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칼럼 디비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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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기독 칼럼 디비기(2)

몰러 0 2,442 2005.06.20 17:29
기독 칼럼 디비기(2)    
  
 
 
작성일: 2002/07/18
수정일: 2003/03/05
작성자: 몰러 





피로 사셨으니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한 토인이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추장의 노여움을 샀다. 추장은 화가 치밀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을 명했다. 이 사실을 안 선교사는 비싼 보화를 싸 가지고 가서 추장에게 주면서 죄인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추장은 보기보다 완고하고 냉담했다. "저런 물건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상아나, 금, 은, 노예 따위는 부럽지 않소. 그런 것들은 저쪽 부락에 가면 얼마든지 빼앗아 올 수 있소. 더구나 백인의 물건은 갖지 않겠소. 내가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피요. 다른 것은 소용없소." 추장은 다시 부하에게 죄인을 죽일 것을 명했다.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려는 순간 선교사의 가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인 앞을 가로막고는 자기가 화살에 맞았다. 순간 선교사는 쓰러졌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화살을 뽑아 땅에 던졌다.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그는 이러한 몸으로 추장에게 다가갔다.

"자, 당신이 구하고 있는 피요. 받으시오. 그리고 그를 살려 주시오." 선교사의 행동에 감동한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좋소. 당신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그를 샀소. 그는 당신의 것이오." 그 때에 죄인은 선교사의 발 밑에 엎드려 감격에 떨면서 부르짖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은 피로 저를 사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부터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후 선교사가 가는 곳마다 그 토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에도 결코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맞아야 할 저주와 죽음의 화살을 대신 맞아 피흘려 주심으로 우리가 은혜와 생명을 얻었다. 우리의 평생을 주께 드려 감사함으로 극진하게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언뜻 보면 아주 그럴듯하게 예수의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것은 수많은 교인들이 저 선교사처럼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으므로 그 주님은 함 섬겨볼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 교인들의 행동은 저런 희생과 거리가 먼 경우가 더 많다. 뭐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통계놀음일 뿐이니까... 핵심은 바로 이러한 섬김이 우리가 죄를 저질렀고 그래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속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말하는 벌을 받아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며 따라서 저런 희생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믿는 자들은 반문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사소한 잘못으로 과중한 처벌을 받는 억울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느냐, 그런 억울함을 벗겨주려 하신 주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 다른 관점으로 디비보자. 토인이 저지른 실수는 남이 보기엔 사소할 지 모르나, 그 부족 내에서는 중대한 범죄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칼럼은 예를 잘못 들었다는 말이다. 인간의 불순종이 사소한 실수였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칼럼 저자의 의도대로 배치해 보겠다.

토인=인간, 토인의 죄=불순종의 죄, 선교사=예수, 선교사가 화살을 맞음=십자가 보혈, 추장=심판자

여기서 토인과 선교사는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추장은 심각하다. 우선 추장을 하나님으로 비유하기는 곤란하다. 사소한 것에 성질 내는 완고하고 냉담한 하나님? 하지만 칼럼의 의도가 성립하려면 추장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아니면 안 된다.

위 칼럼은 어떤 예를 들어서 결론을 도출할 때 빠지기 쉬운 자가당착적인 실수의 대표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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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의 기도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기도란 것이 하나님이 내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총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의 비밀을 알았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서 많은 병사가 죽을 때마다 동족이 죽는 쓰라린 아픔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병사의 숫자가 많고 또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서 다 유리한대도 남군의 용장 로버트 리 장군 때문에 늘 지기만 합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하루에 두 세시간씩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통령을 위로합니다. 리셉션장에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한 북군의 교회 대표가 링컨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각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북군편이 되어서 북군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온 교회가 날마다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링컨 대통령이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항상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이것은 문제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듭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내 축복의 창고를 채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이다. 하지만 몰러는 이것이 사실이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깨닫고 완벽하게 실천하기를 바란다. 우선 십자가 군병 어쩌구저쩌구 하는 삽송을 찬송가에서 빼라. 그리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목사가 있거든 살포시 똥침 찔러주고 딴 교회를 물색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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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 때문에

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전도 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전도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하였다.

한번은 봉사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을 만나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라고 물었다. 선교사 후보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허드슨 테이러는 말하기를 "그 모든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어려운 시험과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 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진실로 좋아해서 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나와 처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냄새가 나는 이런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전도와 봉사를 하게 할 것이다.

파란색으로 된 부분을 다시 읽어 보라.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겨라.
많이 봐준 거다. 이거...
선교사역이 순수하게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기독CF로 쓴다거나 봉사의 댓가로 귀의를 요구하는 식이라면 위 칼럼은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개소리로 전락한다. 예수님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냐?
예수를 실없는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안티가 아니라 바로 개독이다.

