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영리 디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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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사영리 디비기

몰러 0 2,553 2005.06.20 17:33
사영리 디비기    
  
 
 
작성일: 2002/07/23
수정일: 2002/07/24
작성자: 몰러





사영리는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의한 것으로 삼위일체와 같은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일종의 교리 정리라고 볼 수 있다. 사영리에는 기독교의 핵심교리가 거의 담겨있다. 중언하면 기독교인들이 맨날 떠들어대는 것들은 이 사영리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무방하다.

사영리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된다.

자연계에 자연 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 제1원리

제1원리는 사랑과 계획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과 관련된 문구는 요3:16에서 인용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바리새파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상한 것은 어느 사본을 보더라도 모두 예수가 독생자에 대해 남 얘기하듯 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나(I)’가 아니고 ‘그(He)’라고 했을까? 이것이 그냥 문학적인 표현법의 하나일 뿐일까? 당시 수많은 예수들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인 ‘우리 예수’가 활동 초창기에는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임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요한서 저자가 수많은 전승들을 예수에 맞춰 짜집기하다가 다른 계통의 전승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인칭문제에 신경을 덜 썼거나...
뭐 이 글의 논지에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이쯤하고 넘어가자. 하여간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단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란다. 신이 첨부터 똑바로 하지 못하고 삑싸리 해놓고는 그래도 선하신 분이라서 계속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실수를 벌충하시겠다는데 토달지 말자.

사랑에 대한 계획은 요10:10에서 인용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양)을 풍성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현실적인 것이라면 다른 미신들마냥 기복신앙적이지만 영적인 풍성함이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해도 되겠다. 그런데, 해설자는 풍성한 삶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뭐 그래도 영적인 것이라고 우기면 할 말 없다.
굳이 시비를 걸자면 예수가 사용했던 비유들 중에서 실수하신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수는 양이 주인의 음성을 기억하여 문(예수그리스도, 진리, 구원)으로 따라들어갈 것이요. 낯선 사람, 즉 도둑과 강도는 따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도 자기를 따르고 믿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런데 양은 사실 멍청하기 짝이 없어서 주인의 음성과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든 그가 모는 대로 움직인다.
이 부분에서 예수는 목수였지 목자가 아니시니 잘못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대답하는 전도사가 있었다. 등신 ~

정리하면 제1원리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사 영생 또는 풍성한 삶에 대한 계획을 세워두고 계셨는데,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 제2원리

제1원리에서 여운을 남겼던, 사람들이 풍성함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죄에 빠졌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풀어가는 기독교의 교리들은 한심할 따름이지만 논의를 위해 넘어간다. 하여간 사람이 본래 하나님과 사귀며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사귐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적극적일 때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소극적일 때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는 식으로 죄에 빠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과 끊어졌다는 논리에 주목하자.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의 오래되고 엿 같은 변명이 나온다.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면서 신의 선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들먹이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를 지향할 것을 그럼 몰랐느냐고 하면 신은 전능자로서 다 알고 계셨다고 하고, 그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인간이 죄에 빠지는 것을 방치했느냐고 물으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신 것이며 인간의 죄를 신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 ↑ ↑ G A P ↑ ↑ ↑

죄에 빠진 인간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사람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행, 철학, 종교 등의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도달하여 풍성한 삶을 누려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제2원리는 인간이 죄에 빠져 신과 인간사이에 갭이 생겼다는 것이다.



▲ 제3원리

제2원리에서 인간이 아무리 별지랄해도 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엄청난 갭 때문에 신에게로 다가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3원리에서 해결방향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롬5:8)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허접 신이 저지른 실수의 소산이라 걍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이 양심업ㅂ은 신이 인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선심 쓰듯 대속자를 보내는 아햏햏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노예된 기독교인들은 그래도 예수 믿고 따르겠단다. 예수가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14: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담당케 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십자가)다리를 놓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세 가지 원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제3원리는 신과 인간 사이에 생긴 갭에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다리 역할을 하여 건널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다만 그 다리는 그냥은 보이지 않고 건널 수도 없단다.



▲ 제4원리

제3원리에서 예수가 신에게로 가는 다리임을 알았다면 그것을 찾는 것이 제4원리,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엡2:8-9)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자신의 안에 들어오게 하여 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지적으로 동의한다든지 감정적인 경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의지의 행위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일을 자신이 주관하면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지며, 그리스도에게 주관하도록 맡기면 신의 계획과 일치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것보다 선행되는 전제는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는 것이다.

위 말에 대해 역순으로 디비보자. 여기에서 신의 선함은 자신을 돌봐주고 위해주는 차원에서의 선함이다. 보편적인 개념의 선이나 절대선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좋으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의 전능은 그 위에 나오는 말들로 인해 간단하게 부정된다. 믿으면 구원해주겠다는 조건부 계약은 차치하더라도, 인간이 구원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만든 것 자체, 그리고 그 과정이 바로 신이 전능하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무효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자유의지와 죄에 대한 말을 반복해보자. 지겹다고 하지 마라. 나는 점점 뺑뺑이가 재미있어진다.

