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3] 영생과 천국의 허구

[칼럼 3-3] 영생과 천국의 허구

김장한 0 3,051 2004.11.12 17:53
 

권태의 저주


나는 버섯을 아주 좋아한다.


특히 송이를 좋아하는데, 비싸서 많이 먹어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새 송이 버섯이라며 맛은 송이와 거의 비슷하고 가격은 저렴한 버섯이 나와 종종 많이 사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버섯을 즐기는 나의 방법은 간단하다.


석쇠에 굽고 내리기 전 참기름을 살짝 두른 후 감귤류의 즙을 뿌린 상큼한 간장으로 먹는 것이다.


이 버섯을 좋아하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한 박스를 사 주시고는 집을 잠시 비우신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 식사는 천국이었다.


좋아하는 버섯을 잔뜩 굽고 된장에도 넣어 맛있는 버섯을 질리지도 않고 먹어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도 점심도 내 메뉴는 역시 버섯이었다.


그리고 저녁-버섯을 굽는데, 그 냄새가 너무도 역겨워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버섯은 먹지도 못하고 냉장고로, 그리고 저녁 식사는 라면이 되었다.


맛있는 버섯이긴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문제였던 것이다.


맛있다는 것은 그 고유의 향과 맛이 독특하고 개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오래 먹으면 쉽게 질린다.


고기구이 집에 가면 그러하지 않던가.


맛있어서 열심히 집어먹다가 결국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역겨워져 빨리 고기집을 나오게 되는 경험을 하신 바 있으실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복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는 것은 고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주식은 아직도 쌀밥이다.


독특한 향과 맛이 연하며 자극적이지 않아 오히려 물리지 않고 매일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부유해진다 해도 갈비구이에 해물탕을 주식으로 먹을 수 있을까?


이성이 있는 인간에게 반복으로 인한 권태는 저주요, 절망이다.


열정의 미신


일부 작가들이 시니컬한 어조로 쓰기를 부자의 임무는 사회 환원도, 자선 사업도 아닌 “바쁜척하기이다.”라고 쓴다.


부자들은 아주 바빠서 가족과의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며 자기를 위한 투자를 위한 짬을 내기 어려우므로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는 편견을 비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부의 바쁜 부자를 제외하고 다시 들여다보시라.


환투기, 아니면 주식 사재기를 통한 공격형 M&A(기업 인수 합병)등을 통해 돈을 버는 부자들은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단 몇 분에 벌어들이는지를.


그래서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이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은 이혼율이 아주 높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타오르는 열정은 쉽게 식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이다.


타오르는 열정의 사랑을 나눈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30년 정도 결혼생활을 한다면, 그래서 서로의 쭈그렁 바가지의 얼굴을 본다면 그 열정이 유지될는지?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밤낮 못 가리고 애정 공세에, 우아한 것만 고집하는 로미오는 마누라 줄리엣의 바가지를 어찌 견딜는지?


집안일도 제대로 못하는 우아한 로맨틱 공주인 줄리엣은 나중에 주름지고 추한 몰골이 되어가는 로미오도 사랑해 주려는지?


타오르는 사랑-말은 좋지만 불타오르는 장작은 쉬이 꺼지는 것은 인간 세상의 법칙이기도 하다.


부자들이 가족에게 봉사하는 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율은 높은 이유-그것은 권태이다.


그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해 해야 되는 현실의 치열한 투쟁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돈으로 욕구가 만족이 되니, 모든 것을 극까지 즐기고는 쉽게 열정이 식는다.


그래서, 돈으로 살수 있는 행복은 없다고 칭해지는 것이다.


당신이 중산층이나 그 이하의 계층이라면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자신의 배우자와 진정으로 지겹게 될 때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일과 인간관계에 치여 그다지 오래 보지도 못하는 배우자와 권태가 생길 일이 그리 흔하겠는가?


영생의 저주



만약 당신이 전지전능자로서 누구를 죽도록 저주한다면 무슨 저주를 내릴까?


무지무지한 육체적 고통을 받도록?


아니면 죽지 못하게 만들고 굶는 고통을 겪도록?


바이블이 서술하는 바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태워서?


물론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할까?


영생을 주는 것 말이다.


영생만이 아니라 아예 불로불사를 주자.


늙지도 않는다.


어마어마한 저주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라.


좋든 궂든 똑같은 일상, 똑같은 쾌락, 똑같은 자극에 지쳐 결국 모든 자극에 반응할 수 없는 인간을 상상해 보시라.


끔찍한 저주가 아닌가!


유일한 인간


인간의 유일성은 어찌 정의될까?


유전적 특성 등은 열외로 하고 일단 다른 것을 보자.


내가 다른 이가 되는 나 자신의 특성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선은 기억이다.


나와 완전히 동일한 경험을 한 사람이 단 둘이 존재하게 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과거에 내가 경험한 교육, 지식, 실재적 경험, 인간관계에서 나오며 누구도 나와 같은 이 기억의 구성요소를 공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는 타인에게 투영된 나 자신이다.


인간의 이성은 나 자신의 감정과 기대를 다른 대상에 투영할 수 있다.


