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2] 도전과 응전

[칼럼 3-2] 도전과 응전

김장한 0 3,315 2004.11.08 23:36
 

믿는 것과 아는 것


신앙은 믿는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명제인데,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당신은 1+1=2임을 믿는가?


당신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임을 믿는가?


참말로?


아닐 것이라 생각해 본 바 없는가?


위의 사실들은 단순히 실제로 있는 사실로 “알” 뿐이지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차이가 난다.


광신도들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조악한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사실을, 자신이 “아는”사실과 혼동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은혜의 정체이다.


즉, 이 세상의 보편적으로 참임이 밝혀진 “사실 명제”를 믿음의 영역으로 끼워 넣어 그것이 진실하고 또한 은혜스럽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은혜의 정체이다.


그럼으로 그들이 믿는 대상은 고정된 텍스트에서 빠져나와 진실이 되고 진리가 될지니 이 어찌 은혜스럽지 아니한가!


내가 지금 여기 앉아서 자판을 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어찌 증명할까?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인지 내에서 최소한 우리의 경험과 인지가 가르키는 사물에 대해 부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물들의 연속성과 관계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판단체계를 가진다.

신앙은 모르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답이다.


신앙은 믿는 것이매, 애당초 증명이 불가능함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즉, 출애굽 사건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우리에게 보이고 역사적, 과학적으로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믿지는 않게 된다.


이미 우리가 아는 사실을 왜 믿을까?


그냥 알면 되는 것이지.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신앙체계는 “무지”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그 명제들에 대해 믿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가는가, 기독인들이여!


당신네가 입으로 떠들고, 믿습니다를 연발하는 것, 그것 자체가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창조과학회에서 무엇무엇을 증명했네 어쩌네 하는 소리는 다 당신들이 믿지 못해서 지르는 변명일 뿐이다.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황당한 과학적 발견 가운데 하나는 “진화론”이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과학을 모르는 선남선녀라면,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고 이해하며 분개할 수 있다.


하지만 진화의 모든 매커니즘이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진화론은 지금 현재의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를 진단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모델이므로, 대승적인 관점에서는 동의한다.


즉, 우리는 증거가 마련되고, 논리적 합리적 설명이 있는 것이면 어떠한 명제도 이해하고 알 수 있다.


만약에 신이 있고, 신이 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증거들을 우리가 보고 신의 실존을 알 수 있으면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알면 못 믿고, 믿으면 모른다는 말의 진의를 당신네는 아는가!


알면 믿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믿으면 그 믿어지는 대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이 아님을!


실재론적 신의 가치?


기독교는 다음의 점에서 실제론적 신을 신봉하는 단체이다.


1.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서 창조되었다.


2. 신은 동정녀를 감화시켜 아이를 잉태시킨다.


3. 부활의 날, 육신이 부활하며 이는 신과 동격으로 일컬어지는 예수의 부활에서 유래한다.


4. 기타, 구약의 구절에서 신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발을 씻고 먹을 것을 접대 받은 신의 이야기는 일단 접자.


우선 실재론적인 신을 전제한다면?


전지전능하다는 명제에 치명적 결함이 생긴다.


즉, 인간과 똑같이 생긴 신이라면 그 입으로는 무엇을 하며 그 눈으로는 무엇을 보는가?


게다가 신에게도 생식기와 소화기도 있느냐는 명제에 이르면 아주 치명적인 신성모독이다.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이 된 예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매일같이 신성 모독을 저지르는 것이다.


만약, 실재론적 신을 전제한다면 신은 할 일도 없는 손과 입은 왜 달려있는가?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된다는 신이 무엇 때문에 눈과 귀를 달고 있는가?


이렇게 하여 실재론적으로 조작된 신은 그 신성에 상처를 입고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걸었던 그 길을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실재론적 신의 성격 때문에 그 신성 자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며 제우스가 아버지인 테오도스를 죽였다는 점에서 최고신의 신격도 문제된다.


실재를 지닌 신은 이미 죽은 신이다.


