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to guest & sca (나의 예수관)


[R] to guest & sca (나의 예수관)

※※※ 0 2,893 2003.09.30 03:15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8년02월25일(수) 20시26분01초 ROK
제 목(Title): [R] to guest & sca (나의 예수관)


guest님과(캐사르?) sca(용)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입니다.


1.건전한 상식을 거스르는 언행으로 자주 비난받았으며 여자에게 과도한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했다.

(guest) 건전한 상식을 뭐라고 해석해야 하나요?에 대한 질문을 꾹 누르며 동의.
여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요? 그런식으로 몰아부치면 붓다도 "여자가 제공한 염소젓"을 먹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떠난 적도 있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하실른지요? 그리고, 스테어님도
"과도한 관심"으로 누구에게 접근한 적이 있지요?

(sca) 동의합니다. 다만, 예수가 위반한 '건전한 상식'은 '지배체제'의 '건전한
상식'이 아닌가 합니다만... 여성에 대한 관심의 경우도 '건전한 상식'의 경우에
포함된다고 보구요.

--> sca님께서는 저의 의중을 제대로 읽으셨습니다. 저는 원래 '건전한 상식'을

존중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집단은 개체보다

소중하다'거나 '선수는 심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따위의 사고방식을 혐오합니다.

예수는 당시의 '건전한' 상식을 규정하고 대중에게 강제할 만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시하는 질서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저는 Symond보다 예수를 조금 더 좋아합니다.) 저는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100% 신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예수가 '건전한' 편이 아니라

'불온한' 편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성경의 묘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Symond님 역시 '몰상식'으로 비난받을 만한 글을 올리고 있지만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P (사견이지만 'Symond가 여자를

밝힌다', 'Symond가 여대 보드에서 추태를 부린다'라는 투의 비난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든 아니든 남자가 여자를 밝히는 것이 어째서 지탄의

대상인지요? 오이를 밝힌다면 그건 문제시할 일이겠지만...)


2.정치/경제/사회/생물학에 대한 지식은 얕은 편이었으나 끊임없이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guest) 지식이 얕은 편? 제가 보기에는 지식이 얕은 것이 아니라,
끼어들어 => 별로 듣기좋은 단어는 아니죠. 대부분의 경우 반대파가 질문을 먼저
해온 경우가 많음.

(sca) 동의합니다. 다만, 시몬드와는 달리, 예수는 그런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힘든 사람들끼리, 그냥 통하는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했을 것이라는 생각인데요.. 그리고.. 문제는 시몬드와
예수의 '방향'이 다르다는 거겠죠?

--> 예수가 과연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힘들었는지는 적어도 제게는 미해결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도 예수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지 아니면 비싼 교육비가

드는 율법학자 수업을 어느 정도나마 받은 유복한 사람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예수가 제대로 된 율법 수업을 받았다 하더라도 당대의

다른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정치/경제/사회/생물학에 대한 뛰어난 식견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율법에 대해서라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만요. 그리고 '끼어들어'라는 표현은 물론 듣기 좋으라고 쓴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모르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라는 staire의 사견이 당연히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반대파가 질문을 먼저 해 온 경우라고 해서 이러한

비난을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3.차별/억압받는 자들을 자주 언급은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guest)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로, 차별/억압을 정치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으로 해석했음. 즉, 로마인들에 의한 정치적인 억압이 아니라, 악의
무리에게서 받는 정신적인 억압을 중시했음. 예수는 자신을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고 수차례 말했음을 상기하실 것.

(sca)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무슨 뜻인지 설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처방전'을 제대로 발행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자기 중심적 이해'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까? 첫번째 경우라면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고 보입니다만.

-->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한 정치적인 억압이 아니라, 악의 무리에게서 받는

정신적인 억압을 중시했다'라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을

2000년간 유포시켜 온 것이야말로 기독교회가 예수에게 저지른 가장 심한

모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는 정치적인 억압만이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정신적인 억압 운운하는 알아듣기 어려운 개념

이전에 정치적/경제적인 억압에 대해 진지하게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대단히 길어질 수 있으므로 일단 저의 견해를

제시하는 정도로 해둡니다. (어쨌든 'staire의' 예수관을 물으셨으니까요.)

게스트님께서 원하신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쟁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sca님의 질문에 대해서라면 예수가 차별과 억압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수는 자본의 개념도, 노동의 착취에 대한

인식도, 계급의식도, 국제 정세와 시민 불복종의 상관관계에 대한 지식도 도무지

구체적인 형태로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대가 그러했던 것이지

그의 탓이 아닙니다. 예수도 인간인 이상 (staire의 세계관에는 '신'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그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일 따름입니다. 저는 글자 그대로

예수가 차별과 억압을 받는 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는 그들을 곁에서, 제 3자의 눈으로 보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의 글 '예수 사상의 핵심은 사랑인가'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시각을 언급한 적이 있으며 예수가 근로 대중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것 때문에 sca님과 '학문적인' 논쟁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4.구약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guest) 동의.

