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폐지한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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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참 기묘한 존재이다. 기독인들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인간이면서 또한 완전한 신이라한다.
온갖 기적질로 점철된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를 반신반인의 애매한 존재로 일단 인정해 주자.
그러면 공생애 이전 즉 유소년 시절의 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만약 그때도 신이었다면 그 기간 동안은 신으로서 직무 유기 기간이 되겠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 인간이었다면 공생애 기간 동안의 예수는 무당이란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가 폐지한 십일조

손오공 0 2,270 2004.05.09 07:19

그리스도의 공생에 사역에서 가르침은 율법을 폐한 것으로 보지 않고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가령 그리스도는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또 문둥병자를 고쳤을 때 제사장에게 율법을 따라서 알리고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 마태 복음에 나타난 십일조

마태복음 23장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누가복음11장42절 참고)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원래 짜투리 땅을 이용하여 생산한 소산물은 십일조에서 제외되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그러한 소산물로 알려져있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철처한 율법의 준수는 성경에서 명시된 이상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는 그들을 책망하시었다. 율법의 본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을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을 능가하는 실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껍데기 신앙으로 비판을 받는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현대교회에서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의무적인 십일조 찬성론자들은 이 구절을 이유로 신약의 교회가 십일조를 내야한다고 주장한다. 의무적 십일조의 반대자들은 위의 구절이 십자가 사역 이전의 사실이며 또는 위 구절이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일 뿐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명령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마태복음의 구절은 그리스도 십자가 이전의 가르침으로 십일조의 교훈을 주지만,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율법의 정신이 강조되어 가르쳐지는 등의 사례는 있으나, 율법을 폐하여 말한 적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에 완전하게 행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한 것은 십자가 이전의 사실로서 보아야 한다.



율법의 폐지는 십자가 사역 이후이기에 그리스도는 태어나심부터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다. 누가복음을 예로 1장부터 살펴보면 태어난 후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절기를 따라 성전에 갔다. 문둥병자를 고친 후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런 내용은 4복음서에서 매우 많이 증명되기에 일일이 열거 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금식이나 안식일 문제에서 그 제도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다만 참된 금식과 안식일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할례를 받아야 하며, 절기를 따라 성전에 가야 하며, 문둥병이 낳으면 제사장에게 찾아가 예물을 드려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유독 마23:23 한 구절만은 지켜야 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에는 그런 근거는 없고, 단지 히브리서에서 폐지된 근거를 볼 수가 있으며, 율법의 폐지 속에서 제물에 속하는 십일조의 폐지를 볼 수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십일조 폐지를 증거하는 결정적인 구절이 있다. 그것은 "성전을 헐어버리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십일조는 성전에서 드려져야 하며, 만일 제물이 운반하기 힘들면 돈으로 바꾸어서 성전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겠다는 말은 십일조를 드릴 방법을 하나님이 스스로 제거하신 것이다. 또한 성전이 제거되면 레위지파가 그 임무가 종결된다. 이 경우 십일조의 가장 큰 수혜대상이 없어져 버린다.



아래의 인용된 마태복음을 보면 성전을 헐어버리는 적극적이고 주체자는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 수가 있다.

성전에 의한 신앙을 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인 성전과 예배당 중심으로 가는 신앙이다.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성경의 그런 말은 종종 무시된다. 왜냐하면 그런 구절은 자신들의 행한 멋진 신앙을 평가절하 하거나 의미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무너뜨린 그리스도 자신이다.



마태복음 24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태복음 27장 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히브리서의 가르침

히브리서 7장을 보면 2절에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으며, 참 대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내용은 율법에 의한 그림자 로서의 제사장은 페하여지고 참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 이후 제사장의 직분은 교회(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십일조의 의무를 나타내는 것은 없으며, 굳이 관련하여 해석한다면 교회 즉 성도들은 오히려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야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 성도에게는 십일조의 의무는 없지만 자발적인 헌금에 대하여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장 2절에서 십일조를 의무와 관련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율법의 하나의 조항인 십일조 폐지의 근거에서 히브리서 7장 5절에 의하면 십일조가 율법인 것이 분명하게 증거되며 10장 8절 이하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폐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는다.

히브리서 7장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브리서 10장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위에서 살펴본바,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에서 십일조의 실천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언급에 나타난 것뿐이다. 이처럼 십일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후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언급은

십일조를 교회에게 명령한 것으로 볼 수가 없으며 히브리서, 갈라디아서 등의 여러 구절은 오히려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십일조 의무론자들에게 십일조의 근거를 요구하는 경우, 제시받는 것은 구약의 성경구절 뿐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의하여 폐지된 조항으로 나타났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말이 바리새인들에게 참담하게 들렸듯이, 십일조 의무론자들에게는 십일조 의무폐지가 참담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 의무론자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서 10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인간이 보기에 닭의 3초 기억력은 매우 우습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은혜와 믿음을 입으로 증거하면서 율법이나 도덕적인 행위로서 나아가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징벌이나 저주를 받을까 우려한다. 값없이 받을 것과 단지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라는 성경말씀은 입으로 증거하면서도 마음에서 무시된다. 값없이 받은 것을 반드시 되돌려 주겠다는 비성경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웃에게 줄 것이 하나님에게 주어졌으니 당연하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너희 이웃에게 값없이 주어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허물어진 성전(구약에 의하면 율법에 의하여 오직 하나뿐인 성전)을 현대교회는 이 지구상에 수천 수만개를 세워놓고 십일조를 드린다. 하나님은 헐어버리라고 하였고, 교회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한다. 성경은 참된 성전이 그리스도이며 그 몸체는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성도의 연합된 모습이며 건물은 예배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자기가 소속한 교회(실제는 예배당)에 내야 한다고 가르쳐진다.



