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series 13 : 분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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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13 : 분만실에서

(ㅡ.ㅡ) 0 3,037 2003.10.07 16:33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5월04일(수) 21시30분02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3 : 분만실에서


  ... 갓난아기의 빨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아기의 이름을 June이라고 짓자...

                                      -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1. 웬 파스를?


산모는 평범했다. 초산으로선 좀 많은 나이(32세)였지만 요즘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다만 왠지 불안에 사로잡힌 얼굴... 불안해하지 않을 산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대개 겁많은 산모라면 의료진에게 매달린다. 의사가 해결해줄 수 없는 것까지 호소

하며 괴롭힌다. 의사로선 심리적으로 산모를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라 또한

이런 응석(?)을 안받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영미(가명)씨의 경우는 특이했다. 의료진에게 뭔가를 숨기고 싶은 듯한

눈치다. 초산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출산의 고통에 대한 공포와 불안보다는

오히려 의사나 간호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staire가 이영미씨를 처음 본 것은 예정일이 이미 일주일쯤 지난 상태. 그러나

진통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진통 간격이 점점 밭아지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을

넘기기 전에 낳게 될 것같았다.


이제 자궁경부가 열렸는지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손가락으로 자궁경부를 훑어

벌어진 정도를 시간에 따라 기록해야 하는 거다. 산과의 환자복은 다른 병동과

달리 가운형이다. (다른 과에서는 남녀 구별없이 바지) 그런데 이영미씨는 그 가운

자락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가운을 벗기려고 (벗긴다기보다는 걷어올리는....)

손을 댔을 때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수줍음 때문이 아니다. 이영미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다. 이건 부끄러움이 아니야. 두려워하는 얼굴이야...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웬 커다란 파스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이 파스는 뭡니까?"

"어릴 적에 ..화상을 입어서 흉이 졌거든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뭔가  걸리는 점이 있다. 이영미씨의 두려움은 저

파스와 무관하지 않을 거야...


김승욱 교수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으신다.

"... 그래서, 강군은 그 파스를 어떻게 했나?"

"뭐... 그냥 놔뒀죠..."

"그건 곤란한데... 산도를 오염시킬 만한 부착물은 미리 제거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이만하면 김승욱 교수님으로서는 꽤 심하게 야단치시는 셈이다...


다시 대기실로 가서 이영미씨를 만났다.

"그 파스, 잠시 떼어야겠는데요..."

"꼭 그래야 하나요?"

이영미씨의 눈은 '제발...'하고 말하고 있었다. 이럴 땐 냉랭한 게 제일.

"시간이 없어요. 산도를 오염시킬 지도 모릅니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망설이던 이영미씨가 드디어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산실에는 몇명이나 들어와요?"

웬 엉뚱한 질문일까?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2명, 많으면 4,5명입니다."

"..."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신뢰를 얻어내야

한다.

"이것 보세요. 우리는 하루에도 몇 건씩 분만을 치러내고 있어요. 전 분만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언제라도 잊을 준비가 돼 있어요. 다른 선배 의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관심사는 산모와 아기의 건강입니다. 그밖의 것은

몰라요.."

"... 김박사님을 좀 뵙고 싶어요..."

김승욱 교수님과 이영미씨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하여간 10여분 후에는

파스를 떼어낼 수 있었다.
                                                     

짐작대로였다. 아니, 짐작보다 좀 심하다... 파스 아래의 살갗은 얼마나 오랫동안

덮여 있었는지 하얗고 오글쪼글한 잔주름투성이...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담배불 자국으로 보이는 몇 개의 콩알만한 흉터와 '영미는 대철이가 XX다...'

를 비롯한 저질스러운 문신들...


여고 시절 폭행당한 흔적이라고 했다. 남편에게도 알릴 수 없었던... 파스를 갈아

붙일 때마다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영미씨를 괴롭히던 상처...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났다. 아니,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이영미씨는 출산 직후 일반 외과 병실로 옮겨졌고 보호자와의 면회도 차단되었다.

'화상 흉터'의 제거 및 피부 이식 수술이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안고 퇴원하는 이영미씨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지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날로 잊혀졌다....

(staire의 글에서 가명은 본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산모의 나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배경들이 변조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2. 며느리는 남이다?


이것은 staire가 직접 겪은 분만이 아니다. 그때 staire는 분만장 실습을 하는 날이

아니었으니까...


분만장 앞을 지나다 우연히 눈에 띈 광경... 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의 손을

부여잡고 매달린 남편의 모습으로 보건대 난산인 듯했다. 의사는 "좀더 두고

봐야..."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시부모 아니면 친정 부모들로 보이는 다른 보호자

들도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선배가 말했었다. 분만장에서 서성이는 할머니가 시어머니인지 친정 어머니

인지는 난산일 때에만 구별할 수 있다고. '어떻게요?'하고 궁금해하는 staire에게

그 선배는 '직접  겪어보라'고만 하셨다. 별로 듣기에 좋은 얘기는 아니라면서...


과연 보호자중 한 할머니가 의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의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한쪽 구석으로 가는 거다. staire는 그들을 슬슬 따라갔다. 병원의 특성상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주목을 받지 않는다. 흔하니까...


병동 끝에 있는 층계참에서 할머니는 백에서 뭔가를 꺼내 의사에게 건넸다. 돈봉투

겠지? staire는  방화문 뒤에 몸을 가리고 섰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나즈막한 목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역시 시어머니였다...

"선생님. 우리 집에는 손이 귀하거든요. 산모는 어떻게 되더라도 제발 아기만은

살릴 수 없을까요? 초음파 검사로는 아들이라던데..."


그날 저녁 staire는 산과 병동의 차트를 있는대로 뒤져보았다. 다행히 어느 산모나

아기도 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요즘도 그 할머니의 얼굴을 상상해보며 오싹하는

전율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겉보기에는 인자한 모습이었는데... '산모는 어떻게

되더라도...' 라고 말하는 순간의 할머니의 눈빛은 어떠했을까......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br><br>[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4-07 16:23:58 횡설수설(으)로 부터 이동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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