인간의 죄는 자유의지의 소산이다. 자유의지를 잘 썼으면 괜찮은데,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죄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단은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 오케이? 아니라고 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자신이 주관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주관하게 해야 한다고 한 말은 개소리가 되어버리니까...

그럼,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회수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반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자유의지를 회수할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후자는 용납 못하겠지? 신은 전능하니까... 그리고 그 신은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는 분이라고 했자녀. 종말 때까지 시한을 두고 말여.
결국 자유의지를 반납하고 순종하는 인간은 천국이고, 반납하지 않고 반항하는 인간은 지옥이다. 오케이?

그런데 말이다. 상벌이나 손익을 자유의지로 판단하고 자유의지를 반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자유의지로 결정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을지 자유의지로 판단해 보라.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면서 대든다. 위에 잠깐 나왔던 전도사가 씨부린 것이다. 예수는 목공업 전공이지 목축업자가 아니라서 양의 비유를 잘못 쓴 거라고 했던 전도사 말이다.

부잣집 아이 리치는 마음이 착해서 가난한 아이인 푸어에게 비싼 장난감을 공짜로 줬어요. 그런데, 푸어는 그 장난감을 제대로 갖고 놀지 못하고 그것으로 딴 아이를 괴롭히거나 망가뜨리기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리치는 놀이공원 회원권을 줄 테니 그 장난감을 돌려달라고 했어요. 푸어는 놀이공원을 한번도 못 봤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모르고 장난감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해요. 푸어가 너무나 말을 안 들어서 리치는 장난감을 빼앗고 푸어를 벌줄 생각을 했어요. 몇일 뒤에 말이예요. 하지만 푸어는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지금도 장난감을 마구 갖고 놀고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이 전도사가 엄청 센스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안티 중에서도 감탄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ㅋㅋㅋ
하지만 위의 비유는 세가지 실수를 범하고 있다. 미리 말하지만 비유를 함부로 하다가는 조때는 수가 있다.
첫째, 장난감을 줬으면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에 대해서는 섭한 마음이 있더라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걸로 다른 아이를 때리는 것은 못하게 타일러야지 장난감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짓이다.(인간이 잘못한 것은 비포신 앞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소유권 등기이전을 확실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놀이공원 회원권은 푸어가 보기에 그냥 종이쪽일 뿐이다. 리치는 푸어를 놀이공원에 데려가서 한번 보여주고 난 후에 협상을 했어야 했다. 놀이터를 보여줘 놓고는 놀이공원을 말하니 푸어가 장난감을 내 놓겠는가? 그리고 놀이공원은 리치의 것이 아니며, 회원권만 리치의 것이 되었다.
놀이터 : 천국에 다녀왔다는 인간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국가와 민족별로 공통점이 거의 없다. 모두 자기가 아는 지식 범위에서 천국을 증언한다
놀이공원 : 이 비유는 결국 천국이 야훼가 세운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세운 것이고 야훼는 단지 그 천국 출입증만 갖고 있다는 것이 된다

셋째, 한번 준 장난감을 도로 빼앗겠다는 발상부터 문제가 되는데, 벌까지 준다니? 그냥 빼앗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놀이공원에 데려가면 그만 아닌가? 이는 결국 리치가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푸어의 복종을 강요/유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도 부잣집 아이 중에 가난한 집 아이를 비싼 장난감이나 물건으로 회유하고는 똘마니로 부리려는 짓을 하는 넘이 많단다. 여기에 푸어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큼도 찾기 어렵다. 그리고 날을 정해서 뺏는다니... 푸어가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즉각 제지를 해야지 뭘 기다려?
모순된 것을 애써 설명해봤자 모순을 헤어날 방법이 없다.

이상 반론에 대한 전도사의 대답은 ‘믿으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할 사실은...

감정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곧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특별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지라도 안심하십시오.

다음 기차 그림은 사실(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믿음(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뢰)과 감정 (믿음과 순종의 결과)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14:21)

┏━○━━○━┓ ┏○━━━━○┓ ┏○━━━━○┓
┃ 사 실 ┃-┃ 믿 음 ┃-┃ 감 정 ┃
┃ 기 관 차 ┃-┃ 연 료 차 ┃-┃ 객 차 ┃
┗━○━━○━┛ ┗○━━━━○┛ ┗○━━━━○┛


기관차는 객차가 있으나 없으나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차로 기관차나 연료차를 끌려고 하는 것 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의 말씀의 신실성에 믿음의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위의 비유도 한참 웃기는 비유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은혜 받겠지만 말이다.

과연 증기기관차가 얼마나 쾌적할지, 얼마나 빨리 갈지, 얼마나 효율적인지 의문이다.
난 이성이라는 연료로 작동되는 사실이라는 엔진을 장착한 스포츠카 같은 감정을 갖고 싶다. 언제까지 칙칙폭폭하구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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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영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영리는 시작부터 꼬여 있기 때문에 2, 3, 4원리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전부를 다루기 위해서 제1원리에서 그냥 넘어간 것이 많다. 넘어간 것들만 갖고도 기독교는 충분히 부정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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