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저도 떠나기로 하지요.


그럼 저도 떠나기로 하지요.

※※※ 0 2,586 2003.09.27 21:25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11월20일(월) 02시23분19초 KST
제 목(Title): 그럼 저도 떠나기로 하지요.



과거의 철학 보드 시절이 그립군요.

기독교 보드가 철학 보드에서 분리되기 전에는 다양한 열린 토론이 가능했지요.

그곳에서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고 진심으로 존경하고픈 많은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보드가 분리된 직후 저는 매우 기대가 컸습니다.

제가 늘 알고 싶어하던 것들을 집중적으로 나눌 수 있는 보드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기독교 보드 초창기에 제가 여러분들께 드린 두 가지 질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족보의 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유월절 전날인가

유월절 다음날인가?' 로부터 일어난 일련의 토론을 통해 저는 많은 것을 배웠고

특히 천주교인이신 soliton(김찬주)님께는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보드는 이제 그 구하고자 하는 바가 달라져 있는 듯합니다.

신자들만의 마음을 나누는 평화로운 보드이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은 듯하고

또한 과거의 정교한 논객들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으며 천주교인마저 어쩐지

불편함을 느껴야만 하는 이곳에 '인본주의자'이며 '반기독교인'인 제가 지금까지

부대낄 수 있었던 것은 넓은 마음을 가지신 여러 친구들의 배려에 크게 빚진

셈입니다.


키즈의 보드에 출입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저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여기에 머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기독교 보드에 무언가 쓰고 싶으면

저의 친정집인 서울대 보드를 이용하기로 하지요. 가끔 들르긴 하겠지만 다시

이곳에 흔적을 남기지는 않겠습니다. 저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한다면 반성하고 죄값을 치르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의 존재 자체가 불편함의 원인인 이상 저는 사라지는

것 이외에 다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

이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다. 왜냐.

1. 진짜니까. 2. 과학적으로 안 계시다고 증명된 바 없으니까 (이건 의미심장한

이야기다...)'라는 글에 '천만에... 안 계시다. 1. 가짜니까. 2. 과학적으로

있다고 증명된 바 없으니까 (이건 말장난이다...)'라는 답변을 붙이는 것은

저의 진심이 담겨 있지만 아무런 소용 없는 일이니까요.


저는 이 보드가 '논리'의 지배하에 있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논리성을

배제한 따뜻함, 뜨거움이 있는 보드라면 차라리 나았겠지요.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느 편도 아닙니다. 어울리지 않는 무대에 끌려나와 가련하게

도살된 논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참혹한 광경이지요.


처음엔 논리를 펼칩니다. 그러다가 논리가 궁해지면 즉시 불가지론으로 비약하고

마침내 거기에서 만병통치약인 성경과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왜 처음부터 성경과 하나님에게 직접 호소하지 않고 논리를 희롱하시지요?

'이론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대제사장 안나스 류의 반쪽 논리를 농하시기보다는

당신에게 허락된 달란트를 쓰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논리는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등장하는 3류 배우가 아닙니다.


......

섬뜩함... 그것이 이 보드를 감싸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보드에서의 저의 역할에 대체로 만족합니다. 이제 물러나는 마당에

결산을 해 본 결과가 대충 그러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 세상과 우리 지구촌 가족에 대해 '사탄'이라는 이름을 예사로

붙이시는 분들을 볼 때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섬뜩함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분께선 느끼지 못하시겠지요. 제가 그 섬뜩함을 되비쳐 드리고 나서야 거울 속의

섬뜩함에 전율하시더군요. 저는 잠시 머물다 가는 거울이었다고 자부하면서

기쁘게 떠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거울인 줄 모르시겠지요.)


......

저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시련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저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한 여성이 있지요. 그분도 때때로 이곳을

들러 봅니다. 그리고 저의 글을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기독교인입니다.

제가 몇 개월동안 그분의 주위를 맴돌기만 한 것은 단지 그 때문입니다.


원래 제가 바라는 여성상은 빼어난 미모나 지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신앙을 갖지

않은' 여성입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자는 바가지(?)에 시달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이러한 분이란다'라고 이야기하는 어머니와 '아냐... 그건

거짓말이야'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가진 불행한 아이는 저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것은 어떤 개인의 한두 가지

면이 아니라 전 인격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세계관을 숨긴 채

사랑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전쟁과 사랑에서는 무슨 짓이라도

용서된다'고 했지만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에 쓴 글들로 인해

사랑하는 그분이 저를 멀리하게 된다 하더라도 저는 숨길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전 인격'을 그분 앞에 펼쳐 보이지 않고서는 사랑을 구할 수 없으니까요.


이제 그분께 마지막으로 저의 부족한 절반을 채워 주시기를, 제가 가는 길의

반려가 되어 주시기를 간구할 생각입니다. 저는 이제 아무런 숨김도 가릴 것도

없습니다. 제가 신앙인으로서의 그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듯이

그분께서도 불신자인 저를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무척 장황한 고별사가 되었군요.

언제나와 같이 걷던 길을 계속 걸어나가기로 하지요. 카알라일의 표현처럼 기독교는

실존주의 속에서 고통스런 단말마적 죽음이 아니라 편안한 안락사를 맞았습니다.

미소를 띤 채 누워 있는 하느님의 임종의 자리에 참례하러 갈 생각입니다.

이 또한 무척 멀고 험한 여행길이 되겠지요. 감발을 풀지도 못한 채 배낭을

베개삼아 제가 먼저 잠들겠지만요.


그동안 제게 힘이 되어주시고 신선한 자극이 되어 주신 MoMo님, 김마가님, 인권이,

하야니, guest(----용----)님, 그리고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는 많은 분들께

저 나름의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니체가 말한 대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길가에

앉아 있으나 결코 사람과 같지는 않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인 staire가

드리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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