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쓸개 다 빼놓고 오로지 복종만을 요구하는 예수의 가르침

간,쓸개 다 빼놓고 오로지 복종만을 요구하는 예수의 가르침

손오공 1 2,965 2005.07.13 20:48

종의 의무 혹은 무익한 종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문서 17장의 삽화를 주제로 설교를 할 때,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고대의 유대 사회가 배경이라는 연막을 우선 쳐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독인들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는 표명일까?
그러하다. 이 삽화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전혀 용납할 수 없는 인간 관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인들의 요망대로 고대 봉건 사회라고 무대를 설정해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게 이 삽화 주인공들의 인간 관계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기본적인 신뢰가 없으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은 고대 봉건 사회건 오늘의 노사 관계이던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큰 조직 사회가 아니고 소규모 집단일수록 이해와 신뢰는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묶어 주는 끈의 역활을 해준다고 확신 한다.

 

이 삽화에 등장하는 주인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거나 혹은 아주 영세한 목축업자임에 틀림없다. 이 점을 우선 인식하고 본문으로 들어 가기로 하자.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가 17:7) >>

 

이 글을 보면 주인으로 명시된 자의 사업 규모를 알 수 있는 바,

 

*첫번째 증거: 종이라는 단어가 단수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a servant)
*두번째 증거: 농사와 목축의 겸업이 아니고 그 중 하나 만을 주업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plowing or feeding cattle) 즉 and가 아니고 or임을 확인하시라는 뜻이다.
*세번째 증거: 식사를 별도로 준비하는 종이 없었다는 것....

 

등을 생각해 보면 소위 주인이라는 자의 농업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농장이나 목장 수준의 규모있는 지주가 아니고 그저 밭떼기 좀 가지고 있거나 양 몇 마리 정도를 가진 자작농 정도라고 봐야할 것이다.오늘날로 치면 직원 한두명 정도를 두고 영위하는 구멍가게 사장 정도가 이 주인이라는 자의 정체라고 보면 틀림없겠다.


그런데 이 쬐그마한 구멍가게 주인이라는 자의 착각을 보시라.
하루 종일 땀흘리고 온 피고용인에게 수고했다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한마디 건내주거나, 혹은 빨리 씻고 식사부터하라는 당연한 반응을 거부하고, 게다가 이러한 자신의 비인도적 행위가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다.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연히 ...아이고,수고했다.빨리 씻고 밥부터 먹어라....는 정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


예수의 착각은 끝이 없나 보다.

 

<<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누가 17:8) >>

 

주인이라는 자의 사고관과 행태가 이 정도라면 그 어느 누가 붙어 있을까?
물론 봉건 사회라 종의 신분을 자기 임의대로 극복할 수 없다고 해도, 주인의 횡포가 이정도라면 그 누가 열심히 일할 기분이 나겠는가?

다음 장면을 보자.

 

<<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누가 17:9) >>

 

아무리 신분 사회라고 해도 주인이 이정도의 양식을 가진 자라면 심각한 도덕 불감증 환자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종은 기계나 로보트가 아니고 분명 인격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던가....
말이란게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것을 그 주인이라는 작자는 도무지 모르나 보다.

 

에이 씨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쬐끔한 구멍가게 하나 갖고 더럽게 유세하고 있네...
여기 아니면 밥 먹을 데 없을까봐....이 정도가 오늘쯤의 우리네 반응이겠지만,


그래 그때는 태어날 때 부터 신분이 확정되던 봉건 시대였다고 하자,

그래도 마음 속 반응은 별반 차이가 없었으리라 본다. 그 결과는 필연적인 생산성 저하로 나타났을거라고 짐작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예수는 고용주의 그러한 행동이 당연하다고 한다.
게다가 한술 더떠 웃기지도 않는 주문을 요구하고 있다. 아래는 그 본문이 되겠다.

 

<<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누가 17:10) >>

 

열심히 일했고, 더럽지만 주인의 밥상 시중까지 들라는 명령까지 완수했는데도 <저는 그저 제 할일을 했을 뿐이고, 거룩한 주인님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그저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종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어쩌면 있기는 할게다....간쓸개 다 빼 놓고 그저 목숨줄에만 연연하는 철저한 노예 근성의 무리들...분명히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많은 인원을 거느린 고용인이라면  조직의 질서를 위해 다소간의 엄격한 질서도 필요하리라 본다.
그러나 한두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이라면 그  무엇보다는 인간적인 신뢰가 우선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본다. 이것은 고금동서 이데올로기 등을 떠나 자연스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겠는가?

 

*열심히 일한 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해주는 그리고 그 노력에 고마움을 표명하는 주인(고용자)
*일을 할 수 있음에 진실로 고마워하는 종(피고용자)
*종은 주인의 인격에 믿음을 그리고 주인은 종에게 신뢰를 표명하는 서로간의 관계...

 

이러한 사회와 조직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가, 그리고 생산성 역시 얼마나 극대화되겠는가?

예수는 이러한 자연스런 인간 관계를 거부하고져 한다.
살맛나는 세상를 포기하라고 한다.

오로지 권위와 권력에 굴종하라고만 요구한다.

 

지금까지 상기 삽화를 고용인과 피고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보았지만,
그것을 예수와 기독교인, 목사와 신도 그리고 예수와 목사로 설정을 해도 그 해답은 마찬 가지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야훼가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자유의지를 남용한게 원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인류에게 보편적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그저 로보트 정도로 살아라고 요구하는 게 기독교의 정체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상기 삽화는 대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접받기를 당연히 그리고 즐기고 있는 목사들이 그래도 자신을 한껏 낮춘다고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아닌 고백을 할 때이다.

 

목사들은 그러한 말장난으로 신도들을 우롱할 때, 한번쯤은 상기 삽화를 기억하시길 권유한다.
그리고 자신은 신도들이 자신의 종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지 않나하는 질문을 그대의 양심과 한번쯤 대화해 보시길 권유한다.


ps:봉건사회는 신분사회로 정정하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5-07-22 17:54:27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Comments

skate 2005.07.13 20:53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미친신이 바로 야훼입니다.구약에 보면 종에게 귀를 뚫어서 영원히 네 소유로 만들라는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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