(sca) 동의합니다. 다만, '구애받는 정도'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많이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어차피 유대교인이지 기독교인은 아니잖습니까?

--> 전에는 예수가 구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구약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그 점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학과의 다니던 제 동기 녀석의 얘기로는 예수가 구약을 잘 모르는 듯이 보이는

것은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이 구약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던데 저 역시 그런 설명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그 점에

대해서 결론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유대교인이라는 견해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듣고보니 대단히 참신하군요. :) Symond님께서 구약을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간의 Symond님의 행적 중에서

'목사답지 못했던' 유일한 모습이었죠.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이런 배타적 유대인 민족주의경전 구약성경을 경배하는 것은
잘못이다. 막연히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무식하게
성경을 달달 외는 암기주의 광신이 오늘의 한국교회 부패를 만들었다. (이 보드
98년 2월 2일자, Symond님의 글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편집되었나 #11')


5.처음에는 목자를 자처했으나 갈수록 자신의 신앙에 깊이 몰입하여 나중에는
스스로를 하늘 또는 하느님과 동일시했다.

(guest)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음.

(sca) 이건 동의하기 힘듭니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여겼을지는 몰라도,
'신'으로 동일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메시아'라는 건 당시의
'천년왕국운동 지도자'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저 위에 제가 적어
놓았죠.

--> 이 부분은 제가 치밀하게 쓰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어쨌든 초기의 예수와

말년의(?) 예수는 그 신앙적 열광의 깊이가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면 어차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나 삼위일체

아닌가... 라는 생각에서 허술한 채 내버려 두었는데 역시 손질을 더 할 걸

그랬지요? :)


6.종종 한 입으로 두 말 하거나 한번 했던 말을 조금씩 바꾸어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다.

(guest) 표현상의 차이가 가끔씩 있는 것은 후세 기록자들의 기록상의 실수라고
생각됨. 결정적인 얘기를 뒤바꾼 적 없음.

(sca) '한쪽 뺨 맞고 성질내신 예수님' 같은 경우인가요? 복음서를 다시 읽어보긴
해야겠습니다만...

--> '기록자들의 기록상의 실수'라면 캐사르(혹시 '케사르'를 잘못 쓰신 것은

아닙니까?) 게스트님께서는 성경의 기록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6번은 철회하겠습니다. 예수가 실제로 복음서에 씌어 있는

대로 말했다고 믿는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항목이거든요. (그런데 게스트님

께서는 성경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씌어진 책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결정적인 얘기를 뒤바꾼 예'라는 것은 이 보드에서 이미 몇 가지 언급된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 안 나시는지요?


7.자신의 말을 스스로는 잘 지키지 않았다.

(guest) 어떤 경우인가요?

(sca) '한쪽 뺨 맞고 성질내신 예수님' 같은 경우인가요? 복음서를 다시 읽어보긴
해야겠습니다만...

--> 한쪽 뺨 맞고 성질내신 예수님(?)이라니 이런 게 생각나는군요. sca님께서는

이 예를 말씀하신 거 맞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마태 5:39-41)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곁에 서 있던 경비병 한 사람이 "대사제님께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며 예수의 뺨을 때렸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
하셨다. (요한 18:22-23)

결국 다른 뺨까지 돌려대기는커녕 즉시 항의를 하셨군요.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는 건 좀 야박한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장면은 예수를 이해해 드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리 예수라도 뺨을 맞았는데 한가하게 다른 뺨을 돌려댈 리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다음과 같은 예는 어떨까요?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마태 5:42)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 오고 있으니 돌려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
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마태
15:22-26)

이것도 보기에 따라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얼마나

절실하게 간구하는지 보려고 괜히 튕겼다... 라고 해석하시는 목사님을 저는

기억합니다. 어쨌든 결국에는 도와줬으니까요. 예수보다는 가나안 여자가 좀더

돋보이는 장면이죠.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
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1-22)

staire가 주일학교 교사 시절에 (고등부였습니다.) '나중에 성전 상인들을 채찍으로

쫓으실 때는 왜 490번 용서하지 않으셨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어떤 녀석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490번 이상 용서하시다가 끝내 참을 수 없어서 채찍질을 하신 거 아닐까요?"

좀더 똑똑한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전의 장사치들이 예수님의 형제입니까? 나 참..."

요컨대 어떤 예를 들이대더라도 합리화하려면 얼마든지 합리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니 제가 예를 드는 것을 합리화하시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저는

'staire의 예수관'을 말할 뿐이며 위에 열거한 것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훨씬 많지요)


8.대답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동문서답을 하기도 했다.

(guest) 필요에 의해서 동문서답이 아닌 "선문답"을 한 경우가 있을 뿐임.

(sca) 동의합니다. 다만, 시몬드의 경우에는 '순수한 동문'이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불순한 동문'도 많지 않았습니까?

--> sca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관'이지

Symond관이 아닙니다. 그리고 캐사르 게스트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선문답'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예를 같이 보면서 이야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대신 저도 동문서답의 예를 하나만 들겠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 이것은 로마에

세금을 내라는 것인가요? 내지 말라는 것인가요?


