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論과 未來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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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0 5,676 2002.07.14 11:20

結論과 未來의 전조



그러나 만일 일레로서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진술이 문자 그대로 이해되지 않고 상징적을 이해된다면 그 때에는 이해가 상충되지가 않고 그 진술의 의미를 해치지도 않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적인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불사에 대한 소망에 종국을 고한다는 반론의 의미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도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류는 사후의 생명을 믿게 되었고 그 결과 부활사건은 불사에 대한 보증으로서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되어 교회에서 그대로 가르쳐진 신화가 갑작스럽게 c철저하게 거부될 것이라는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팽배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화는 파괴되는 대신 한 번 쯤은 상징적으로 이헤되어져야 할 시기가 아닌가?


----칼 융, 《미 발견된 자아》전집 10권 (1956) p.266


우리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입증하거나, 반증하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따라서 그 어떤 결론도 입증하거나 반증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 교의 중 어떤 것도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어떤 당혹케 하는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하고자 하였고, 어떤 수수께끼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처음에 어느 정도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무엇과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는 깜짝 놀랄만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상식을 벗어난 듯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의 생애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이로한 점에 관심을 돌렸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에 대해서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도달한 결론이 합당한 것인지 어떤지를 알아내려는 노력만 기울였다. 성서 자료를 철저하게 고찰함으로 그것이 실제의 사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결론이 주장할 만한 결론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들이 내린 결론의 정확성을 입증할 수 없었으며 지금도 여전이 입증할 수 없다. 적어도 이 결론은 하나의 가설이 되고 있다. 이 가설은 그럴 듯한 가설로 상당히 조리있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우리가 접한 2천년 전에 서구인들의 의식속에 새겨져 후대의 서구문화와 문명을 형성한 그 어떤 사건이나 인물보다 더 이 가설은 역사적으로 가능성이 짙은 기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론을 입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시온의 수도회가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증거--그 기록과 표본의 양면에서 --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되는 기록된 힌트와 개별적인 대담을 밑받침으로 해서 우리는 시온 수도회가 우리가 발전시킨 이 가설에 대해 어느 정도 '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명'에 이르게 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될지는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의 식견있는 추측은 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가설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의 아내와 후손--예수는 16세 또는 17세에서 추측된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녀들을 두었을 것이다.--은 성지를 도망한 후 프랑스 남부에다 은신처를 마련하고 한 유대인 공동체내에서 그들의 혈통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5세기에 이 혈통은 프랑스 왕국의 교훈이 이루어져 그 결과 메르빙 왕조를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496년 교회는 이 왕조와 협종을 체결하고 영원히 메르빙 왕조의 혈통임을 서약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이 메르빙 왕조의 참 정체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 클로비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상, 즉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의 상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며 또한 왜 그가 왕으로 임명되지 아니하고 이렇게만 인정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교회가 다고베르의 암살에 은밀히 결탁함으로써 그 결과 메르빙 왕조의 혈통을 배반하게 되었을 때 그 일은 합리화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살될 수 없는 범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일은 단지 비밀로 감추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비밀로 감추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르빙왕조의 참 정체에 대한 발각은 적국에 대해서 로마교회의 입장을 강화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혈통__어느 정도는 메로빙가의 혈통__은 그 혈통을 근절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속되었다. 부분적으로 카롤링 왕조를 통해서도 존속되었다. 카롤링 왕조는 그들의찬탈에 대해서 로마교회가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죄책을 분명히 느꼈으며 메로빙 왕조의 공주들과 왕족간의 결혼을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합리화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다고베르의 아들 시지스베르를 통해 그 혈통이 존속되었다는 사실이며 그의 후손 중에는 귀염 드 겔론느라는 셉티마니아 유대인 왕국의 통치자가 있었음 최후의 인물은 고드프라 드 부용이다. 1099년 고드프라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예수의 혈통은 정통적 세습재산, 즉 구약시대에 수여된 세습재산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십자군 전쟁기간 동안 고드프라의 참 혈통이 로마가 바랐던 것처럼 비밀에 싸여 있었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교회의 헤게모니가 그대로 있었다면 물론 공공연하게 폭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이나 전승, 전설이 유행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 전설은 로엥그린과 같은 설화에 매우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례로서 고드프라의 신비에 싸인 조상이며 성배의 일화에 꾸밈없이 나오는 것들이다.

