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건의 실상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는
예수는 마사다의 요새가 A.D 74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곳에서 죽었다는 흥미있고 설득력있는 논증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의 나이는 거의 80세가 되었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의 실상

엑스 0 6,529 2002.07.14 11:18
십자가 사건의 실상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많은 자녀를 낳았을 법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십자가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지않고 살았다면 자손들의 수는 훨씬 더 증가될 것이다.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살아남았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또는 십자가 사건은 모종의 사기였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복음서들에 있는 그에 관한 묘사를 볼 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의 적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기존의 유대교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적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들은 그 문제에 로마를 끌여들이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의 권한에 의거하여 예수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와 아무런 특별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로마법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법과 로마적인 절차에 따라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는데 이것은 제국에 대한 반역죄를 범한 죄인들에게만 적용된 처벌 형식이었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 달렸다면 그는 복음서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비정치적이었을 수 없다. 반대로 그는 틀림없이 유대적인 것과 반대되고 로마적인 분노를 자극하는 어떤 행동을 했음이 분명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죄목이 무엇이든간에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모순 투성이다. 왜 그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서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운명적이어야 했는가 하는 데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음이 아주 분명하다. 십자가 사건에 관한 논쟁은 보다 정확하게 조사해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의 관습은 대단히 정확한 절차들을 거쳐 진행되었다. 선고된 후 죄수는 채찍질되어졌을 것이며 그후 피를 흘림으로써 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벌려진 양 팔이 그의 목과 어깨를 가로질러 수평으로 놓여진 무거운 나무토막에 고정되었을 것이다. 고정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죽 끈이었지만 때로는 못을 박아 고정시키기도 하였다. 이 나무토막을 매고 그는 그 다음 단계로 처형 장소로 끌려갔을 것이다. 여기서 죄수를 매어 단 그 통나무가 들어올려져 수직의 기둥에 부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손만 고정시켜 매어 달면 죄수가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발도 십자가 위에 고정시켰는데 이것은 그가 발을 딛고 서서 가슴에 받는 압력을 경감시킬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발이 고정되어 달린 사람은, 특히 컨디션이 좋고 건강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최소한 하루나 이틀은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죄수들은 피로와 목마름 또는 못이 사용되었다면 피흘림으로 인하여 죽기까지 일주일이 걸린 예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죄수의 다리나 무릎을 부러뜨림으로써 고통은 보다 빨리 극도에 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의 처형자들이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자 그만 두었다. 다리나 무릎을 부러뜨리는 것은 고통을 더하게 하려는 새디스트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빨리 죽게해 주려고 하는 자비의 행위였다. 그를 밑에서 받쳐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죄수는 가슴에 받는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되어 곧 질식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제4 복음서만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자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발은 십자가 위에 고정되었으며--이리하여 그의 가슴에 받는 압력이 경감되었다--그의 다리는 부러뜨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틀이나 사흘 동안은 족히 살아있어야 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린 지 불과 몇시간만에 죽었다고 선언되었다. 마가복음에서 보면 빌라도조차도 그렇게 빨리 죽은 사실에 놀라고 있다.(막 15:44)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그의 옆구리를 찌른 창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은 창이 그를 찌르기 전에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요 19:33) 단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하다. 즉 피로와 허약함과 채찍에 의한 상처가 합하여져 죽음을 재촉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조차도 그렇게 빨리 죽게한 치명적인 요인들이었을 리는 없다. 물론 그것들이 치명적인 요인들이었을 수도 있다. 즉 생리학적 법칙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때로는 비교적 충격이 없는 단 한번의 타격에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어떤 것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처형자들은 그의 죽음을 촉진시켜 주려고 막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려 하였다. 그가 이미 다 죽어가고 있었다면 왜 그렇게 하고자 했는가? 간단히 말해 죽음이 실제로 임박해 있었다면 예수의 다리를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보면 예수의 죽음은 아주 편리하고 아주 적절한 순간에 일어났다. 그 죽음은 아주 적절한 때에 일어나서 처형자들이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으로써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그러한 예언들에 따라 그의 삶을 아주 자연스럽게 추구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할 수 있었던 나귀가 베다니에서 구입되어야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세부적인 것들도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예언들을 이루기 위해 조정된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예수가 명백하게 그리고 적절한 때에 '죽었다는 사실'은--이로 인하여 그는 아슬아슬하게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죽음을 면하게 되엇으며 예언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아무리 보아도 의심스럽다. 그것은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실 이후에 가필된 것이거나 주의깊게 고안된 계획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고안된 계획임을 제시할 수 있는 많은 증거가 있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목마르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 그에게 미리 신 포도주에 적셔둔 해융이 주어진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들에도 나타나는 사실이다. 이 해융은 일반적으로 새디스트적인 조소의 또 다른 행동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는가? 신 포도주는 소금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는 일시적인 흥분제이다. 그것은 갤리선(노예나 죄수에게 젓게 하였던 돛과 노가 많이 달린 범선)에서 노를 젓던 노예들이 힘이 빠지면 그 노예를 소생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상처를 입고 지쳐있는 사람에게 신 포도주는 소생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며 순간적으로 힘이 솟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그 효과가 정반대였다. 해융을 맛보자마자 그는 유언을 하고 죽었다. 신 포도주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생리학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반응은 신 포도주가 아니라 모종의 수면제, 예를 들면 당시 중동에서 널리 사용되던 아편과 아마릴리스의 복합제에 적신 해융과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수면제를 주었을까? 그렇게 한 행위는 십자가 처형의 다른 모든 요소들과 함께 하나의 복합적이고도 교묘한 술책, 즉 그 죄수가 실제로 아직 살아있었지만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고안된 책략의 요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책략은 예수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의 메시아 예언들을 성취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에는 그러한 책략을 가리키는 다른 비정상적인 측면들도 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골고다, 즉 '해골의 장소'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후세의 전승은 골고다를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뻗어있는 메마르고 다소 해골모양을 한 언덕과 동일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복음서들 자체에서 보면 십자가 처형이 일어난 장소는 메마르고 해골모양을 한 언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제4 복음서는 그 문제에 관해 가장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즉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힌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 19:41) 그렇다면 예수는 메마르고 해골모양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어떤 '공개적인 처형 장소'에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그는 개인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또는 그 동산의 바로 인접한 곳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개인 소유였다. 그런데 모든 복음서들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부유한 사람이며 예수의 숨은 제자였다.


