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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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교황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를 기독교화 시키는데 앞장선 인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가 그 동안 핍박 받던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수없이 변질되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들 그리스파스와 장인 미키시미안을 살해하였고 그의 처 파우스트를 끓는 열탕 속에 쳐 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했던 폭군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러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종교회의는 하나님의 결정이다."고 세상에 선포한 공적이 있다 하여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서한 것뿐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6명이나 되었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시민) 또는 가이사(caesar) 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시이저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파에게 암살 당하기 까지 했다. 결국 시이저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 (옥타비우스는 그 명칭 보다는 존엄한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명칭을 자주 들었음). 그 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 후, 군인 황제시대인 AD 69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 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중 6명의 황제 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운명을 건 물비안(Mulvian)다리에서 전투를 하기 전 꿈속에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꿈에서 본대로 군사들의 방패에 기독교의 상징을 표기한 XP를 표시하도록 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동안 핍박 받았던 기독교를 AD 312년 공인 하였다고 하며, 그의 사후 AD 392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즉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그는 평생 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으며, 그의 통치하에서의 로마의 국교는 태양신 숭배였다. 실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렸으며,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승리의 태양, 로마 식 미트라)는 당시 제국국기는 물론 화폐에 까지 등장했으며,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새기도록 했다. 심지어 그의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 탑을 세워, 미트라신 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게 했다고 한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음에 임박한 후, 즉 사망하기 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즉, 그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당시,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티누스가 참 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의 원조를 원했고, 따라서 권력을 놓고 다투던 여러 명의 황제들 중에 어느 누군가와 결탁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키(A. Kee)의 견해에 따르면 다신을 믿으면서 민주주의적으로 자유분방한 로마인들(그래서 황제가 여러 명이나 등장할 수가 있었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안으로 일리리안(Illyrian)은 태양 숭배를 생각했는데, 콘스탄틴도 처음에는 그와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즉, 그의 태양신숭배는 유일신 사상으로 로마인들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A. Kee / Constantine versus Christ / London / 1982.]
헨리 채드윅은 그의 저서 초대 교회사에서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적 태양을 숭배하였다......(중략)......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중략)......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중략)......그리스트교 교리에 대한 그의 이해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Henry Chadwick / 초대교회사(The Early Church) / 서영일 역 / 종교개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