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토론(1)

기독교인과 토론(1)

한님 0 1,942 2011.08.30 18:42
아래글은 kcus에서 어떤 기독교인과 주고 받은 글입니다.
별로 의미는 없으나, 포인트 점수를 올리기 위해 옮겨 봤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 이단논쟁을 하며, 각종 성경구절을 가져와 자기 합리화 하는것에
 다소 분개하여 쓴 글)
 
      <게시판에 오시는 기독교인에게 감히 권고하는 글>    글쓴이 : 예술가
 
"장자"라는 책에 보면 윤편이라는 목수가 감히 제나라 환공에게 책의 무용론을 
펼치는 얘기가 나옵니다.    
윤편의 주장인즉 이러합니다.  
 
"수레바퀴 깎는 일로써, 성인이 쓴 책이 어째서 성인이 남겨 놓은 찌꺼기인지 
 설명하지요.  
 바뀌 깎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굴대 구멍 깎는 일입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 너무 넓게 깎아 놓으면 굴대를 끼우기는 쉬워도 헐렁해서 
 바퀴가 심하게 요동하고, 너무 좁게 깎아 놓으면 굴대가 빡빡해서 못 쓰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마음 먹은 일을 손으로 잘 할 수 있어서 크지도 작지도 않게 
 굴대 구멍을 깎을 수 있습니다. 
 깎을수 있어도 이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기술을 전하지 못하듯이, 공께서 읽으시는 성인도 
 정말 전하고 싶어하는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니, 
 그 책에 쓰여 있는 것은 성인이 깨달은 바의 찌꺼기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혹자는 위 윤편이란 자의 주장을 "독서 무용론"이라 오해할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지극한 진리는 문자로써 전할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뜻을 전하려고 함을 알수있습니다.  
 
근본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기독교인을 우리는 흔히 "문자주의자"라 부릅니다.  
성경의 기록을 글자그대로 철석같이 믿는자라는 뜻이지만, 
더 나아가 성경의 문자에 갇혀 문자로는 전할수 없는 지극한 진리를 외면하고, 
본래의 진리를 모욕하는 자라 확대해석 할수도 있습니다.  
성경이라는것이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대변하거나, 남을 비방하기 위해서, 
특정교리를 만들기 위해서 기록된것이라 나는 믿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진리가 없다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분명 성경에는 진리라 부를만한게 다수 있으며, 그 진리라 부를수 있는게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되는것을 경계할 뿐입니다.  
아울러, 성경속에 존재하는 진리라는것이 다른 성인들이 전하는 진리와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거룩하고  위대하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던 수많은 
저자와 편집자들의 생각을 옅보고, 그들의 사상을 비판하기도 하고, 
수긍하기도 하며, 가끔씩은 그들의 사상에서 새로운 화두를 끄집어 내어 
궁극의 실재에 다가가고자 노력도 해보고, 이 과정을 통해 내 삶속에 
녹아들수 있는 나름의 진리를 깨닭고자 할뿐입니다.  
 
"식물학이란 식물들을 두꺼운 책 사이에 끼워 말려죽인 후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모욕하는 학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기독교인은 혹시 내가 교리의 틀속에 예수를 끼워넣어 
말려죽인후 끊임없이 모욕하고 있지 않나 되돌아 보기를 
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예술가님께 감히 권고 드립니다>       글쓴이 : 풀피리..
 
예술가님께서는 
무슨 연고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안티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님의 글들에서 느낄 수 있는 뉴앙스는 신정통주의 이전의 
근,현대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신학을 공부하셨다면 그쪽계열의 학교에서 학문하셨을 것이구요.
그런 면에서 님이 안티라 자처하신다면 
님은 죄송하지만 저의 입장에서 다른 안티보다 더 심각한 안티라는 말을 
드릴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이러한 추측을 전제한다면 현대 자유주의신학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실감케 됩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아무리 종교의 옷을 두텁게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곧 탈 신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님과 같은 입장에서는 
성경을“이성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역사내재적인 인과율에서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시겠지만, 
성경을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라는 종교의 역할과 기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까? 

성경도 인간이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문서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고대 종교문서들과 똑같은 해석학적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역사비평적 방법을 통해서 
연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면 도대체 인간과 성경과 
하나님의 존재를 어떤 방법으로 구분할 것 입니까?

우리가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과학적,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현상을 보고 인간이 감정적 슬픔을 
누그러트리는 데에는 과학도, 이성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또 밀물과 썰물의 현상을 과학적 이성적으로 설명하는데 의문에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현상의 합리적 설명을 초월한 신비적인 의미까지 
결코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합리적 이성적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며 
인간 실존의 의미에서 성경내용의 설명은 불합리 하기에 
불꽃 같은 이성의 눈으로 비판과 분석을 해야 한다고 하면 
역사 속에서, 아니 온 자연계 속에서 초자연적이고 초월적 현상들이 
담당해온 기능은 다 쓸데 없는 것이라고 한다거나, 
혹은 과학과 이성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라도 할 것입니까?

예술가님은 종교 즉, 기독교와 세상의 도덕률은 
그 기능과 역할의 차원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누구 보다 도 
잘 아실 터,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한번 자신의 내면세계에 
심각하게 자문해봐야 한다고 감히 권고 드리는 바입니다.    
 