일반적인 전승은 십자가 처형을 군중이 접근할 수 있었으며 수천명의 사람들이 참관한 대규모의 공개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복음서들 자체는 대단히 다른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은 여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멀리서'(눅 23:49)목격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공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개인 소유지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처형이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많은 현대의 학자들은 십자가 처형의 실제적인 장소는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겟세마네가 실제로 예수의 숨은 제자들 중의 한 개인의 소유지 였다면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왜 그처럼 자유로이 그곳에 들락거릴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줄 것이다.

개인 소유지에서의 개인적인 십자가 처형이었다면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거짓 꾸며진 십자가 처형이었으며 교묘하게 계획된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몇명의 목격자들만이 직접 참석하였을 것이다. 일반 대중은 그 연극을 공광복음서들이 확증하듯이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리에서 보면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연극에는 본디오 빌라도의 또는, 로마 행정부의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의 묵인과 결탁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묵인과 결탁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빌라도가 잔인하고 폭군적인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부패한 관리였으며 또한 뇌물에 상당히 약한 관리였다. 복음서들에서 또한 묘사된 빌라도와는 반대되는 실제의 빌라도는 상당한 액수의 돈과 더 이상 정치적 선동을 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교환 조건으로 하여 예수의 생명을 살려준데 불과했을 것이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간에 빌라도가 그 사건에 어떤 방법으로든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예수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예수의 죽음이 그처럼 빨리 일어났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또는 거짓 놀라는 체했다. 그리고 그가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허락했다는 것이 모든 것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일 것이다. 당시의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결코 장사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실제로 보초들은 친척이나 친구가 죽은 자의 시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관례적으로 지켰다. 죄수의 시체는 십자가 위에 그대로 방치되어 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절차를 크게 무시하고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선뜻 내주었다. 이것은 빌라도 측에서의 어떤 공모가 있었음을 분명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것들도 역시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영역본들에서 보면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청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으며 백부장과 상의한 후 만족하여 요셉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타당성이 있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희랍어 역본에서 보면 그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희랍어 역본에서 보면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할 때 그는 soma(소마)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살아있는 몸에게만 적용된 단어이다. 그 요구에 동의하는 빌라도는 '시체'를 의미하는 ptoma(프토마)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희랍어에 따르면 요셉은 분명히 살아있는 몸을 요구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그에게 죽은 자의 몸이라고 생각한--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체 한--것을 허락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장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요셉이 어떤 몸이건 받았다고 하는 것도 역시 이상하다. 무슨 근거로 그는 그 몸을 받았는가? 그는 예수의 몸에 대하여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만일 그가 숨은 제자였다면 그는 예수의 비밀 제자임을 밝히지 않고서는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빌라도가 요셉이 예수의 비밀 제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요셉에게 유리한 어떤 다른 요인이 연루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리마대 요셉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복음서들은 단지 그가 예수의 숨은 제자로 큰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보호하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공동체를 다스린 산헤드린이라는 장로들의 회의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요셉은 영향력있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빌라도와 그의 교섭 및 그가 개인 묘지를 포함한 광활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확증된다.


중세의 전승은 아리마대 요셉을 성배의 보관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다른 후세의 전승들에 따르면, 그는 예수와 예수의 가문과 약간의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수의 몸에 대하여 약간 타당성있는 요구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처형된 죄수의 시체를 전혀 낯선 사람에게는 거의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뇌물을 받고 그 죽은 자의 친척에게 시체를 내어주기는 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요셉이 실제로 예수의 친척이었다면, 그는 예수가 귀족계급임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예수의 친척이었다면 성배(왕족)와 그의 연개성은 훨씬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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