9.종교적 입장이 다른 사람을 즐겨 비난/저주하고 때로는 몸소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guest) 몸소 물리력을 행사한 경우는 "종교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전을 더럽힌 사람들에 대한 것임. 예수는 상대방에 대한 저주/
비난을 "즐겨" 하지는 않았음. 죽기 전에 자신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한 것을
상기하기 바람.

(sca) 동의합니다. 다만, 시몬드의 경우에는 '가치 없는 갈등'이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가치 있는 갈등'이었다고 봅니다만...

--> 성전에서 해도 되는 행위와 해서는 안될 행위,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한 예수와 상인들의 입장 차이가 소요의 원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입장의 차이'가 아니면 무엇인지요? 그리고 '즐겨' 라는 말은 각자 느끼기

나름이므로 저에게 동의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석가모니 또는

소크라테스, 간디 등과 비교할 때 예수는 확실히 비난/저주를 입에 많이 올린

편에 속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치'에 대한 sca님의 언급에 대해서는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래서요?' 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10.성급하고 흥분을 잘 하며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자에게 숨김 없이 분노를
드러냈다.

(guest) 예수가 "성급"했다는 사실에 동의불가. 필요에 의한 흥분/분노는 있었음.

(sca) 동의합니다. 저도 '왕싸가지 예수?'란 제목으로 설교해 본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예수는 '구제가능'한 사람(동시에 '구제가능한 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캐사르 게스트님은 당연히 동의 불가겠지요. 굳이 동의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청하신대로 staire의 예수관을 말씀드릴 뿐이니까요. 그런데 예수가

흥분하고 분노하는 것은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으로서 (staire가 '인간적'이라고

표현할 때는 좋은 의미 입니다.) 굳이 '필요에 따라...'라고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분노가 '필요'했을까요? 화내지 말고 좋은 말로 할 수는

없었을까요? (요컨대 예수가 화낸 것 자체에는 저도 별로 불만이 없지만 '필요에

따라'라는 변명은 아무래도 구차해 보인다는 것이죠.)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도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마태 12:34)

이 부분의 앞뒤를 아무리 읽어봐도 예수가 이렇게 흥분할 '필요성'은 발견할

수가 없거든요. (잡담 한 가지... 성경 공부 모임에서 staire가 이 구절을 읽다가

'독사의 족속'을 '목사의 족속'으로 잘못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11.종교적으로 어디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guest) 동의.

(sca) 동의합니다.


12.교파를 초월하여 동시대의 경건한 이들이 합심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guest) 동시대의 경건한 이들(?)이 아닌 동시대의 반대파임.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을 무조건 경건하다고 볼 수 없음. 예수는 이들의 "외식"을 싫어하신
것임.

(sca) 전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데올로그'라고는
생각합니다. 반면 시몬드를 공박하는 '경건한 자'들을 '이데올로그'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조건 하에서 동의합니다.

--> 대체로 sca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저는 '경건한 자'라는 말을

제 1항의 '건전한 상식'과 같은 의미로 썼습니다. 참, 그리고 예수는 이들의

외식만을 싫어한 것은 아니죠. 혹시 캐사르님도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sca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데올로그적 요소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바리새인 = 이데올로그'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바리새인들만큼 실제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자들이 있었던가요?


13.갖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체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guest) 갖가지 "추측"이 아닌 갖가지 믿음들이 난무해왔다. 각자 그를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몬드와 스테어와 제가 받아들이는 예수는 각자의
몫인가?)

(sca) 동의합니다. 그런데 라이언 게스트님의 '비겁하게 숨어서...'식의 해석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것은 예수 시절의 행정 기록 부실 탓이겠지요.

--> 추측이라고 부르든 믿음이라고 부르든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

그를 정확히 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씀에는 동의해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를 정확히 알기는커녕 아는 부분보다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예수에

대한 미해결의 의문점(그중 한두 가지는 이 글에서 말씀드렸지요?)들이 셀 수

없이 많거든요. 제 짐작으로는 '나는 예수를 정확히 안다' 라고 함부로 말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들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캐사르 게스트님의 결론: 예수는 그 시대에나 현대에나 필요한 구세주이다.

--> 그것으로서 좋습니다. (그런데 정말 '케사르'가 아닌 '캐사르'입니까?)

그리고 제가 죽기 전에 확정판이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저의 '잠정적인'

결론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staire의 잠정적인 결론 :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일 수도 있고 상상의

인물일 수도 있으며 한 사람 이상의 전승이 짜집기된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인격과 지식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약점보다는

멋있는 구석이 많은 '괜찮은' 녀석이었다. (물론 실재했다면 말이죠...)

이 결론은 예고 없이 upgrade될 수 있습니다. :)


* 본문 중에 예수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이 캐사르 게스트님의 입장에서는 불손하게

 비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합니다. 게스트님께서는 저의

 솔직한 예수관을 알고 싶으신 것이지 듣기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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