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8]완전에 바치는 기도

[칼럼 1-8]완전에 바치는 기도

 

공포는 무지에 기생한다.


  혹시 공포 영화를 좋아하시는지? 나는 공포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많이 보기도 하고, 시체들의 새벽이나 혹은 사탄의 인형 시리즈, 에일리언이나 요람을 흔드는 손 등 무궁무진한 재미가 여기에 있다.
 
어릴 때 유독 무서움을 많이 타서였을까? 그 보상이라도 하듯 공포영화를 보아대는 나. 아이러니하다.


  바쁠 땐 공포영화를 보는 방법이 있다. 즉, 40분 정도만 보고, 테이프를 뒤로 돌려 나머지 5분만 보는 것이다. 왜냐고?
 
상상해 보시라. 처음, 음산한 밤에 모여 앉은 여러 남녀들, 이들이 알 수 없는 일로 죽어간다.
 
그리고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는데, 대개 이 때 귀신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제부터는 평범한 액션 영화이다. 굳이 중간 내용을 알 이유는 없다.

그래서 결론으로 바로 넘어가도 무관한 것이다. 왜일까? 바로 공포는 무지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다.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른다. 이것이 바로 공포를 부르는 것이다.

귀신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판명나면 오히려 공포는 한 점으로 국한된다. 그래서 앞부분의 공포를 체험하면 그 뒤는 무섭지 않거나 오히려 시시해진다.
 
재미없는 공포 영화일수록 시신이 난무하고 피 칠갑의 화면이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래서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나 큐브를 명작으로 꼽는다. 데스티네이션의 경우, 인간을 죽이는 존재는 죽음 그 자체이다.

즉, 영체라도 있는 유령과는 다르다. 인류 모두를 죽이는 데 실패한 적이 없는 죽음의 법칙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건 죽음의 이유가 밝혀진 후의 액션이 더 기대된다. 죽음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호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이 공포는 국한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더 모호해지는 점마저 있다.
 
주인공이 사고 일년 후 프랑스에서 사고를 당하는 적을 보고 다시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풀렸다고 한 미스터리가 아직 현재진행이기 때문이다.
 
또한 큐브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물 실험을 위한 미로 같은 곳에 갇혀있는데, 이유도 동기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갈 방법도 마찬가지로 전무.
 
이 두 가지가 시체가 대량으로 나오고 힘 센 귀신이 나오는 영화보다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 자체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와 무지를 이용하여 공포감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갑자기 왠 공포영화냐고? 아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인간을 협박하여, 트랜스상태로 몰고 가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위 상황을 인간의 인식 영역을 벗어난 지옥과 죽음이라고 바꾸어 보라. 놀랄 정도로 귀신 영화와 닮지 않았는가!



타협을 강권하는 도그마의 한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혹시 약점 있는 인간인가?

평범하게 돈과 출세를 바라는 속물인가?

술버릇이 나쁜가?

장난으로 친구나 약한 동물을 괴롭힌 적이 있는가?
 
어릴 적 부모님의 지갑에 손을 댄 적이 있는가?
 
출세나 성공을 위해 다른 이를 속인 적이 있는가?


나는 평범한 인간으로 고백하건데, 거의 모든 항목이 “그렇다”이다.
 
나는 죄 많고 부족한 인간이다.
 
이것을 아는데, 인정하는데, 내가 왜 기독교를 믿지 아니하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내 죄는 내가 씻어야 하며, 누구도 나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지극히 간단하고 상식적인 판단 때문이다.

주 예수가 당신의 죄를 대속하였는가?

그러할수록 그를 버리라. 그는 사악하여, 당신의 정신과 혼을 빼앗는 악귀에 불과하다.



이제 이 사회에 기독교라는 기이한 현상이 만연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자신은 너무도 부족하고 약점 있는 존재임을 아는데, 그 책임을 자신이 지기는 싫은 것이다.
 
무지하고 저능한 이들은 도박 논증을 이야기한다. 혹시 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광신의 패악에 젖은 사람보다도 질이 나쁘다.
 