시에서도 많이 보이는 바, 꽃이 손을 흔든다거나 하는 표현은 나의 열망이나 나의 감정이 그 대상에게 이입되어 생기는 것이다.


투영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방법 중 인간의 예절이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초면인 사람에게는 존대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사라는 것도 마찬가지, 잘 생각해 보면 타인을 만나 “안녕한지의 여부”를 물을 이유 따위는 대체 어디 있을까?


인간의 인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다.


내 친구 갑에게 투영된 나와 또 다른 친구 을에게 투영된 나는 완전히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일까?


같은 나에 대해 평하기를 완전히 같을 수가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즉, 갑이 인식하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며 을이 인식하고 있는 것도 내가 아니다.


하지만 갑의 인식 안에는 내가 있고 을의 인식 안에도 내가 있다.


인간의 정의란 이런 모든 개개의 투영으로 이루어진다.


즉, 다른 이에게 투영된 나라는 것은 본질적인 “나”의 개별적인 투영이고, 그러므로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나의 투영을 보았기에 나를 아는 것이고, 그것이 투영이기에 본질적인 “나”는 아닌 것이다.


이 인식의 한계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즉, 타인의 기억 속에 공유되어 있는 나는 내가 아니기에, 실재적인 나와는 거리가 있고, 이 거리 안에서 서로의 인격적인 접촉이 일어나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이것이 예의 정체라 생각한다.


하지만 거꾸로, 내가 남에게 나를 나누어 줄 때는 이 예라는 도구가 있으매, 진실한 나를 투영시켜 주지는 못한다.


영생 이야기를 하다가 왠 뚱딴지냐고?


이것이 바로 영생의 한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유한한 선언의 자유


인간이 주어진 시간 내에 자신을 건낸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내가 완전한 나를 줄 수도 없고, 남도 완전히 타인을 투영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인간의 인식은 그릇된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으며 대개 심각한 다툼의 원인이 아무것도 아닌 오해로 빗어지기도 한다.


그러하다면 인간의 인식의 한계는 유한성이다.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자료로 남을 판단하고 그런 부족한 잣대로 나를 재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무한하다면?


무한한 시간으로 남을 판단한다면?


온전한 판단이 가능할 것으로 믿는가?


절대로 아니다.


전술한 바, 인간의 인식은 어차피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언은 위험하다.


내가 만약 남에게 “나는 야구가 싫다”고 말하게 된다면 남에게 나는 야구가 싫은 사람이다.


이 말은 남과의 관계 가운데서 고쳐지지 않으며, 선언은 그와 반대되는 선언으로만 수정될 수 있다.


인간의 투영은 선언으로 이루어지며, 선언으로 이루어진 말만이 타인에게 인식된다.


그럼 영원을 소재로 하는 선언은 어떠해야 할까?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3 [칼럼 3-4] 이적은 없다! 김장한 2004.11.26 3184
열람중 [칼럼 3-3] 영생과 천국의 허구 김장한 2004.11.12 3052
31 [칼럼 3-2] 도전과 응전 김장한 2004.11.08 3291
30 [칼럼 3-1]언어체계 내에서 주관적인 진리 김장한 2004.11.02 3288
29 [김장한 먹사의 설교 제 3탄]기독교가 자살을 금지하는 종교라? 김장한 2004.10.26 3461
28 [김장한 먹사의 설교 제 2탄]열왕기상 18장 김장한 2004.10.26 3186
27 [김장한 먹사의 설교 1탄]사람위에 목사있고 목사위에도 목사있다? 김장한 2004.10.26 3855
26 [칼럼 2-6]주권회복운동 김장한 2004.10.19 2911
25 [칼럼 2-5]권력 지향적인 종교 김장한 2004.10.15 2674
24 [칼럼 2-4][속보-22세기 뉴스]기독교 박물관 개장! 김장한 2004.10.06 2789
23 [칼럼 2-3]문화 비평 1 김장한 2004.10.06 2777
22 [칼럼 1-6]눈물로 말하는 기원 김장한 2004.09.30 3182
21 [칼럼 2-1]시대 정신과 종교 댓글+6 김장한 2004.09.24 2941
20 에세이 1부를 종결하며 댓글+2 김장한 2004.09.24 2673
19 [칼럼 1-9]성령영접의 허위 댓글+2 김장한 2004.09.21 3348
18 [칼럼 1-8]완전에 바치는 기도 댓글+8 김장한 2004.09.20 3364
17 [칼럼 1-7]허구의 죄악 댓글+11 김장한 2004.09.17 3694
16 [칼럼 1-5]고(故) 예수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7 김장한 2004.09.14 3597
15 [칼럼 1-4]껍질깨기 댓글+27 김장한 2004.09.02 3355
14 [칼럼 1-3]바이블의 소설적 성격 댓글+3 김장한 2004.08.30 3146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81 명
  • 오늘 방문자 1,402 명
  • 어제 방문자 4,805 명
  • 최대 방문자 5,411 명
  • 전체 방문자 1,532,701 명
  • 전체 게시물 14,416 개
  • 전체 댓글수 38,042 개
  • 전체 회원수 1,668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