예를 들어 진정한 사역이 뭔지 말해 주겠다.
‘아리끼리족의 마을에 드뎌 교회를 지었고, 또 모든 부족민을 제자로 만들었다’
이딴 식으로 사역보고 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담아 환자 60명을 성심껏 치료하였다. 그래서 아리끼리 족은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요렇게 하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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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힘(이거 전에 함 했던 것 같은디...)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영국의 컨테이너 운반선 한 척이 화물을 실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한 선원이 모든 짐이 다 부려졌는지를 확인하려고 어떤 냉동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르는 다른 선원이 냉동실 문을 닫았다. 안에 갇힌 선원은 벽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냉동실 안에 식량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선원은 자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힘을 내어 냉동실 벽 위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야기를 시간별로 날짜별로 새겨나갔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기록하였다. 배가 리스본에 닻을 내렸을 때 냉동 컨테이너의 문을 연 선장은 죽어 있는 선원을 발견하고서 크게 놀랬다. 선장은 그 안의 온도를 재보았다. 온도계는 섭씨 1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화물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오는 항해동안 냉동 장치는 작동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선원은 단지 자기가 춥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인생이 열리기 때문이다(잠23:7). 그래서 인생을 바꾸려면 먼저 생각이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생각의 조정실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잊지 말자.

겉사람을 보면서 안된다는 생각, 별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속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를 보면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며 이 난국을 극복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열어가기 바란다.

이 칼럼도 예를 잘못 들었다. 결론부를 다음과 같이 바꿔도 되기 때문이다.

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 우리가 원죄의 굴레를 쓰고 있다는 생각, 종말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생각, 심판 후에 있을 상복에 대한 기대감... 이런 것들을 버리고 다시 세상을 보라. 비록 냉동실에 갇혀 있지만 춥지도 않고 음식도 충분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글을 보고 각자 나름대로 느끼면 그만이지만, 자기 느낌을 관념화하고 나아가 일반화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잘 하는 짓거리다. 앞으로 이런 류의 글을 올리려는 교인들은 다시 한번 살펴보고 올릴 일이다.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는 식의 개소리는 딸따리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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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필립 디 네리(Philip de Neri)는 성자로도 불리우는 16세기의 위대한 사람이다. 하루는 네리가 당시의 최고의 대학이었던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는 동안에 어떤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의 말인즉 자기는 유명한 그 대학에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네리는 그 청년에게 묻기를 "대학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했더니 청년의 대답인즉, "박사의 학위를 얻겠다"고 했다. 네리는 계속 질문하길,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무엇을 하겠는가" 했더니, 청년은 답변하기를,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처리해서 뭇 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다"고 했다. 네리는 다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청년은, 그 후에는 상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돈을 많이 벌고 드디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네리는 계속해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고 했다. 청년은 답변하기를,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하게 살 것이라"고 했다. 네리는 다시 물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지?" 그러자 청년이 대답하기를,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 라고 했다. 네리는 한 번 더 물어 보았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는지 몰라하는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로 가 버렸다. 밤사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본 청년은 인생의 허망함을 크게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다 자기의 일생을 맡겼다고 한다.

이제 또 한해가 가고 있다. 대학 들어가고, 직장잡고, 결혼하고, 내집 마련하고, 아이 낳고 키우고.... 그러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 아닌가? 진정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연말연시가 되기 바란다.

이 칼럼의 주제를 보면 바로 몰러가 안티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인생은 불확실하지는 않더라도 결국은 허망하므로 인생 이후의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 논리는 꺾어 버려야할 악의 꽃이다. 이 칼럼은 더한 악담을 들어야 마땅하다.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을 외면해야할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평범한 삶들의 집합인 역사에 어떤 비범함이 변수를 던지고 그렇게 해서 인류가 변화되어 온 것이 아니던가?
좋다. 평범한 삶은 발전이 없다고 치자. 발전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깊은 물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 이 칼럼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과는 상관없으니까...

이 칼럼은 신앙의 삶이 아닌 인생은 무의미한 삶밖에 없다는 이분법적 태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칼럼은 예를 들어도 꼭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였다는 점이다. 이 학생은 명성과 재물과 평안을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정의와 진리에 대한 봉사가 아닌 일신의 영달을 위한 의도만 있었으니 늙어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방향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낼 의미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학생은 그것을 알지 못했고, 결국 이 칼럼은 허망한 삶이냐 신앙하는 삶이냐는 이분법적인 가치판단만 앞세운 셈이다.

형이상학적인 추구의 대상 중에서 종교가 가장 저급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이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최상의 가치라고 하지도 않고 유일한 가치라고 우기는데 문제가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평범한 삶이 결국은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는 것일까?
영희와 소꿉장난할 때의 천진함, 미숙이에게서 받은 가슴 떨리는 러브레타, 그러나 몇년 뒤에 다른 여자 유정이와 여행길에서 나누었던 첫 키스, 신혼여행 첫날 밤 유정이의 마지막 옷 한겹을 벗길 때의 심장 터지는 느낌, 같이 아기를 씻기다가 마주친 손길의 따스함, 야구장에서 치어리더의 팬티에 눈이 확 돌아가고도 아닌 척 아내에게 근엄 떨던 혼자만의 비밀, 20년만에 만난 미숙이를 보고 다시 설레는 가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할망구 유정이의 손길...
이렇게 여자와 관련된 추억만 갖고도 죽음의 침상에서 미소지으며 눈감을 수 있는데...

인생이 허무하다고만 하지 말고 삶의 재미를 찾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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