또한 성경은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와 가축의 산물로 정하였으며, 그것을 운반하기 어려운 경우 돈으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성경에 근거없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강조하다가 마23:23의 밀레마에 또 다시 빠졌다. 장학금은 십일조의 대상인가? 창녀가 번돈은 십일조의 대상인가? 등의 논쟁을 일삼고 있다. 마23:23의 현대판 재현이다.





십일조 vs 안식일, 금식



십자가 사역의 결과 교회는 율법의 교훈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누가복음 5장 32이하(금식) 6장 1절 이하(안식일)에서는 이미 금식과 안식일에 대하여 새롭게 가르쳐지고 있다. 단지 십일조만 새롭게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이나 금식의 예를 통하여 십일조 역시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일이 아니며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금식에 대하여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율법에서는 속죄일 이전에 금식을 하게 하였다. 언제나 율법에 추가적인 조항을 붙여 지킨 바리새인들은 율법외에 더 많은 금식을 하였다. 가령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여 금요일은 금식하는 날이었다. 금식을 하지 않는 12제자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공격적인 질문에서 그리스도는 금식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으며 참된 금식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금식을 할 때가 있고(눅5:35), 또 금식하지 않을 때(눅5:34)가 있다는 것이다. 금식을 할 때라는 것은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비유를 들어주셨다. 또한 금식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평화스럽고 즐거운 때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제도나 형식적인 금식을 인정하시지 않았다. 누가복음 18장 10절 이하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가 나온다. 거기에서 바리새인은 한 주에 두 번(월, 금) 금식하였으며, 십일조를 바친가도 하였다. 결론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죄를 받았다.



왜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였을까? 바리새인은 그것을 하나님께 아마도 당당하게 말하였다. 우선 한 가지 잘못된 해석을 지적해야 한다. 금식행위는 불신자의 행위일 수 없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일주일에 두번 금식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만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이 그처럼 금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원한 것은 현실을 파악하고 자기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여,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인간은 부패했고 병든 모습이기에 환자의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며 의사나 건강한 존재처럼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부류에 대하여 로마서 10장 12절에서 경고한다.



안식일에 대하여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제도의 완전한 폐지가 있었으며, 오히려 그런 제도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우려하고 경계하고 있다(갈라디아서 4장 9~11). 즉 참된 안식과, 형식과 의무로서의 안식일제도 즉 외식적이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현대교회에서는 주일 또는 주의 날이라

는 교묘한 개념으로 왜곡되어 성도에게 강요되고 있다. 참된 진리는 모든 것이 주의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이후 모든 날이 주의 날이다. 성도는 매일같이 자신을 영적 산제사로 드려야 하며, 그것이 곧 예배이다.



현대교회는 안식일을 주일이라는 말로만 바꾸었을 뿐, 한 주간의 첫날을 하나의 절기로서 지키려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주일은 주께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매일의 삶에서 영적 산제사(로마서12:1 사도행전 2장 42이하)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며, 절기에 얽메이는 것을 경계한다. 또한 교회는 모임을 중요시하지만, 건물이나 장소를 결단코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6장에서 안식일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주일(일요일)은 의무와 두려움이 아니라 참된 안식이어야 한다. 현대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의 하나는 이런 표현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의사역으로 인하여 주일(매주의 첫날)로 변경되었다"라는 것이다. 이는 비성경적이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것이지

만, 무슨 안식일제도가 주일로 변경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4장 9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합니까? 10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11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비록 형식적인 면에서 안식일(주일)을 지키려는 잘못된 강박관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일치되는 견해의 하나는 안식일제도는 폐지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증거하기에 현대교인 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며 다만 그 마음에서 자유함이 없기에 왜곡된 안식일제도를 지킬 뿐이다.



위의 금식이나 안식일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왜곡되어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바를 거슬리곤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이웃에게 나누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그 이유를 밝히려하지 않고, 그런 경향이 십일조에 관하여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십일조는 안식일처럼 십계명에 나온 내용은 아니지만, 600여개의 조항의 하나로서 제물에 속한다.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지는 제물이다. 그런데 십자가 사역의 결과 율법의 의식적인 모든 조항은 폐하여졌다. 따라서 십일조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히브리서 10장은 십일조의 폐지를 증거한다. 그렇다면 현대교회에서 십일조가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거는 모두 구약의 율법의 조항에 있다. 신약에서는 어떠한 지지도 받지 못하고, 무시되거나 언급이 없다. 안식일제도가 폐지된 것처럼, 십일조도 폐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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