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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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이 문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투표로 결정 나기 전까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켰으며 그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의 정통적 교의가 확립될 때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1) 제1차 종교회의(니케아)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이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신(神)이 되어 버렸는데, 기존의 상당수의 기독교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그러한 점은 9장의 삼위일체 설의 허구성에서 신약의 저자들도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와 여호와를 동등하지 않게 기록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초대교회사람들에게 예수는 신의 독생자로 모든 창조물 중에 으뜸가는 존재요, 모든 선지자중에 으뜸인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에 놓인 중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 속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차츰 미트라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미트라의 성 삼위일체 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 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된다. 미트라의 숭배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하면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려고 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로 종교회의를 사회하면서 공포적인 분위기로 회의를 주도해갔다. 콘스탄티누스는 모인 사람 중 몇 명을 추방하고 종교회의의 다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자는 누구나 죽이라고 명령했다. 교회의 불일치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므로 연합하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 회의장은 그야말로 공포의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이들을 감독들(교부)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각자 장로 두 명과 수행원 셋을 거느리고 니케아에 모였다. 감독들 중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인물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 295~373)이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신(神)이 무(無)에서 창조한 존재로, 인간의 영(靈) 대신에 로고스가 들어간 존재라고 말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는 무(無)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전의 영원에서 신(神)이 창조한 존재로 본질은 신(神)이 아니나, 신과 비슷한(homoi) 존재라고 주장했다. [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 1992]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신경(信經)은 폐기되고, 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어 니케아신경(Nicaenum)이 공포되었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코르도바의 오시우스(Ossius von Cordoba)의 말을 빌려 한 말이다. 이 회의에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인간에서 신이 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 당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때의 투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중략)......공의회가 발의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공식 문을 직접 제안하였다......(중략)......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되어 단지 두 명만 제외하고 신조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Encyclopaedia Britannica]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이교도적인 종교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우선, 주목할만한 것은 부활절의 시기였는데, 당시 지중해 국가에서 봄의 여신축제(동시에 미트라의 부활절)시기를 부활절로 결정지었다. 이 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가운(gown)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 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 등의 의식이 도입되었다.
(2) 제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작은 종교회의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콘스탄티노플 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는 모두 150명이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의 교의(敎義)에 관하여 논의되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함을 옹호했으며,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했다. 첫 번째 회의에서 예수가 신과 동등해진 후, 2차회의에서는 여기에 성령이 끼워져서 삼위일체가 결정된 것이다.
또한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되었으나, 그 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따라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 했는데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아리우스파 Arianism항목].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 서로마제국의 정제(正帝) 그라티아누스에 의하여 동로마의 정제로 선임되어 사르마티아인과 서고트족을 토벌했다. 서제(西帝)가 살해된 후 서방의 군대 실력자와 제위참칭자 (帝位僭稱者)들을 쳐부수고 전제국을 수중에 넣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분할 통치되고 있던 제국을 394년 재통일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계승시켰으며, 380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파 신앙으로 정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아서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나, 실상 그는 콘스탄티누스를 뺨치는 폭군이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에게 명하여 이방종교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전령(神殿領)을 몰수시키면서 이교도를 압박했다. 394년에는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켰다. 또, 빈민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으며, 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390년에는 데살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이 대학살 되기도 했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황제 모두 내로라하는 폭군이었던 셈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두 번째 종교회의가 끝난 후에도 간헐적으로, 401년 카르타고 종교회의(The Council of Carthago), 415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415년 누미디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umidia)등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작은 종교회의에서는 유아세례(幼兒洗禮)가 공인되었다.
카톨릭에서 행하는 유아세례는 기독교의 원죄론 을 정립한 어거스틴의 작품이었다. 216년, 터툴리안은 성인들만 침례에 합당한 대상이라고 했고, 96년경에 초대교부였던 클레멘트(Clement)는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고, 그가 침례를 받을 만한지 심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스우스(Dionysius)역시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침례를 베풀었다. 쁘와띠에의 힐라리(Hilary), 아타나시우스, 달마티아의 제롬, 가이사랴의 바실도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 크리소스톰, 나지안젠의 그레고리, 밀란의 암브로스도 같은 말을 했다.