 
        <풀피리님에게 드리는 글>  글쓴이 : 예술가
 
pulpiteer께서는 저를 "먹물먹은 안티"라 지칭하시는데,  
비록 "먹물먹은"이라는 형용사를 앞에 붙히셨지만, 결국은 안티아니냐라고 
하시면서 죄송스러운 입장을 표명하셨습니다.  
뭐, 시비를 걸고자 하는것은 아니지만, 님께서는 기독교 안티라는 집단에 대해  
동등한 사람이라는 시각이 결여된것 같아 아타까움을 느낍니다.  
안티들은 "형편없이 저급하다"라는 시각은 자신이 가진 기독교적인 신앙을 
"고귀하고 고급스운것"으로 돋보이게 하는것이 아니며, 때로는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사소한 장애가 될수도 있을겁니다.  
 
또,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을 주장하셨는데, 이 "위험성"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겠으나,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보다 풍부하게 성경을 
이해하게된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하진 못할겁니다.  
분명 자유주의 신학은 세력을 얻지 못했고, 몰락의 길로 접어든건 사실이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진 신학적 성과물은 이후 다른 신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논문속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하자면, 
아주 오랫동안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해석되어지고 읽혀지던 성경이라는 것을  
"역사비평적 방법"을 통해 제조명 하면서, 두터운 외투에 꽁꽁 싸여있던 "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왜 그당시 그시대 사람들은 "신"을 이토록 두터운 외투로 
치장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자세히 옅볼수 있었으며, 
더나아가 "신화"라 불리우는 그 두터운 외투에   
암호화되고 녹아든 그들의 사상을 알게된 것 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하여 과학적,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현상을 보고 인간이 감정적 슬픔을   
   누그러트리는 데에는 과학도, 이성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pulpiteer께서 위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저는 다소 의아함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에 직면한 인간은 "종교"의 힘을 빌어 감정적 슬픔을 
당연히 누그러트릴수 있을겁니다.  
예를들면, 기독교에 귀의한 부모님의 죽음앞에서, 이제 부모님은 
"천국에 가셔서 하나님 품에 영원한 안식을 누릴꺼야."라는 기대로  
슬픈 감정을 누그러트릴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독교를 믿지 않은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유황불"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어야하며, 이는 감정적 
슬픔이 무한대로 증폭되는 역기능을 할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극과극의 상황에 직면하게 만드는것이 전통적인 기독교신앙이며, 
죽음뿐 아니라 다른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과 이성이 슬픈 감정을 누그러트리지 못한다 하셨는데,  
설마, 과학과 이성이라는것이 "사랑, 평화, 친절, 베품, 위로"등과는 무관하고  
"냉혹한, 피도눈물도 없는" 등의 단어들과 더욱 친숙하다고 오해하시는건 
아니시겠지요?  
과학으로 충분히 개인이 느끼는 슬픈감정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매우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설명하고 위로할수 있습니다. 
  
  
 <<성경은 합리적 이성적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며   
    인간 실존의 의미에서 성경내용의 설명은 불합리 하기에   
    불꽃 같은 이성의 눈으로 비판과 분석을 해야 한다고 하면   
    역사 속에서, 아니 온 자연계 속에서 초자연적이고 초월적 현상들이   
    담당해온 기능은 다 쓸데 없는 것이라고 한다거나,   
    혹은 과학과 이성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라도 할 것입니까?>>  
  
저는 성경이 합리적 이성적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한줄만 빼면,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예술가님은 종교 즉, 기독교와 세상의 도덕률은   
   그 기능과 역할의 차원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누구 보다 도   
   잘 아실 터,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한번 자신의 내면세계에   
   심각하게 자문해봐야 한다고 감히 권고 드리는 바입니다. >>     
 
저도 역시 기독교와 세상의 도덕률은 그 기능과 역할의 차원이 
다르다 생각합니다.  
또한 기독교의 도덕률은 "구원을 성취하는 삶"과 "타인을 구원에 이러게 하기 
위한 삶"과 "그 구원을 간직하려는 삶"속에서 심하게 왜곡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그분이 하시는 모든일은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수 없는 
신비한 무엇이 있고, 또한 그분의 부르심을 입은자들이 행하는 모든일은 
선하다 하는 기독교 도덕률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에게는 
수긍할수 없는것입니다.  
그의 매일 게시판에 올라오는 성경속에 불합리한 "살생"의 구절들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기독교적인 "선"이라는 개념이 일부 사람들에게 
평안과 위로,기쁨을 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지만, 일부 사람에게는 
"불안, 공포, 허무"등을 심어줄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강조 하고 싶은것은  
기독교적인 "도덕률"로 무장한 사람들이 일반사람들에는 "악행"으로 비춰지는 
일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작태는 바로 그 "기독교적 도덕률"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냐하면, 
기독교적 도덕률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 도덕률"의 기준은 바로 "인간"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한번 자신의 내면세계에   
   심각하게 자문해봐야 한다고 감히 권고 드리는 바입니다.>>     
 
어떤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지는 모르겠으나, 
위의 권고 깊이세기고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진것 같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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