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4] 이적은 없다!

[칼럼 3-4] 이적은 없다!

김장한 0 3,171 2004.11.26 09:40
 

위대한 이적


박혁거세가 위대한 왕인 이유는 단지 그가 알에서 태어난 인물이기 때문인가?


석가는 태어난 직후 하늘과 땅을 가리키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는가?


제우스는 거대한 손을 펼쳐 천둥으로 신벌을 내리는가?


사악한 마수 펜릴은 드워프들의 글레입니르로 잡을 수가 있었던가?


여호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었는가?


예수는 물 위를 것을 수 있었는가?


위의 항목들에 대해, 우선 그 사실의 객관적 입증은 떠나보자.


다른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적이란 무엇일까?


“상식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이성으로 납득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이 세상의 모든 신화와 종교는 이러한 이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도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신적 인물들은 “상식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이성으로 납득 가능하지도” 않은 일들을 해대는 것일까?


가장 보편타당한 것은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다.


해가 지면 밤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생명이 생명을 잉태하여 노쇠가 오면 죽음을 맞이하는 이 대자연의 섭리-그것 이상으로 위대하고 장엄한 광경이 있었던가!


그래서 석가의 이적을 우리가 믿을 필요도, 이유도 없지만 석가의 죽음에 대한 우화에 공감한다.


아이를 잃은 어미에게 석가는 아이를 살려주겠노라고 말하는 대신, 이 세상에서 자기 가족 중 하나라도 흉사를 당하지 않은 집의 물을 떠오라 한다.


(버전에 따라 다른 것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도 있다. 그 집 나무의 나무 가지나 잎 등으로 바뀌지만 궁극적인 내용은, 아무도 죽지 않은 집을 찾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미가 전국을 떠돌아도 그러한 집은 없으며, 행복해 보이는 집이라도 하나쯤은 다들 그늘을 지니고 살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생로병사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죽음을 모면한, 객관적으로 입증된 인물이 아무도 없음으로, 그리고 현대의 사상가 하이데거 등도 죽음을 “인간에게 주어진, 다른 이에게 양도하거나 피해갈 수 없는 가능성, 즉 한계 상황)으로 규정함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우화는 진실일지 아닐지는 몰라도 “가치있다”.


그런데 왜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는가?


알에서 나야만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예수는 왜 물 위를 걷는가?


바쁘게 물 위를 걸어가서 구할 사람이라도 있다던가?


물 위를 걷는 방법을 인간에게 가르치기 위함인가?


해괴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쓸데없고 해괴하여 힘만이 가득한 신을 우리는 “괴력난신”으로 경계하여 왔다.


이적의 부정1-합목적성의 부재

(대부분의 신화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부정당해 왔습니다. 단지 기독교만이 이러한 이적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입에 쑤셔 넣어도” 믿어지지 않는 다른 신화나 종교의 이적은 제외하고 기독교의 이적을 위주로 다룹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적은 그 목적이 없다는데 그 모순이 있다.


인간의, 아니 생물의 모든 행위는 아주 합목적적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자신의 자취를 이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 그 기저에는 숨길 수 없는 합목적성이 있다.


참수된 목도 살아있는 수초 내지 수분간은 물을 찾는다고 한다.


먹고 마시며 배설하는 그 행위의 모두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는 생명의 진리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자 존재 목적인 의식주에는 인간의 진실이 있다.


하지만 이적에 무슨 목적성을 찾을 것인가?


결혼식이 있다면 손을 대접할 포도주를 미리 알맞게 준비할 것이지 부족하게 하여 놓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면 이적인가?


허허벌판에 대규모의 군중집회를 열어 놓고 먹을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가 오병이어로 수만 군중을 먹이면 이적인가?


자신의 게으름과 선견지명의 부족을 변명해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이적이라고?


미리 수요를 예측하여 일에 차질이 없게 하는 일은 범인도 하거늘 범인이 하는 일은 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이적인가?


다시 죽을 나자로는 왜 살렸는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 죽는 고통을 두 번 주려 함인가?


목적이 무엇이길래 끊임없이 이적을 베푸는가?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예측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이다.


하지만 이적이란 이 세상의 법칙을 비틀어 과정 없이 결과만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적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율법”을 비틀어 어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진짜로 그렇게 믿어지시는가?


이적의 부정2-상황 윤리적 한계


이적이 베풀어지는 광경은 아주 상황적이다.


즉,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이” “필요한 상황에” “원인과 과정이 없이 결과만이” “불쑥”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이적이다.


바쁘면 목구멍에서 손이 튀어나온다고들 한다.