그는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전한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을 갈구하는 아름다운 인간


완전, 혹은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아름답다.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임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으로 어떻게 다가가는가? 완전에 이르면 우리는 신이 되리라! 하지만 우리가 어찌 신이 된다는 말인가?


당신은 오늘도 술을 마시고 행패 부린 일을 반성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친구를 속이지 않으리라 오늘도 결심하는가?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반성하고 노력하는 당신의 행위는 바로 당신을 구원하여 자유케 하리라! 이천 년 전에 사막에서 죽은 한 젊은이의 불행한 죽음이 당신의 노력을 값없이 만들지는 않으리라.

힘들고 어렵게 사시면서도 평상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는가?

그러하다면, 그것으로 당신은 이미 완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완전이 무엇인가! 흠 없는 인간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으시겠는가? 나는 그러한 상상이 완전히 불가능하니, 나는 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리라.
 
못생기고, 욕심 많은. 그러면서도 오늘 있었던 나의 과오를 잊지 못해 잠 못 드는 나를 사랑하리라. 왜냐하면 나는 나이므로, 완전한 나는 나 안에서 이미 존재함을 알고 있다.
 
이런 나에게 이천 년 전 사막에서 죽은 한 젊은이에게 나의 과오를 떠맡기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당신도 그리하라. 그는 이미 자신이 살아 지은 죄만 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이니. 예수의 죄는 예수가 지게하고, 당신의 죄는 당신이 지라.



인간은 과거를 딛고 서서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산다.


  이 말이 나의 모토이다.
 
대공황 시대를 살았던 미국의 유명한 문학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충고를 받아 본 일이 없다.”고. 무슨 의미인가? 설마 그가 고아일 리도 없고, 스승이나 선배가 없을 리도 없을 텐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자신의 과거 경험을 말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건 과거사이기 때문에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에 그가 미래에 대한 충고를 들었을 때 그건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니므로 절실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는 충고 받아 본 일이 없는 것이다.



  항상 “내가 왕년에”로 시작하는 말은 들을 것이 별로 없다.
 
자신이 있고 당당한 사람은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사람과 말한다.

그러하지 아니한 사람은 빛났던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 과거의 잔재는 항상 빛바랜 유적이며, 미래의 청사진은 항상 빛나는 안개 속에 있다.
 
미래가 걱정되시는가? 과거의 일이 후회되시는가?

현재를 사시라. 프랭클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과 같은 인생을 다시 살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에게 자신이 가 보지 못한 다른 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후회되지 과거가 없는 것도 아니리라. 하지만, 그는 그 당시를 열렬히 삶으로써, 자신의 모든 선택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자부하는 말일 것이다.

미래에 지옥 갈 일이 두렵다 하더라도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 때문에 눈앞의 부정에서 고개 돌리시는가?

후회되는 과거를 감싸 주는 교리가 끌리시는가?
 
아서시라. 지나간 일이다.
 
지금 열심히 사시는 당신을 저주하고 미워할 자는 없다.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바이블에 있는가? 바이블을 보기 전에 밥 먹고 똥 누는 일에 신경을 쓰시라고 권하고 싶다. 비아냥거리는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천만에! 인간이면, 아니 생명이면 누구나 밥을 먹고 똥을 눈다. 거기에 진리가 있지 아니하면 대체 어디에 진리가 있을까!
 
죽은 책을 뒤져 이미 썩은 문서에서 진리를 구걸하는 것보다 낫지 아니한가!



나는 나를 사랑한 모든 이에게 나를 남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은 나와 간접적으로 만난 셈이다. 나는 졸필이언만 나의 생각을 열심히 키보드 위에 남겼고, 당신들은 그 흔적을 보신 것이다.

글에는 누가 무슨 의도로 쓰든 글 작성자의 성격이 그대로 남기 마련이다. 만연체의 장문을 남기는 나를 보시고 “아...이놈, 뭔가 아는 척 하며 잘난 체 하기 좋아하는 놈이구나.” 라고 쓴 웃음을 지으셔도 드릴 말씀이 없다.