만일 우리의 가설이 옳다면 성배는 동시에 최소한 두 가지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상 랄(Sang Raal)', 즉 시온수도회에 의해 결성된 성당기사단들이 수호자들로 임명된 '참' 또는 '왕의피'가 될 것이다.

동시에 성배는 문자 그대로 예수의 피를 받아 담은 그릇 또는 잔 이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배는 막달라 마리아의 자궁이었을 것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막달라 마리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에 놀리 퍼졌던 막달라 마리아 제의가 나타나 성모 마리아 제의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실례로서 그리스도교 초기의 많은 유명한 '검은 성모들' 또는 '검은 마돈나들'은 성모 마리아의 신당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신당으로서 그 신당들은 모자(母子)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고딕 대성당들--- '노트르담'에 헌납된 자궁의 거대한 석조 모사품들---도 역시 <붉은 뱀>에서 기술한 바처럼 예수의 어머니의 신당이기보다 예수의 배우자의 신당이었다는 점도 역시 논의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배는 예수의 혈통과 그녀의 자궁으로부터 형통이 생겨난 막달라 마리아를 상징화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70년 유대의 대반란시 티투스 휘하의 로마 군단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였다. 성전의 약탈된 보물은 최후에는 피레네산맥에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플랑타르는 대담을 통해 오늘날 이 보물이 시온수도회의 손안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는 티투스 백부장들에 의해 약탈된 보물이외에 많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교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가 없었다. 메시아는 제왕(祭王)으로 그의 권위는 영적분야와 세속적 분야에 꼭같이 미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성전은 이스라엘 왕가에 관련된 공문서들, 즉 출생증명서, 결혼허가증 및 현대의 어떤 왕가가 귀족등의 가문에 관한 자료와 유사한 자료들을 소장했다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견해이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었다면 이 성전에 관한 많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 성전에는 한 때 복음서에 나오는 일시적인 무덤에서 옮겨진 그의 시신이 들어 있을 것이다. 시신이 없다면 적어도 그의 무덤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티투스가 70년 성전을 약탈했을 때 조금이라도 예수와 관련있는 어떤 것을 얻었다는 언급은 없다. 만일 이러한 자료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물론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역시 숨겨졌을 것이다. 티투스의 병사들은 전리품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러한 자료를 찾는 일엔 고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성당에는 제사장들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자기를 행하여 다가오는 백부장들의 방진(方陣)을 바라보며 그들이 찾을 만한 금, 보석 및 재보를 그들에게 남겨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보다 더 중요한 품목들은 아마도 성당 지하에다 감추었을 것이다. 보다 더 중요한 품목이란 이스라엘의 정통적인 왕, 인정된 메시아 및 왕가에 관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1100년이 되어 예수의 후손들은 유럽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며 팔레스타인에서도 역시 고드프라 드 부용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과 조상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세상에다 입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명은 그들 차후의 계획에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증명이 성전경내에 있었거나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그것을 찾아내는 데는 별반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성당기사단들의 역학을 설명해 줄 것인데 그들은 비밀리에 소위 솔로몬의 마굿간이라고 알려진 성전지하를 발굴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성당기사단들은 사실 무엇을 발견하거나 얻으려는 분명한 목적 하에 파견되어 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우리가 고찰한 증거를 토대로 보면 어떻게 하든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유럽으로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은 비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당기사단의 4대 단장인 베트랑전드 블랑슈포르의 후원 하에 게르만 공병 분견대가 땅을 파 은닉처를 만들기 위해 매우 엄중한 보안을 하고 파견된 렌느 르 사토 부근에 무엇인가가 감추어졌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곳에 무엇인가가 감추어졌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이라화한 예수의 시신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결혼허가증, 그의 자녀들의 출생신고서 같은 것들로 비교적 중요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의 일부 또는 전부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카타리 이교도들에게 넘겨져 몽세귀르의 신비한 보물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고드프라와 보두엥 드 부용을 통해 하나의 '왕가의 전승'이 존속했다는 것이다. 이 왕가는 그것이 '시온의 반석 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주요한 왕국들과 그 지위가 같았다. 만일 - 신약성서와 프리메이슨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 '시온의 반석'이 예수와 동의어라고 한다면 그 그 주장은 불시에 의미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만일 무슨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줄잡아하는 말일 것이다. 한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던 메로빙 왕조는 그 왕국의 참 계보에 대한 암시를 시인하고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배의 일화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언제 어디서 일어났었나를 설명해 줄 것이며 그 일확들이 성당기사단들과 왜 그렇게 분명하게 연관되었던가를 설명해 줄 것이다. 때를 맞춰 한때 팔레스타인에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고드프라와 보두엥을 통해 혈통이 이어진 '왕가의 전승'은 아마도 그 기원을 밝혀줄 것이다.

