였다. 이에 농업과 유목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착이 착수되었다. 그 결과 고지대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적, 인종적 형태가 등장했다. 쿠트와 휘틀럼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오로지 농민이거나 약탈자 무리거나 유목민만은 아닌 이 모두의 결합체였다고 보았다. 이들 학설의 장점은 협소한 접근법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광범위한 종합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비평적인 역사학자들은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복은 오랜 기간을 두고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고고학은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려거나 부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고고학은 단지 발견된 것을 통하여 기술하고 그 자료를 통하여 학문적인 이론을 전개해 갈 뿐이다. 이것은 세계역사에 있어서 고고학이 가지는 성질과 같다. [김희보 / 구약이스라엘사 / 총신대학출판부] [레온 우드 / 이스라엘의 역사 / 기독교 문서선교회] [김정우 / 역사서연구 /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강의안] [정규남 / 구약개론 / 개혁주의신행협회] [글리슨 아처 / 구약총론 / 기독교문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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