나는 나의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를 던지고 당신은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를 만나셨다. 내 글에는 내가 있고, 그것을 통해 드러난 나 자신을 여러분들은 보신 것이다.

최소한 이제 나는 이 글을 보시는 분들과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이 인터넷이라는 요술 방망이로 퍼지고, 여러분들이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바이블이라는 텍스트를 이제 덮으시라.

제대로 된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그 책을 이제 덮으시라. 누구도 이 잘 못된 이 텍스트에 대해 변명해 주지 못한다.
 
그리고 바이블 조작은 너무도 오랜 일이라 변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바이블의 저자는 당신에게 그 무엇도 줄 수가 없다. 체계적으로 왜곡된 바이블. 만약 이 문서가 진리를 담고 있다 해도 당신은 알 수 없다.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글에서 무슨 진리를 발견할 것인가?


  지옥의 존재는 최소한 바이블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기물이다. 성령에 의존해야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라면 잡서에 불과하다.

25000이나 되는 그 해석들 가운데 진리가 되는 이해를 찾으시기 보다는 차라리 로또를 사시고 로또를 구주로 영접하고 로또가 당신을 구원해 준다고 믿으시라.
 
로또 광풍이나 기독교나 극소한 확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는 도박으로 인간관계를 피폐하게 하고 그 결과 사회문제로 대두된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최소한 로또는 일주일에 몇 명씩이나 되는 당첨자는 나온다.

그냥 들어온 공돈이 그 가정과 인간을 붕괴시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인간을 가난에서 구원해 주기는 한 것이다.
 
최소한 기독교의 예언이나 바이블처럼 누가 그러하다더라가 아니고 확실히 그러한 것이다. 내가 너무 눈앞의 증거만 찾는 속물로 보이시는가?

그러하지 아니하다. 나는 단지 지금 여기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일을 할 뿐이다. 이 눈앞의 증거들과 문서들을 탐독하여 보는 일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속물적인 것이 아니고  현재에 충실할 따름인 것이다.



반사회적인 기도


  나는 기독교가 안티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하는 일이 한국 사회에 도움을 준 일이 없다. 기억나는 대로 떠올려 보시라.

경승실 철거시위, 붉은 악마 응원단에 반대하여 하얀 천사 응원단 만들기, 제사 거부와 이로 인한 가정 해체, 일화 축구단이 특정 종교의 포교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반대하고는, 자기네들은 포교 목적으로 축구단 창단하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고성방가, 채플 거부하는 학생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기, 타종교 테러하기, 이런 일을 지적하면 반성하고 예방책 마련에 고심하기보다 “일부다”, “이단 교회가 한 일이다”라고 발뺌하기...

당장 앉아서 떠올리는 대로만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 이 이외에 타종교 비방과 목회자 비리를 따지고, 역사와 과학 왜곡을 포함하면,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면을 다 나열하기에만도 밤을 세워야 하리라.
 
일부의 신학자와 교회들은 이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서,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다. 하지만 더 간편하고 빠른 방법이 있다. 바로 기독교가 없어지는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 현재 단군을 거부하는 각종 행사를 하는 중이다. 개천절 없애기, 단군상 철거 시위 등 각종 만행을 저지르는 중이다.
 
나는 이들이 정말 한국인인지 의심스럽다. 나는 한국인의 입에서 단군이 거부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절로 “살다보니 별 꼴을 다 보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고는 한다.
 
단군이 초대 국가의 단순한 제사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 최초의 왕일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아닐 수도 있다. 언제나 과거의 역사는 신화와 결부되어 사실과 허구를 분리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의 오해와 실수의 가능성이 항상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단언한다. 기독교 없는 한국은 있을 수 있지만 단군을 민족의 선조로 섬기지 않는 한국은 없으리라.
 
십자가 없는 한국은 있을 수 있지만, 마을 어귀의 장승이 없는 한국은 없으리라.
 
