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에게 보낸 서신, 그리고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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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신부에게 보낸 서신, 그리고 답장

몰러 0 2,402 2005.06.20 17:48

신부에게 보낸 서신, 그리고 답장    
  
 
 
작성일: 2002/09/30
작성자: 몰러



(원전은 e-Mail 아님, 팔 아프게 만년필로 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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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잘 계셨는지요...
지난번에 보내주신 선물을 감사히 잘 쓰고 있습니다. 사실 집사람이 거의 독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하하∼...

제가 글을 올리게 된 것은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번에 우리 사이에 못다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저를 가톨릭 신자로 생각하신 듯한데,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종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자꾸 엇나간 듯 합니다. 또, 저는 종교인들이 어슬프게 시도하는 신존재증명을 혐오합니다. 이제껏 시도되었던 모든 신존재증명은 결국 신앙고백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음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동봉한 어느 신부님의 칼럼을 먼저 보시죠... 신부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정리된 형태의 것으로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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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신을 보았느냐? 


신을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모든 존재 여부의 기준을 눈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내가 뉴욕의 마천루를 보지 않았으니 그 따위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아는 데 있어서 그 방법 중의 하나는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울려 나오는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지금 운동의 진행상황을 귀로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전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김치를 입에 넣고 "맵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매운 것이 눈으로 보였다면 아예 먹지 않았을 겁니다. 짜고 매운 것은 혀로서만 알 수 있습니다. 김치가 짠지 싱거운지를 알아보려고 현미경을 대는 사람은 아직도 짠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을 눈으로 보겠다는 사람은 아직도 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적어도 어떤 색을 지니고 어떤 모양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색은 변질될 수 있고 그 모양도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간보다 못합니다. 이런 것을 신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다섯 가지 감각의 기능으로 감각적인 인식을 합니다. 눈은 색을 인식하고,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피부는 차고 더운 것을 인식합니다. 고유한 감각 기능은 고유한 감각의 대상을 갖습니다. 따라서 눈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코로 음악 감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눈의 기능이 마비된 사람은 색의 개념이 없고 귀머거리는 소리의 개념이 없습니다. 신이 눈에 보인다면 어떤 색을 가진 대상일 것이고, 신이 귀에 들린다면 그것은 소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감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이 아닌 존재를 감각적 기능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감각적인 것이 아닌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자유니 정의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추상적인 비물질적인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이 동물과 다릅니다.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을 인식하기에 인간은 동물을 지배할 수 있고 철학과 종교를 운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인간 추리의 대상이요 비물질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지마는 애인의 행동을 보고, 애인의 미소를 보고서 그 뒤에 감추어진 사랑을 인식할 수 있듯이, 이 우주의 신비, 즉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고 인간 능력의 한계밖에 있는 대자연의 신비는 초인간적인 존재 의식을 너무나 뚜렷하게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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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칼럼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부터 말씀드리죠.

먼저, 이 신부님은 감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대상과 불가능한 대상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에 따라 동종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뉴욕의 마천루를 보지 않았으니 마천루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신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논변은 적절한 비유가 아닌 듯 싶습니다. 뉴욕의 마천루는 누구든지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당장 확인이 가능합니다. 즉, 우리는 서울의 63빌딩에 견주어 뉴욕의 마천루들에 대한 확인방법이나 가능성 측면에서 이미 모종의 확신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경험담이나 기념사진 같은 증명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부언하신 대로 신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결국 칼럼의 중간부는 하나마나한 말씀이 되겠죠.

그럼 결론부를 살펴봅시다.

우선 신은 추리의 대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감각계는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예로 들면서 신의 존재를 주장하셨습니다. 분명히 사랑은 인간의 감각계를 통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상 관념 또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 토마스 아뀌나스가 말씀하셨듯이 관념을 무작정 사실로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관념이 사실로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증명이나 이성적인 논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제가 이성적인 반박을 해볼까요?

