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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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ㅡ.ㅡ) 0 3,010 2003.10.07 16:28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민형)
  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6시38분1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오빠가 아빠가 된다고들  한다. 유치하지만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오빠가 되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는지? staire의 16명의 딸 중에서 유일하게 연이

가 그랬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연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11월 24일이 지나고  며칠 후, 연이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기보다는 그동안의

연이의 일기를 묶은 것...


    11.24.
                                                     
    아아,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 마지막 부분)

    11.26.

    사랑하는 나의 STAIRE,
    언제나 이렇게 써 보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보내지지 못했읍니다.

    (당시의 맞춤법은 -습니다... 가 아니다)

    11.27.

    맑고 행복한 생각만 하며 살고 싶다.
    나는 왜 우울속에 가라앉을까...
                                                     
    11.29.

    왜 이렇게 내가 세상의 윤리와 규율에 버림받은 기분일까?

    12.1.

    시간이 빨리 갔으면...
    나는 어서 크고 싶어요.
    이 겨울을 걷어 주세요...

    (연이는 민기 때문에 괴로와했던 거다)


두 사람의 앞길은  밝지 못했다. 우선  민기가 있다. 민기는 무척  착하고 소심한

녀석이었고 나쁜 선배를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간혹  두사람이 만날 때 민기는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민기가 연이에게  한 마지막 말은 '민형이 형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나만큼은 아닐거다...'였다는데 사실인지도 모른다. 둘째로는

연이의  너무나 어두운 성격...  전혜린씨의 글 중에  '사랑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마치 연이를 두고 한  말같다. 마지

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연이네 부모님과 의대를

곧 떠나려는 staire의 엄청난 부조화. 더우기 연이에게도  아직 staire의 방향 전환

에 대해 얘기하질  못했다. 언젠가 얘기해야 할 텐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곧 학년말 고사가 다가왔다.


서울 의대 본과 3학년의 학사  일정은 특이하다. (다른 의대도 비슷할거다.) 1학

기말 시험이 없고  연말에 1년치 시험을 한꺼번에 본다.  그때문에 어머니와 성적

표 내놔라, 이번 학기엔  성적표가 없다, 그런게 어딨냐 빨리 내놔라 하고 옥신각

신했었지만... 12월 10일경에  종강, 그때부터 학점수만큼 study day를  준다. 12월

24일에 내과시험, 30일에 산부인과, 이듬해 1월 5일에 소아과, 9일에 정신과, 13일

에 일반외과, 17일에 정형외과...이런 식으로  마취과, 진단방사선과까지 끝내면 성

탄이고 신정이고 다 잊은 채 1월말이 된다. (그러니까... 계산 잘하는 사람은  눈치

챘겠지만 내과는 무려 12학점, 따라서 내과 시험을 망치면 성적표는 처참해진다)


행복감에 젖을 틈도 없이  staire는 바빠졌다. 이왕 그만두더라도 시험을 망쳐서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연이는 시험 본 날에나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staire가 곁에 있었어야 할 시기에 연이는 혼자서 외로이 민기의 그림자

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과 시험을 보던  날, 시험을 마친 즉시  수술장 샤워실에 들러 목욕을 하고

연이를 만났다. 면도까지 할 여유는 없었지만. 전날 받은 1월 1일자 편지의  '사랑

하니까 부재도  견뎌야 하는 거지만 사랑하니까  실재가 더욱 그리워요...'라는 구

절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1월의 비원은 추웠고 바람이 매서웠다.  연이가 들고 온 장미는 시들어 축 처졌다.

시험에 시달리던  staire는 연이를 감싸줄 여유를 잃었고  두사람은 다툼 끝에

어색하게 집으로 향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연이는 말했다.

"지금의 제가 마치 저 아닌 남인 것같아요."

staire는 긴장했다. 영이(기억하시는지?  연이의 문예반 선배인 staire의  세째딸)

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연이가 문예반 시절에 쓴 글. '지금의 나는 과연  나일

까...'로 시작하는 염세적인 글을 보고 영이는 연이가 곧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전율감을 느꼈다고 했다. 대학에 온 이후에도 연이는  수면제를 30개정도 늘 가지고

다녔다. 언제든 원하는 순간에 죽기 위해서. staire는 전차가 역에 들어오는 순간

연이가 선로에  뛰어들까봐 연이의 어깨를 감싸안아야  했다. 연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staire의 손을 제지했다.


정신과 시험을 보던  날 연이는 오지 않았다. 늘 만나던  대학로의 '마리오네뜨'

(이것도 요즘 없어졌다...) 2층에서 한없이 기다렸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반외과 노트는 늘 같은 곳이 펼쳐져 있었고... 시험 전날 연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이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staire는 외과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과목도 포기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험이  연이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

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더이상 시험을 보는 것은 무의

미했다.


연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staire는 연이의 비올라 레슨날인 목요일에 관악을

찾았다. 그리고 음대 연습실 앞 복도에 걸린 칠판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staire는 지금 xxx호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고 싶지 않으면 이거 지우고 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다. 연이가 서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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