역사가들은 90~300년 사이에는 아무도 유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보는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이에 대한 교리들을 가르친 점이 주목된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오리겐에게 유아세례를 인정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오차아드(Orchard)는 유아세례가 카톨릭 교리로 처음 나타난 것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글에서라고 하는데, 그는 오리겐 처럼 외경을 담은 70인역이 영감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누미디아 종교회의에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저주했다. 그 이유는 도나티스트 (Donatists)들이 성인에게 다시 침례(재침례)를 베풀 때 그들은 처음의 세례(유아세례)가 의미 없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며 성인침례는 유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단적이라고 주장을 펴나갔다. 418년에 개최된 카르타고 종교회의는 어거스틴을 지지하여 그의 주장을 정통 교리로 인정했다. 후에 416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789년 샤를마뉴 (Charlemagne)는 유아세례를 국법에 규정하기조차 하였다.
유아세례라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많은 수의 '신자들'이 아기를 교회에 데려오지 않으면 파문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데려와야 했으며, 물을 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기독교인으로 못을 박아버리는 것이었다.
(3) 제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AD 431년에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로, 예수의 품격(品格)과 마리아 숭배를 둘러싼 논란이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이 회의에는 250명이 참석했는데, 에베소는 오래 전부터 다이아나를 동정녀와 어머니 여신으로 경배해온 도시였으며, 지금도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던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티오키아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했다. 반면에,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 시리아의 주교들,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과,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적수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회의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의적으로 회의가 개회 되었으며, 여기에서 마리아를 신(神)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이 회의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였지만, 두 황제는 모두 누이와 황후, 어머니들에 의하여 섭정이 이뤄졌던 허수아비 왕으로 회의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방관아래 네스토리우스파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회의는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은 후에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기도 했다.
(4) 제4차 종교회의(칼케돈)
AD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제4차 종교회의로 참석자는 500~600명정도로 추측된다. 이 회의의 개최자는 형식상으로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의 주장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그녀가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재차 단죄되었고, 결국 5세기경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한 뒤 동방으로 건너가 경교가 되었다.
칼케돈에서 열린 4차회의에서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결정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니케아공의회(325) 및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결정된 후에도,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이 계속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이 나게 된 것이다.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론 을 믿었지만 단성설을 믿은 유티키아파가 단죄 당했다. 그들이 주장했던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이란, 성육신(成肉身)한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완전히 결합 또는 융합하여 단일의 성(性)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론(論)이다. 즉 예수의 인성까지도 신성에 속한 것이라는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의 몸은 우리의 몸과 같지 않고 그의 육체도 신성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성설은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등, 이른바 알렉산드리아학파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설(說)이 배척된 뒤, 에우티케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교회는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이러한 단성설을 부정하고, 성육신의 그리스도는 신인양성일인격(神人兩性 一人格) 이라는 양성설(兩性說)을 교의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 예수의 인성과 육신까지 신이었다는 단성설이 배척되었지만, 복음서의 마지막에는 부활한 예수가 육신 채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단성설도 타당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이 회의에서 로마 교황의 탄생되었으며, 교황에 의해서 교리가 통일될 수 있게 되었다.