적절하지 않은 비유이지만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 문제는 애인이 나를 사랑의 눈길로 보고 있다고 해도 속으로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오직 애인 본인만이 알겠죠. 즉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사랑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우리는 사랑이나 그 감정이 나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혼자서 느낀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또한 믿고 있지만 실재로 신이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묶어서 우주에 존재하는 초인간적인 존재를 주장하셨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둘은 별개의 개념으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이 거대한 우주의 체계를 설계한 존재가 꼭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물질의 운행은 크게 보아서는 어떤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각 운행의 구성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정말 슬프게도 결국 확률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확률의 경향들이 합쳐져서 가장 가능성 높은 쪽 -이것이 우리가 인지하는 자연법칙입니다- 으로 운행을 채택합니다. 가끔 어떤 하나 또는 여러 확률이 잘못(즉,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방향으로) 적용되었을 경우 엉뚱한 운행을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기적 또는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상과 같은 무신론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의 존재 문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부존재도 증명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이제껏 해왔던 신존재증명이 그리 적절치 못했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논의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이런 논의라도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독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테니까요.

신을 내 앞에 대령하여 보라. 봐야 믿겠다... 이 말들이 물론 아무런 사색도 없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결국은 이것이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분명 우리의 관념을 뛰어 넘는 존재일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저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제게 전해오는 느낌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하여 저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유부단함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더라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신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는 데에는 그 어떤 긴박함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판단할 요량입니다.

저의 입장과 견해를 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지난번에 못다한 논의에 대해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신부님의 주님이 세상에 펼치신 축복과 사랑이 신부님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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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답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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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에게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읍니다.

교인이 아니셨다는 것은 뜻밖이네요. 하지만 제가 “형제”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시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저는 형제라고 부르고 싶네요.
그리고 보내주신 편지 말미에 제게 해주신 기원에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인사는 처음 받아봤읍니다.

○○○ 형제에 대해 미리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은 △△△△ 사제(소사 신부를 말함. 몰러 註)에게 약간의 항의(하하하)를 섞어 물어봤읍니다. 알고 보니 형제께서는 정말 뜻밖의 인물이더군요. 앞으로 서로 간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렸읍니다.

형제께서 말씀하신, 그러니까 제가 느낀 주님의 은총과 가호가 모두 일방적이고 혼자만의 느낌일 뿐이라는 요지의 말씀에 대해 제 생각을 우선 말씀드려야겠네요. 어떤 느낌을 무조건 사실로 규정할 없다는 것, 저도 토마스 성인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읍니다. 느낌이 우리를 착오케 할 수도 있다고 저도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이제껏 제가 생각해 왔던 것이 이렇게 무참하게(?) 격하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읍니다. 형제의 지적대로 제가 관념을 사실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저는 철저한 절대자는 아니더라도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의 향기를 맡으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읍니다. 이런 말하면 대주교님이 저의 서품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실지도 모르겠읍니다만......

신존재증명을 “혐오”하신다니 더 이상 논의를 끌거나 기존의 다른 이론들을 앞세워서는 않되겠군요. 저의 확신에 찬 믿음 같은 것들이 형제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 이상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데아를 찾는 작업은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되든 간에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서 찾으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형제의 편지를 받고 바뀐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이제껏 저는, 이미 찾았고 그래서 believer로서만 살아왔지만, 다시금 investigator 역할도 함께 해야겠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안일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와 성도를 이끌어왔다는 것에 약간 불안감과 가책을 느낍니다. △△△△사제를 속된 말로, 물로 봐 왔었던 것에 대해 얼굴이 다 벌개집니다. 솔직히 이전까지는 이 친구가 잘난 체 한다고 조금은 생각했읍니다.

반기독교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꾸게 되었음을 함께 말씀드립니다. 형제가 코웃음 치실지 모르지만 저는 어쩌면 반기독교가 훨씬 더 기독교의 진리에 접근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읍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약한 사제로서 저의 신앙이 다른 일보다 앞선다는 점은 분명히 해둡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많은 현학적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형제가 찾으시는 신의 가호가 형제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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