예루살렘의 왕은 당시 유럽의 모든 군주들보다 상석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교황을 대신했을 것이다. 로마를 대신해서 예루살렘은 당시 기독교국의 진정한 수도로 아마도 기독교국 밖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가 생명이 유한한 예언자로, 제왕으로, 다윗 혈통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되었다면 그는 무슬림과 유대인 모두에게 인정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蝡 왕으로서 그의 직계의 후손은 당시 성당기사단의 정책에 대한 주요한 교의 주의 하나 -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 기독교와의 화해 -를 이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정황은 결코 이러한 사태가 발생되도록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프랑크 왕국은 그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없었다. 무슬림 군대에 의해 전면이 포위당해 그 자체의 통치와 행정마저 불안했던 프랑크 왕국은 존속에 필요한 세력과 내적 안정마저도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유럽의 왕가들과 로마의 교회에 대해 그 우월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웅대한 계획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1291년 성지의 상실과 더불어 그 계획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메로빙 왕가는 다시 한번 무관이 되었다. 그리고 성당기사단은 더욱 부유해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소비도 할 수 있었다. 후대로 이어지면서 메로빙 왕조 - 시온수도회에 의해 원조도 받고, 지휘도 받고, 보호도 받았던 - 는 그들의 상속재산을 다시 차지하기 휘한 시도를 되풀이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유럽에 국한되었다. 그들은 최소한 세가지의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구분이 되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계획은 정신적인 분위기, 로마의 정신적 헤게모니를 부식시키려는 의도의 비밀 전승을 만드는 것이었다 - 이러한 전승은 연금술 및 비전의 사상 속에, 장미십자회의 선언서 및 유사한 저술 속에, 프리메이슨단의 어떤 의식들 속에 그리고 물론 아르카디아의 상징들과 비밀 풍조 속에 표현되었다. 두 번째 계획은 정치적 음모와 숭책을 꾀하고 할 수만 있다면 능력을 확고히 소유하는 것이었다. 16세기 귀즈가와 로렌느가에 의해 사용된 기술과 17세기 프롱드가의 건축가들에 의해 사용된 기술이 그 능력이었다. 세 번째 계획은 메로빙 왕가가 그들의 상속재산을 되찾은 계획으로 왕국간의 상호 결혼이었다.

