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에 대하여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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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위클리프에 대하여 자세히

몰러 0 2,263 2005.06.17 20:52

위클리프에 대하여 자세히


존 위클리프(1320-1384)는 고금을 통하여 가장 희한하고 어쩌면 가장 반항적인 과격파였을 것이다. 그는 지방 성직자였고, 옥스포드 출신의 신학박사였으며, 교회의 타락상으로 인해 그가 교황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는 중년을 넘어 있었다.
그는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기보다는 플라톤주의자에 가까웠으나 마지막 스콜라 주의자였으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신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급진주의에 빠진 것은 1376년에 옥스포드대학에서 '시민 지배권론'을 강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정의만이 재산과 권력을 향유할 권리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부패하고 부유한 성직자들은 그런 권리를 가질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기독교와 초기 사도들은 재산을 갖지 않았으며, 성직자 역시 이를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주장은 매년 엄청난 헌금을 로마에 바치는 부유한 교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영국정부는 환영하였다.(당시 영국 국왕은 백년전쟁을 일으킨 에드워드 3세이고, 위클리프는 에드워드 3세의 보호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더욱 나아가서 다음 400년동안 유럽을 지배하게 될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국왕은 신의 대리인이며 교회는 국왕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또한 교회는 정신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쏟아야 하고 교황은 선한 존재가 아닐 뿐더러 오히려 반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는데, 성경을 자국어로 옮기는 운동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기간에 종종 반복되었으며, 성직 이외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을 성경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위클리프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급진적으로 되었으며, 결국 화체설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부추긴 것으로 알려진 1381년의 농민혁명으로 인하여 그는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지만 결국 3년후 편안하게 죽었다.
Lollard라고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죽음과 같은 시기에 즉각 추방당했으며, 화체설을 부인한 것에 대하여 그가 유죄판결을 받은 후 그의 시신은 파헤쳐져서 불태워졌다. 그의 유해가 템즈강에 버려졌다는 설도 있다.
위클리프가 뿌린 개혁의 씨앗은 보헤미아까지 전파되어서 존 후스의 지도아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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