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웃기는 칼럼 하나...

아주 웃기는 칼럼 하나...

몰러 0 2,585 2005.06.20 18:44
아주 웃기는 칼럼 하나...    
  
 
 
작성일: 2002/10/21
수정일: 2003/03/07
작성자: 몰러




반기독교인,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아주 효율적인 응답이라고 누군가(그가 목사인지, 아니면 평신도인지는 확인 못했다)가 아래와 같은 칼럼을 낸 모양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합리성 부여, 믿음의 방법 제시 등등 썰을 풀어놓았는데, 일견 그럴듯하고 논리적인 하자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존의 모든 교리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에 봉착함을 글쓴이는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우선 몰러의 코멘트를 무시하고 칼럼 본문만 먼저 읽어본 후에 갈색으로 달아 놓은 코멘트를 함께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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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임재 훈련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에 대해 로렌스(Lawrence) 수도사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그는 17세기 한 수도원에서 요리사로 봉사했고, 기도서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훈련”을 썼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훈련하라”는 말을 의학이나 법률을 공부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다.

의학이나 법률을 공부하는 것처럼 하겠다는 것은 계시의 신학(쉽게 말하면 ‘걍 믿쑵니다’)을 이성의 신학, 즉 자연신학으로 확인하겠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아퀴나스의 실패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수도사가 모두 공부 열씨미 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로렌스 수도사는 ‘하루의 일과 속에서 이따금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 말했다.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그분을 맛보십시오. 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로렌스는 영성의 깊이는 지금 하는 일을 바꾸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함으로써 깊어진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왜 하나님에게?’라는 물음을 해소해 줄 논거가 전혀 없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훈련”이란 책에 그러한 논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간 인증되지 않은 논거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을 가지고 따지고 들면 이하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그분을 맛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더라도 상관없다’ 이 말은 계시에 대한 느낌과 그것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할 뿐 아무런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왜 하나님은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만 강조(이 강조조차도 신이 인간에게 요구한 것은 아니다)하고 자신의 존재와 위엄에 대해서는 실증하지 않는가? 자신의 위엄을 실증해 보여도 우리는 따를까 말까 망설일 판인데 말이다.



로렌스 수도사의 원리를 평생 실천에 옮기며 살려고 노력한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이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랭크 로바흐는 문맹퇴치 운동기구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일기에서 그가 평생동안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노력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로바흐의 하루 일과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시작했고, 다른 잡다한 생각과 산란한 마음은 과감히 떨쳐 버렸다. “그것은 의지의 행동이다. 나는 강제로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똑바로 열리도록 복종시켰다. ... 나의 관심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어떤 날은 그와 같은 정신상태에 도달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그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로바흐는 한가지 실험을 했다. 몇 초에 한번씩 하나님을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의 의식 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게 되었다. 로바흐는 바쁜 현대생활을 신비주의와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단학수련, 선도(禪道), 요가...
기독교가 원래부터 수많은 이교들의 총합체인데 17세기에 뭔가를 하나 추가했다고 시비 걸면 엄청 미안해진다.
문제는 처음에는 이 글이 심히 은혜로운 글이라고 침 튀겼을 교인들이 몰러의 코멘트를 본 이후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조금만 야시꾸리하면 뉴에이지라고 덮어씌울 것 같은데, 17세기의 방법이 뉴에이지라면 조금 이상하다.



내가 하나님으로 멀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절망이 몰려 올 수 있지만, 바로 그때가 은혜가 시작되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하나님을 피해 동굴 속에 숨어 있었던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꾸짖음은 없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신 때는 그가 가장 처절하게 낮아진 시점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어디에나 계시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란 사실을 부정해야만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듯 하다.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과, 결국은 어떤 영혼을 포기하시고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 중에 어느 분이 진짜 하나님일까? 또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회개했을 경우 이 회개를 인정하실지 안 하실지도 의문이다. 사망과 동시에 영혼의 천국행과 지옥행이 곧바로 결정되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교리가 있긴 하지만, 이때 하나님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은 아닌 듯 하다. 반대로 영혼이 생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하면 살아 있는 동안 덕을 쌓아야 하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잔인한 교리이다.
어쨌든 기독교의 교리는 한마디로 “챙겨줄 때 잘해” 이상은 아니다.



많은 신앙의 위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성공이나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 완전히 엉터리인 진술이다. 하지만 문맥만 따져주겠다.
동굴로 도망갔을 때 엘리야는 열정이 있었는가? 뒷북 치는 메신저 노릇 하기 싫다고 배 타고 토끼려던 요나에게 무슨 열정이 있었는가?

하나님은 엘리야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고, 요나는 하나님이 이미 성읍사람들을 용서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정해진 일인데 열정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인가?



기독교의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는 뜻이다.
니케아의 그레고리는 성 바질의 믿음이 ‘양손잡이’ 같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질이 오른쪽에는 기쁨을 받아들이고 왼쪽으로는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두 가지 모두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요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가 적대적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함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병사가 지휘관의 명령을 신뢰하고, 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신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중의 상급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교리에 대해 태클 걸고 싶지는 않지만, 고통을 준 자에게 복종하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일 뿐이니 기분이 더럽다. 바꿔 말하면 기분이 안 더럽다는 기독교인들은 노예근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지휘관의 명령이나 부모의 사랑은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당할 때(적대적일 때)도 있으며 이때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 노력은 믿음이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거부란 없다. 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 다음에는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적 믿음의 모순을 제시해도 기독교인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우긴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 가는 무언가가 아니라, 터득해야 하는 기술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내려오기 때문에, 매일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믿음의 반대는 내가 생각할 때 의심보다는 두려움이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명령은 ‘두려워 말라’이다.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떤 믿음을 갖고 하는 것인데 기도의 결과로써 믿음을 선물로 내려준다? 짧게 말해서 믿음을 받기 위해 믿는다는 소린데... 이런 궤변이 신앙고백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기독교인들의 정서를 쥐고 있다.

그리고, 두려움에 대해서 저자는 한참 착각을 한 듯 하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두려움에 기반을 둔 것인데 말이다. 내세에 대한 두려움, 즉 내 영혼의 행로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과 구원을 찾는 것이 기독교 아니던가? 성경에서 명령한 ‘두려워 말라’는 말은 정리하자면 ‘내가 너의 든든한 빽이 되어 줄 테니 나만 믿고 있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뚱딴지 같은 궤변을 널어놓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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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상의 후원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지 두려워할 이유가 뭔가? 내세에서의 보상에 대한 믿음이 불러 온 결과는 기껏해야 순교라는 이름의 자기학대와 테러라는 타인에 대한 학대,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만 이외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적이 결코 없다. 설사 기독교가 주장하는 방식의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신이 정해 놓은 노예의 도리를 따라야할 하등의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 신이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느라고 허우적거리며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우리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그 이상은 바로 진정한 사랑이 바탕에 깔린 상태에서 용기가 지식을 뒷받침할 때 실현 가능하다. 이것은 그냥 이상에 그치고 영영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나아가려는 노력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가? 역사에서 기독교가 한 일이란 이러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부정하고 방해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이렇게 낡은 교훈에 우리의 성정을 맡겨두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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