이런한 비잔틴이蝡 절차들은 불필요한 것들로 보였으리라고 맨먼저 생각된다. 메로빙 왕가는 - 만일 그들이 실제로 예수의 후손들이었다면 - 그들의 우위권을 내세우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참 정체를 폴로하여 입증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세상은 그들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로마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되면 교회는 다고베르의 살해를 시인하고 그의 혈통이 깊어지는데 대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갖지 않았다. 그들의 혈통을 너무 서둘러 폭로하므로 베로빙 왕가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오히려 불발을 하여 당파적인 분쟁을 야기시키고 신앙의 위기를 촉진시키고 교회와 다른 세속 주권자들로부터 도전을 유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더라면 메로빙 왕가는 그러한 반발을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정체나 그들의 으뜸패 카드의 비밀은 말하자면 그대로 지켜져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역사와 정치의 현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으뜸캐 카드는 권력의 디딤돌로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이 이미 요구되어졌을 때 그 카드는 오직 작용되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힘의 위치로부터 작용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을 재건키 위해서 메로빙 왕가는 보다 협정적인 절차, 즉 의문에 싸인 특수한 시대에 인정된 절차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절차는 적어도 네 번이나 성공할 듯하다가 좌절되었고 단지 계산착오로, 주위사정 또는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일로 방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귀즈가는 프랑스 왕위를 거의 획득할 뻔하였다. 17세기에 프롱드가는 루이 14세를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 그를 대신해서 로렌느의 후계자가 될 뻔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일종의 복원된 신성동맹의 청사진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카톨릭 유럽 -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을 함스부르크가의 영도하에 연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독일 및 러시아 양국의 변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때 독일과 러시아는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다 끊임없는 변화를 유발시켰고 그 결과 유럽대륙의 모든 왕국들을 와해시킨 전쟁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메로빙 왕가의 혈통이 그 목표의 실편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었던 시기는 18세기였다. 함스부르크가와의 교훈 덕분으로 로렌느가는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인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얻었다. 프랑소아드 로렌느의 딸 마리 앙토와네트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을 때 프랑스 왕위 역시 어느 정도 기울어가는 시대였다. 만일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함스부르크 로렌느가는 1800년대 초까지는 순조롭게 전유럽의 영토를 지배하였을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메로빙가의 희망과 열망에 참으로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로 보인다. 단 한번으로 산산조각으로 박살나게 한 대변동으로 일세기 반에 걸친 세심하게 준비되고 필요한 권한을 얻으려는 계획은 갑작스럽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온수도회의 기록에 언급된 것을 보면 시온은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기간 동안 가장 귀중한 기록들 중에 많은 것을 상실하였으며 게다가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역시 상실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당기사단의 단장직의 변화, 특별히 노디에와 같은 또 다른 얻을 수 없는 자료에 접근한 문화적인 프랑스 인물들로의 변화를 설명해 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소니에르의 역할도 설명해 줄 적이다. 소니에르의 전임자인 안토와네 비구는 프랑스 대혁명 바로 전날 저녁에 법전화된 양피지 문서를 감추어 그것을 정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스페인으로 도망가 얼마 후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시온수도외에서는 적어도 한 동안은 그 양피지 문서가 어디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만이 그 문서들이 렌느 르 샤토에 있는 교회에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을지라도 그 사본들은 그곳에 있던 마음이 맞는 한 사제가 없었더라면 쉽게 회수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난처한 질문을 하지 말고 비밀을 지키며 수도회의 이해와 활동에 간섭을 하지 말라는 시온수도회의 명령을 행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만일 양피지 문서들, 그 밖에 무엇인가 - 렌느 르 샤토 부근에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었더라면 이러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더 필요하였을 것이다.

소니에르는 그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의 가정부 마리 드나르토도 마찬가지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렌느 르 샤토 부근에는 여러차례 발굴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어떤 것도 발굴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추측하는 것처럼 어떤 기폭적인 품목들이 한때 그 주변지역에 감추어져 있었다면 그것들은 분명 소니에르의 이야기가 주의를 끌어 보물 사냥꾼들을 불러 모았을 때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만일 이런 품목들이 보물 사냥꾼드龁 눈을 피한 지하토굴, 예를 들어 개인소유의 인공연못 아래에 있는 어떤 창고에 감추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러한 토굴은 어떠한 월권적인 발굴에 대해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고 견디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발굴도 연못에서 먼저 물을 빼내지 않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절대적 비밀리에 행해질 수는 없었다 특별히 사유지에 침입한 틈입자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실 인공연못 하나가 렌느 르 샤토 부근에 있었는데 상당히 그럴 듯한 견해에 따르면 라발듀(하나님의 골짜기 또는 계곡)라 불리는 유적지 부근이라고 한다. 이 연못은 당연히 지하토굴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반면 지하통로를 통해 둘러싸인 산에 벌집처럼 뚫려있는 무수한 동굴 중의 몇몇개에 쉽게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니에르에 의해서 발견된 양피지 문서에 관해서 살펴보자. 그중의 두 개는 - 혹은 어떻게 되어서든 그 중의 2개의 복사 - 는 새로이 만들어져 출판되자 널리 유포되었다. 반대로 다른 두 개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플랑타르는 대담을 통해 이 사본들이 현재 런던 로이드 은행의 귀중품 보관소에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 사보들에 대해 더 이상 추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소니에르의 돈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돈의 일부가 재정거래를 통하여 대공 요한 폰 합스부르크에게 넘겨졌으리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실질적인 총액은 소니에르뿐만 아니라 렌니 레뱅의 신부인 앙리 부데에 의헤 카르카손느의 주교에게도 이용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소니에르 수입의 대부분이 소니에르의 가정부인 중개자 마리 드나르노를 통해 부데가 그에게 지급하게 된 결과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개 가난 교구 신부에 지나지 않는 부데가 이러한 재원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물론 비밀에 싸여 있다.