기독교의 존재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저울에 올려놓으면 아예 균형을 잡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의 가치와 비교나 되는가! 한국의 문화는 한국의 얼이다! 김치 대신에 치즈를 주식으로 삼고 제사도 지내지 않으며, 영어만 쓰고 한국어를 말 할 수 없는 이는 한국인이 아니다.

문화는 곧 한국인을 상징하는 지표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부심이리라. 하지만, 수 천 년 모진 탄압과 외침에도 끄떡없던 한국의 문화가 단지 100년 전후 되는 시간에 한 외국산 종교에 의해 피폐해져 가고 있다.

복수의 기치를 높이기 위해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던 이는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이단인 이라크를 징벌하기 위해 파병 찬성 시위를 하는 망국적인 광신에는 혀가 둘려지고는 한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 이 무지한 광신.



나는 인간이 밉다.


 글로라도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이 밉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성인은 아닌가 보다.


그래, 나는 인간이 밉다. :


 기독교라는 매국 종교에 혼을 판 인간이 밉다.


 종교와 과학을 혼동하여 창조과학을 만드는 인간이 밉다.


 우리 역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왜곡하는 신학자와 목사가 밉다.


 우리 문화를 파괴하면서 스스로 그 사실을 모르는 그 무지한 신도들이 밉다.


 미국이 가자면 지옥도 간다던 인간이 밉다.


 한 학생이 굶어 죽어 가는데 제 개인적 이치만 따지는 인간이 밉다.


 그리고 그 무지한 목사와 교육자가 그 짓을 하도록 헌금을 내는 신도들도 밉다.


밉다. 밉다. 너무나도 밉다. 밉다, 밉다 하니까 더 설쳐 대는 기독교가 더 밉다.
 
우리나라의 광신 교회와 교인들을 보며,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열사의 심정이 이해된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다른 이를 그저 미워만 한다면 나 자신이, 대한민국의 혼과 얼을 미워하는 기독교와 어찌 다르겠는가!


나 자신과 마주 앉아 하는 악수


  그래서 나는 좌절하고 절망한다. 미운데, 정말 미운데, 미워할 수도 없는 자신이 너무나 밉다. 매국적 광신 앞에 서면 너무도 작은 나 자신이 밉다.

사랑하고 포용하여 가기에는 너무도 멀고 험한 길이 너무도 밉다.
 
먹고 사는 행위의 중간 중간에 이런 조악한 글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천박한 자기애와 변명이 너무도 밉다.

이제 윤동주 시인이 자기 이름을 쓰고 부끄러워 자신의 이름을 흙으로 덮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또 그가 다시 우물로 가 우물에 비친 자기와 악수했다던 그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반기독교 시민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합니다. 조금밖에 되지 않는 깃털처럼 가벼운 힘이라 해도, 그 길이 멀고 험난해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렵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반 기독교인입니다.


  반기독교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9-29 09:16:15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Comments

인드라 2004.09.20 15:52
김장한님의 글을 제가 모으고 있습니다..인재를 알아보는 인드라의 혜안이라고 해야할까요?..^^
음;;; 저처럼 혜안을 기르시길 바랍니다..호호호
김장한 2004.09.20 13:27
으음...부메랑님말씀이 맞는데...누구랑 헷갈렸지???그래서 그냥 문학가라고 고쳤습니다. 확인해봐야겠네요
Asimov 2004.09.20 11:43
언제나 가슴에 와닿는 글을 쓰시는군요~
무소유 2004.09.20 10:56
이런 좋은글은 개독들에겐 강의료 받아야하는거 아닙니까?ㅎㅎ
참..윗글중 수정부분..(주)예수교 <<< 입니다..거의 대기업 수준이죠..요즘은..
서정윤 2004.09.20 10:52
장한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난 원제나 이런 글 한 번 올려보남.  ㅠㅠ)
부메랑 2004.09.20 10:34
장한님, 소로는 대공황시대 때 이미 죽고 없었고, 노벨 문학상 안 탔는데....나지도 않았는데요...
다른 사람을 잘못 쓴 거 같아요!
제삼자 2004.09.20 10:30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장한 2004.09.20 10:27
흐미...쓰고 보니 스크롤의 압박이군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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