기독교인들은 재벌그룹 회장 같은 돈 많고 배경 좋은 신을 섬기고 싶은 나머지, 죽은 신에 붙어 링거를 주사하는 사람이다.


아서라, 죽은 자식 불알 만져 무엇 하겠는가!


명목신을 섬기는 기독교?


그럼 유명론으로의 야훼는 어떠한 신이어야 하며, 기독인들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가?


신이 그 실재가 없다는 사고 자체가 기독교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다는 바이블의 서술이 틀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인간이 신을 닮지 않았다고 해 볼까?


그러면 바이블은 그 시작부터 종착점에 도달한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 하되,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아래의 내용은 볼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것들이 고도의 은유이고 비유로, 단지 신화를 말하여 신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장면일 뿐인 것으로 이해한다고 하자.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좋아하니 무슨 공의회 하나 만들어서 교리 다시 하나 만들 수 있다.)


그럼 그 종교가 주장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명목상 존재하는 그 신을 영접하매,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위해야 천국에 이를 것인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성립하는가?


예수도 신을 부르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한 명목에 불과한데, 그 명목을 믿어 어찌 구원에 이른다 하는가?


불교인들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을 계속 되뇌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열반에 이르기 쉬운 상태가 된다고 설파한다.


그럼 예수의 명목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일까?


아니, 육신의 부활을 거세한 예수는 명목이라도 살아 있을 수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항상 주장한 바,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렸다?


그럼, 죽어 이름만 남은 신에게 명목은 무슨 소용이고 무슨 필요인가?


기독교 교단도, 천주교 교단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가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것처럼 우리도 어떠한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 방법에 대하여는 종파마다 다르고 교파마다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 것이다.


종교 개혁으로 이름 높은 (정말, 인격이 높고 학술적 연구가 높은 것은 아니고 그냥 이름만 높은) 마틴 루터의 측근들은 구약을 바이블에서 제거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구약을 뺀 경우, 예수가 부르짓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심히 모호해 지므로, 신, 구약의 모순이 어느정도 있는 것은 넘어가고 경전으로써 일관성이 있게 구약도 놓아둘 것을 권고해 지금의 바이블이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종교 개혁가도 예수를 제외한 신앙을 말한 자가 없으며, 그의 부활을 중점적으로 교리화하지 않은 기독교 종파는 드물다.


왜냐하면 신, 구약의 모든 내용이 바로 예수라는 사람을 향해 집중되고 있고, 그 이외의 사건과 기록은 부가적일 뿐이다.


그러하다면 불교처럼 명목만이 살아 있는 신을 기독교도 섬길 수 있을까?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의 큰 차이점 하나가 있다.


즉, 불교의 해탈은 자기완성, 열반으로 나아감, 완전으로의 열망을 승화시킨 것으로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다.


즉, 구원은. 내가 받아야 되는 객체라 전제한다면 누군가 구원을 주는 주체가 성립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주체는 명족이 아니라 실체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 안에서라면 누구라도 있는 동질성(그것을 이성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명정이라고 말하든지 어떠하든)을 가정하여,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 주어진 이 실체 즉, 이 세상에 던져진 현존재 (in der da-sein)으로서의 인간성을 말하고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던져진 피투성의 존재라고 할 때 다시 우리가 우리의 본성으로 회귀-즉, 귀투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가?


그러하다면 예수의 명목은 어디다 쓰는 것인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아버지의 종교


아버지의 죽음은 자녀의 독립일 것인가?


신화들은 은유로 그런 사실들에 대해 조심스레 접근한다.


우리나라 신화의 환인은 하느님의 셋째 아들로, 우리의 하느님은 지상에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아들을 못 이긴다.


가이아를 죽이려는 아버지에 맞서 싸운 제우스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승리한다.


일본의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모미카이도 역시 아들의 승리를 그린 신화가 아니던가?


이들 신화에서 보이는 아들의 승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는 신이고 아들은 인간이라고 한번 치환해 보시라.


정확하게 인간 중심의 사고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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