그는 분명 시온수도회의 상속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이 시온 수도회에게 직접 유출되었느냐 하는 점은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다. 그 돈은 합스부르크의 보고에서 유출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바티칸에서부터 유출되었으리라고 보는데 바티칸은 시온과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고도의 정치적 공납을 받았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그 돈에 대한 의문이나 돈으로 바꾸어진 보물에 관한 의문은 우리에게 그 결과로서 일어난 발견과 비교해 볼 때 점점 보수적인 문제로 변했다. 되돌아보면 그것의 주요 역할은 우리의 관심을 비밀속으로 이끌어 갔다. 그후 이것은 비교적 덜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한 혈통에 대한 가설을 구체화해 왔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가설이 모든 세부적인 면에서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처의 특별한 부분들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가설의 본질적인 개요는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아마도 우리는 특수한 수도원 총장의 활동이나 18세기 정치의 권력투쟁과 정치적 음모술수 등의 결연의 의미를 잘못 해석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나 이러한 조사를 통해 우리는 렌느 르 샤토의 비밀이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적 유럽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프랑스에서 메르빙 왕국을 재건하려는 중요한 시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에 대한 합법적인 주장이 메르빙 왕가가 예수의 후손이라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로 살펴보면 우리의 조사에 의해서 야기된 수많은 예외적인 것, 수수께끼, 해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분명해지게 된다.

하찮은 듯이 보이면서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단편적인 것들도 역시 분명해진다. 이러한 내용의 책으로는 니콜라 플라멜의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다. 그 밖에 르네 당주의 상징적 성배, 이 잔은 그것을 단숨에 마시는 사람에게 하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환상을 보여준 잔이다.

또 안드레아의 <크리스찬 로젠크로츠의 화학적 결혼>은 보트로 해안에 밀려온 왕가의 혈통을 이은 신비의 소녀에 관한 것인데 이 소녀의 정당한 상속재산은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또한 푸생에 내밀히 관여된 비밀-- 성체회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고 말해지는 비밀과 같은 비밀이다.

조사를 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밖의 또 다른 단편적인 일들에 많이 직면했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일들이 전혀 무의미하거나 무관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들도 역시 의미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왜 루이 11세가 막달라 마리아를 프랑스 왕가의 혈통의 근원으로 여겼는가가 분명해질 것이다. -- 이러한 신념은 15세기의 정황하에서도 처음에는 불합리하게 보였다.

또한 왜 샤를르마뉴의 왕관-- 지고한 합스부르크가의 왕보(王寶)의 일부분이 되어있는 복사--에 '솔로몬 왕'이라고 명각되어 있는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가 왜 '다윗의 거룩한 후손'의 새로운 왕에 관해서 말하고 있나도 분명해질 것이다.

제2차 대전동안 결코 만족할 만하게 설명될 수 없는 이유로 로렝의 십자가는 새롤르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그 자체로서는 이것은 다소 기묘하다. 로렌느의 십자가-- 르네 당주의 고안--는 왜 프랑스와 같다고 생각 되었을까? 로렌느는 결코 프랑스의 심장부가 아니었다. 사실 로렌느의 대부분의 역사는 하나의 독립된 공국(公國)으로 구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를 구성하는 독일국가였다,

부분적으로 로렌느의 십자가는 시온수도회가 프랑스 저항운동시 활약한 중요한 역할 때문에 채택되었으리라는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플랑타르처럼 시온수도회의 멤버와 드골장군과의 연합 때문에 채택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30년전에 로렌느의 십자가는 샤롤프 페귀의 시에 선동적으로 표현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1914년 마르네 전투에서 죽기 얼마 전에 페귀--<영감의 언덕>의 저자인 모리스 바레의 절친한 친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Les armes de Je'sus s'est la croix de Lorraine,
Et le sang dans L'artere et le sang dans la veine,
Et la source de grace et la claire fontaine;
Les armes de Satan c'est la croix de lorraine,
Et c'est la meme artere et c'est la meme veine
Et c'est le memp sang et la trouble fontaine ……