물론 우스운 속담인데, 진짜로 목구멍에서 손이 튀어나오는 것-이것이 이적이다.


즉 이적의 필수요소는 바로 “필요”이다.


칼과 활로 전쟁을 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적진에 불이 떨어지는 광경을 얼마나 오매불망 바랬을까?


이러한 “필요”가 생겨서 인간은 화공이라는 전술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화공이라는 과정이 없이 단순한 결과만이 우리에게 보여지면 그것이 바로 이적이다.


그러하다면 예수의 이적에 그 “필요”가 무엇인가?


예수를 팔아 잘 먹고 잘 사는 기독교 권력이다.


그들만이 예수의 이적이 “필요” 하였다.


나는 반 기독교인으로 예수가 설마 재림할까 우려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우려는 사실상 기우이다.


왜냐고?


기독교인들이 다시 못 박아 줄 테니 아무 염려 없다.


예수의 이적이 필요한 그들이니 예수가 재림한 것이 판명되면 반드시 못 박으리라.


또 팔아먹기 위해서 그의 보혈이 “필요”하므로!


또한 여기서 한 가지 더-신이란, 형이상이란 무엇일까?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답은 없지만 최소한 하나는 공감한다.


바로 “절대성”이다.


알파요, 오메가이며, 영원을 사는 전지전능자라면, 그의 법칙이 과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일했듯이, 그의 행위나 그의 가르침 자체도 보편타당한 “절대성”이 있어야만 우리는 그를 신이라 혹은 형이상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단지 “필요”에 의해서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괴력난신과 신은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물 위를 걷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도 보편타당한가?


포식시대인 지금, 공짜로 줘도 안 먹을 꼬들꼬들 굳은 떡과 구은 지 오래되어 냄새나는 생선을 나누어 주는 행위는 다짜고짜 선인가?


포도주는 포도에서 만들지 말고 맹물에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이적으로 나타난 행위가 신에 의한 행위라면, 신이 자신이 창조해 놓은 법칙을 깨뜨려서까지 해 주어야 하는 일이라면 그 행위는 보편타당한 절대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하지만 절대로 아닌 것을 안다.


이적은 “상황의 해결”이지 법칙의 부여가 아닌 것이다!


다시 한 번 묻자.


예수의 이적은 보편타당한 절대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적의 부정3-시간적 단절


지금 현재 이적으로 단정 짓고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이적 이야기가 있는가?


이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 유리겔라도 사실상 초능력자를 빙자한 마술사로 판명났다.


금세기와 지난 세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각종의 신비체험 현상도 사실상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일이었다.


(참고1 : 집 안에서 랩 현상을 목격했다고 진술하여 초심리학 열풍을 불러 온 폭스 자매는 말년에 그 진술이 모두 자매끼리 짜고 진술한 것임을 입증하는 책을 펴내 화재가 된 적이 있다.

참고 2 : 폴트가이스터 현상이라고 알려진 현상의 대부분은 고압 전기선에서 방사된 자기가 금속 코일이 들어 있는 가전기기로 흘러 들어가, 기기 내에서 전기를 생성하는 “전자기 유도 현상”의 일종이라고 하는 것이 판명이 되었다. 분진 등이 가득 찬 공장에서는 이러한 전자기가 분진 내에서 분진 발화를 일으킨 사례도 보고되어 있다.

참고 3 : 금세기 최고의 예언 사건이었던 파티마의 기적은 우선 그 마을 인구의 십여 배를 넘는 목격자가 존재한다는 것과 증언자들이 모두 기독교 내지는 천주교 교인이었다는 데서 증언의 객관성을 보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 예언이 진실이었으면 제 삼의 예언은 제 삼차 대전에 필적하는 대전쟁의 예언인데, 그러한 징후는 발견되지도 않은 채 벌써 세기가 변했다.)


우리가 아는 한 이적이란 “소문”일 뿐이었다.


과거가 그렇게도 이적으로 점철되었다면 지금 역시도 그러한 이적이 베풀어지는 과정 중이어야 한다.


천지 창조에서 엑소더스까지, 예수의 탄생에서 바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모든 것은 이적으로 가득하다.


성령으로 인한 이적을 보이는 것만큼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


선지자를 계속 보내리라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이었다.


그러하다면 선지자에게 내린 성령으로 인한 이적 역시도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하다면 메스컴을 통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갈 텐데 왜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부끄럼 현상”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일까?


여호와를 시험할 수 없다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수백명 내지는 수만명을 앞에 놓고 일으킨 엘리야나 예수의 이적도 관중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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