(5)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553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소집한 회의로, 156명의 동방정교회의 주교(主敎)들만 참석하였다. 당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의 공동통치자인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에 의해서 회의가 주도되었다. 그녀는 청색, 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 때 황제자리를 되찾아 주었던 공로자였다. 이 회의에서는 유스티아누스가 이미 교서, 법률로 먼저 공포해 놓았던 것이 의제로 채택되어 회의는 형식적인 것일 뿐 이었다. 따라서 5차종교회의는 갈채 회의라는 이름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4차회의에서 예수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지만,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단성설 지지자가 아직도 많았다.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신학과, 그리스도의 양성설과의 조화를 찾고자 로마 측에 양보를 강요했으나, 팽팽히 대립함으로써 결국은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이 회의에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신의 도성'(De Civitate)을 세상통치를 위한 이론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 이론의 핵심은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의 원죄론 을 정립하였던 어거스틴이라는 자는 로마정부에 대단한 아첨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세례를 주장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을 태아 나자마자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에 충성케 하고,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기독교국가, 즉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그는 대단한 아첨꾼이자 수완가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교리적인 사안이 논의되었다. 인류의 타락이 누구의 죄인 가하는 문제이다. 만일 여호와가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담과 이브의 거역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어째서 전능하신 신은 타락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 루시퍼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관념은 유대교의 또 다른 창세기인 하가다서에서도 알 수가 있다. 하가다서에서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자, 천사들이 아담을 시기하였다고 한다. 천사들은 아담을 불로 죽이고 싶었지만, 여호와가 그것을 막아 주었다. 그 중에 사탄이라는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담을 가장 시기 하였다고 한다. (다른 천사들은 날개가 6장이었음) 천사 미카엘은 신의 형상을 한 아담에게 경배하였으나, 사탄은 그것을 거부하여 천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천상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사탄이 타락한 천사이고, 이것이 인간을 죄짓게 했다는 외경적인 사상이 이 회의에서 그대로 주입되어 버렸다. 그러나 무한과, 영생, 행복이 가득한 완전함과 전지전능함 세계인 천국의 천사가 창조자인 신에게 거역했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결국 천국이나, 천사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여호와는 전지전능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개념은 이 회의에서 결정을 짓게 되었다. 즉, 예수가 피 흘리고 죽은 것을, 동물의 제물을 바치는 구약적 제사와 연관 지어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제사의 의미로 결정지은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입다의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사사기 11장)정도의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미개한 의식을 아름답게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뉴저지 주 뉴어크(Newark)의 감독파 교구의 독립 주교인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은 자신의 저서인 '어째서 기독교가 변하거나 죽어야만 하는가'(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에서, 소멸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가 반드시 수용해야만 하는 열 두 주제들을 제안했다. 여섯 번째 것은 이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견해는 반드시 사라져야만 할, 원시적인 개념에 기반을 둔 하느님에 대한 야만적 사고이다." 인간 탐구(Human Quest)의 보다 최근 기사에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항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나로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요구했다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고대적으로 해석하는 야만적인 성질을 노출시키고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적인 잔악한 행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현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인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바라는 하나님을 매력적으로 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면, 우선, 나부터도 더 이상 이 오래된 믿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특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반대는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대신, 이 생각은 공격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나 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새롭고 강력한 개혁을 필요로 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들을 점검하고 재구성할 때까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믿는다."["Reforming Christology: He Did Not Die for My Sins!" 1999년 11/12월, P. 7]
어쨌든 이 종교회의 이후에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에게 이단 소탕 법령을 내린다.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을 찍어 사형을 행했으며, 세습 권도 정지당했다. 유스티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로마 관리들은 큰 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 서 강제적으로 세례를 받게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카톨릭의 성인 품에 올려져 있다.
(6) 제6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680∼681년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소집했으며,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배척하고 로마카톨릭 교회와 화해했으며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단성설은 완전히 배척 받게 되었다.
(7) 제7차 공의회(니케아)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로,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유물숭배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교회건물을 헌당할 수 없게 함), 성자숭배, 죽은 성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도가 공인,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8) 제8차 공의회(콘스탄티노플)
869∼870년 이콘(聖畵像) 논쟁을 둘러싼 동, 서 교회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 공의회이다.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는 동, 서 양교회 분리의 요인을 조성한 포티우스 주교를 파문했다. 또한 불가리아인에 대한 동로마제국의 권리를 배격하고, 로마가톨릭 교회로의 귀속을 확인하였다. 교회합동을 재현한 공의회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