예수의 두 팔은 로렌느의 십자가,
두 팔은 동맥의 피와 정맥의 피
두 팔은 은혜의 원천, 맑은 샘
사탄의 두 팔은 로렌느의 십자가
그리고 동맥의 피와 정맥의 피
그리고 같은 피, 고난의 샘 ……
17세기 후반 당시의 역사가요, 고물연구가인 신부 빙상은 로렌느의 시온에 관한 역사를 집필했다.

그는 또한 <성 시지스베르의 진정한 역사>라는 책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또한 다고베르2세의 생애에 관한 설명도 수록되어 있다. 이 저술의 표지에는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그는 너희 가운데 있으나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

조사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는 우리 자신도 찬크리스삻도 반크리스챤도 알지 못했다. 비교종교에 대한 우리들의 배경과 연극덕분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세계 주요 신앙에 내재해 있는 타당성의 핵심에는 호의적이었으나 그들 신앙의 상부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교의, 신학, 장국에 대해서는 무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모든 신조에 관해서는 일치할 수 있었던 반면 그들중에 진리가 독점된 어떤 것에 대해서는 일치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사가 예수에게 이르렀을 때 우리는 우리가 희망했던 균형있고 전망있는 감각으로 그를 조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쪽에도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증명하거나 반증해서 얻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객관'이 가능한 한에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미 마치 역사가 알렉산더나 카이사르에게 접근하는데 기대되는 태도와 같은 것이리라. 그리하여 우리에게 내려진 결론은 비록 확실히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산산조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한 결론은 우리의 개인적 확신에 대한 재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또한 우리의 개인적 가치체계를 뒤흔들어 놓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가 되시고 구속주가 되시는 세상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역사적 예수, 우리의 조사로 나타난 제왕이신 예수, 그 예수는 그들의 신앙을 어느 정도나 위협하는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성전(聖典)에 대해 그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이해에 대해서 어는 정도 침해하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우리의 연구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현대 기독교의 기본적인 어떤 교의들에 불리한 결론-- 이교적인 결론 심지어 불경스럽기까지 한 결론이다.

어떤 기존 교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러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숭앙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 그를 모독하거나 심지어 비하시킨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예수의 신성에 찬성할 수 없는 한 우리의 결론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금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극히 솔직히 말해서 예수가 그의 신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한 결혼하여 자녀를 갖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그의 신성이 성적 순결에 의존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결혼하여 가족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예수가 성육화(聖育化)하였다는 가설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에 동정을 가지고 그 창조물 속으로 자신을 육화(肉化)하여 인간의 형상을 취했다.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은 직접으로 그 자신을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직접으로 인간존재의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가장 심원한 의미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상태가 동반하는 외로움, 번민, 무력함, 비극적 유한성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된 덕분으로 하나님은 구약성서가 허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인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거룩한 초연함과 원격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상태를 구속하신 것이며 인간의 상태에 참여함으로써, 그 상태로부터 고난을 받아 그 결과 희생됨으로 인간의 상태를 정당화하고 의롭게 할 것이다.

예수의 상징적 의미는 그가 인간 경험의 스펙트럼에 노출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인간 실존이 동반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에 노출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로 육신화한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인간조건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국면 중의 두 가지를 알지 못하고 인간 경험의 스펙트럼을 포괄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성욕과 부성(父性)이라는 인간성의 가장 본질적인 두가지 측면을 않고 인간 실존의 전체성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성육화가 예수가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도 두지 않고 상징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을 참으로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음서의 예수는 기존 기독교의 예수는 긍정적으로 불완전하며 인간으로의 그의 성육화는 다만 부분적에 자나지 않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연구로 나타난 예수는 우리의 견해대로 기독교가 그를 만들고자 하는 것에 대해 보다 더 명로한 주장을 즐기고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우리가 예수를 손상시키거나 비하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의 연구 결과로 고난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연구로 살아 있는, 그럴 듯한 예수가 나타난다. 이 예수는 그의 생활이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주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수이다.

우리는 한 사람을 지적하면서 이 사람이 예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이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가계라는 원목(原木)은 두갈래로 갈리고 세분화되어 수세기를 흐르는 과정을 통해 울창한 숲으로 증가되었다. 오늘날 영국과 유럽에는 메르빙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문이 적어도 12가문--수 많은 방계(傍系)를 가진--은 있다.

이러한 가문 가운데에는 합스부르크--로렌느가--현재는 이름뿐인 로렌느의 공작들과 예루살렘의 왕들--플랑타르크가, 룩셈부르가, 몽페자가, 몽테스키외가 및 그 밖에 여러 가문이 있다. 시온수도회의 기록에 따지면 영국에 있는 생클레어 가문도 스튜어트의 여러 가문과 마찬가지로 이 혈통과 결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문들 가운데 데번셔가문은 이 비밀에 세밀히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가문 중에 대부분의 가문이 예수의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한 사람이 미래의 어는 시점에서 새로운 제왕이라고 주장된다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여튼 여러 가지 일들은 분명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한 예수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은 우리들 이상으로 더 이상 신적일수 없으며, 더 이상 본질적으로 신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동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더구나 예수의 후손인 개인 또는 개인들의 그룹의 비밀폭로는 가까운 1세기가 2세기 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철머 그렇게 세상을 뒤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설혹 이러한 혈통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명'을 할 수가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단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하고는 질문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나의 결과로 시온수도회의 정교한 계획안에는 만일 그러한 계획들이 어느정도 결정적인 방법으로 정치와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거의 의미가 없어 보일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결론에 대해 신학적인 반응이 어떠할지라도 다른 반응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 예를 들어 잠재적으로 거대한 충격을 지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계의 사고, 가치, 제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반응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과거에는 메르빙 왕조의 후손들의 여러 가문들은 완전히 정치에 몰두해 있었고 그들의 목적 가운데에는 정치적 권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시온수도회의 많은 단장들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가 시온수도 혈통 양면에 동일하게 중시되어서는 안된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실로 모든 증거가 시온수도회가 교회와 국가라고 불리웠던 것 사이의 원칙, 즉 현세와 정신, 성과 속, 정치와 종교의 일치라는 견지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많은 기록을 통하여 시온수도회는 메르빙 왕가의 전통에 일치하는 새로운 왕은 「다스리기는 하나 지배하지는 않으리라」고 주장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의식(儀式)과 상징의 능력으로 주로 역할을 다하는 제왕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통치하는 일은 그외의 다른 사람, 생각되는 바로는 시온수도회에 의해서 처리될 것이다.

19세기 시온수도회는 프리메이슨단과 발도르의 제롬수도회를 통해 일하며 합스부르크가와 근본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동시에 지배되는 일종의 신정하의 유럽합중국인 부활된 세로운 신성로마젝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험은 제1차 세계대전과 유럽의 지배왕국들의 몰락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시온수도회의 현재 목표가 발도르의 성 제롬수도회 목표와 -- 적어도 그 목표의 전체적인 개괄이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 목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단지 추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목표는 신정하의 유럽합중국-- 현대 제국으로 회합되어 예수의 후손 왕조에 의해 지배되는 초(超) 또 범(汎) 유럽 합중국이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이 왕조는 정치적 또는 세속적 권력의 옥좌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성 베드로의 옥좌까지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최고의 권력하에 왕국의 연합과 교훈으로 연결된 왕국 또는 공국들의 상호, 밀접한 조직망, 즉 흔히 말로만 연합된 그런 연합이 아닌 일종의 20세기의 '봉건체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실제방법은 실행권 또는 입법권이 주어진 소위 유럽의회의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유럽은 국제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새로이 통합된 정치적 힘을 형성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힘의 실상(實像)은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나 미합중국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힘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이거나 이념적인 토대 위에 구축되기보다 깊이 뿌리를 내린 정신적·정서적 토대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힘은 인간의 머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까지 호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힘은 서유럽의 공동적 정신을 두드려 근본적인 종교적 충동을 일깨움으로 그 힘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동키호테식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공동적 정신과 그것을 이용하여 얻어지게 되는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했었다. 몇 년 전에는 한 사람의 종교적 열광자-- 자신의 군대도 없는, 배후에 정당도 없는, 카르스마와 사람에 대한 종교적 굶주림 외에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가 이란에서 현대의 훌룡하게 체계를 갖춘 신정권(Shah's regime)의 조직을 한 손으로 뒤흔들 수 있었던 사실은 생각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히 아야톨과 호메이니가 해치운 일이다.

물론 우리는 경고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암시적이든 또는 명시적이든 시온수도회를 아야톨가에 비유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이란의 선동자들 생각하듯 시온을 불길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란의 선동자는 인간의 종교적 충동에 깊이 뿌리박은 성품, 원동력, 가능성을 훌륭하게 입증하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충동이 정치적 목적에로 돌려질 수 있는 방법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들은 권위의 남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목적들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처칠이나 드골의 목적처럼 위대한 것일 수 있다. 종교적 충동은 무수한 방향 중의 그 어떤 방향으로도 돌려질 수 있다. 그것은 무한한 잠재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이성에만 기존을 두어 간혹 그것에 사로잡히는 오늘날의 정부에 의해서 너무나도 자주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종교적 충동은 심오한 심리학적·정서적 필요를 반영한다. 그리고 심리학적·정서적 필요들은 그 하나하나가 빵이나 집, 물질적 안정에 대한 필요처럼 실제적이다.

우리는 시온수도회가 '발광한 회색'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조직이 재정적으로 풍부하며 정치, 경제, 보도기관 예술 등의 분야에서 책임질 수 있고 영향력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적어도 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1956년 이후 그 회원의 수가 4배 이상이나 증가되어 마치 무슨 일을 위해 동원을 하거나 준비하는 것 같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플랑타르는 시온수도회가 어느 정도 분명한 시간표에 맞춰 일하고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또한 우리는 1956년 이후 시온수도회가 신중하게, 관심을 끌면서, 조금씩조금씩 유혹하는 암시들에 대처하기에 충분히 적당한 양의 이용할 만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러한 암시들이 이 책을 쓰게 하였다.

만일 시온수도회가 '그 카드들을 보여 주고자'한다면 그때는 일을 하기에 때가 무르익었을 때이다. 20세기 초 매우 많은 것을 약속한 듯한 정치적 제도와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실제적으로 어느 정도 파탄을 나타내 보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서구식 민주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들의 약속을 배반했고, 그들의 추종자들을 빙퉁그러지게 하였고 그들이 제시한 꿈을 실현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의 무기력한 욕구, 가망성의 결핍, 권력의 남용 때문에 정치가들은 더 이상 신뢰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오직 불신만 조장하였다. 오늘날 서구에서의 혼합주의, 불만, 환멸이 증가해 가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의미, 정서적 성취, 우리의 생에 대한 영적 중요성, 참으로 믿어야 할 것에 대한 열정적인 탐구도 있다. 성(聖)의 새로워진 의미에 대한 열망도 있어 이러한 열망은 결과적으로 철저한 종교적 부흥운동에 이르렀는데 그러한 실례들은 종파와 제의의 증식에 의해서 예증이 되었다. 또한 미국에 있어서 근본주의의 팽창된 물결에 의해서 예증이 되었다. 또한 참된 '지도자'에 대한 열망도 증가되고 있다. 그런데 참된 지도자는 지휘자가 아니고, 일종의 현명하고 자비로운 영적 인물로 인류가 안전하게 신뢰를 할 수 있는 '제왕'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들의 문명은 물질로 충만해 있으나 그 과정 속에서 보다 심원한 굶주림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정서적·심리학적·영적 필요들의 성취를 기대하기 시작하고 있고 찾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분명히 시온수도회의 목적들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온수도회의 기존의 사회적 제도와 정치적 제도에 양자택일을 제안할 수 있는 위치에다 두고 있다. 그러한 양자택일은 유토피아 또는 새 예루살렘을 건설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존의 제도가 인정하지조차도 않는 필요들을 충족시키기까지 그것은 무한히 매력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중심 전번제(全燔祭)라고 설명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많은 열성스런 기독교인들이 있다. 예수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되어질까?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들에게 그 출현이 일종의 '제2의 재림'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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