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3)

도올의 비판은 반기독교라기 보다는, 주로 기독교의 개혁을 바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자아도취감에 빠져서 헛소리도 곧잘 하는 사람이니, 잘 걸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3)

엑스 0 8,162 2002.06.15 16:04
[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3)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좀 피상적이다. 아직 우리의 논의가 "제도"라고 하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有爲的세계의 총칭이다. 無爲란 스스로 그러한(自然) 것임에 반하여 有爲란 인간이 만든다(man-made)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라는 것은 대개 약속(conven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 약속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도 약속이고, 가정도 약속이고, 선거도 약속이고, 정부부처조직도 약속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나 규칙, 법률이나 율법 이 모두가 다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체계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사회제도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가장 본질적인 제도가 인간存在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 제도란 바로 "言語"라는 것이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본질적인 약속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분명,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존재의 내재적 절대적 조건이 아닌 외재적 社會的 규약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한에 있어서는 언어를 부정할 수가 없다. 오로지 홀로의 해탈을 추구하는 자에 있어서는 언어는 부정될 수 있지만, 사회적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에게 언어는 필요불가결한 存在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언어가 제도인 이상, 인간의 언어 또한 그것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제도가 곧 종교가 아니라면, 언어 또한 곧 종교가 아닌 것이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이나, 불타의 말씀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나 절깐이 곧 종교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을 적어놓은 성경이나, 불타의 말씀을 적어놓은 불경이 곧 종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의 제도적 측면의 유지를 위해서 요구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의 설법시기와 장소를 AD 30∼33년 갈릴리의 어느 시골로 잡는다고 한다면, 예수의 말씀은 그 순간에 듣는 사람의 고막을 울리고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너무도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문서로,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그렇게 가시적 형태로 보존했어야 할 어떤 제도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제도적 요구가 없었다면 성경이라는 언어체계는 존속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불경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교회가 요구한 것이고, 불경은 절깐이 요구한 것이지, 교회가 있기 전에 성경이 있었고, 절깐이 있기 전에 불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 사찰이라는 종교제도의 발생이전에는 오직 예수와 불타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말씀대로 어떤 고정불변한 절대적 실체적 사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이나 불경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이라고 생각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러한 논리는 너무도 급작스레 짧은 지면에서 直言되기 때문에, 의아스럽거나 충격으로 와 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다.
원불교교전이 금세기초를 산 전라도人 박중빈이라는 覺者의 말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원불교교전의 성립이 원불교라는 종단의 성립이후의 사건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원불교교전의 성립은 원불교라는 사회적 제도의 자내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교전 편찬내용이 역사적 제도적 요구의 변천에 따라 변천되어가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하고 진실한 사실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교전 이전에는 오로지 초기집단을 구성한 인간들의 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말로 다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언어적(제도적) 측면을 총칭하여 "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리가 곧 종교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가 곧 종교(불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가 곧 종교(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敎理란 곧 敎의 理요, 敎의 理란 곧 교회조직이 요구한 理인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교리가 필요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교리는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는 종교가 요구하는 제도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반드시 종교조직이라는 이해관계와 얽혀있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利害가 발생시키는 배타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인간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인류의 종교사는 바로 이 교리간의 충돌과 분
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이해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도 화평한 듯이 보이는 깊은 종교심성의 인도인들이건만 항상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지고 지도자의 암살과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교리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곧바로 교리라고 이해한다면 종교는 중상, 모략, 전쟁, 질투, 암살, 음모, 살상, 등등의 단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질러온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간의 분쟁인 것이다. 인간세의 전쟁의 대부분의 명분이 바로 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란 곧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와 더불어 存在한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 교리이전의 그 무엇이다. 종교는 교리이전의 그 무엇이 아니면 아니되는 것이다. 종교를 교리라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알목하게 될 뿐이요, 더 크게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게 될 뿐인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제도가 곧 종교일 수가 없다고 하는 나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성경도 불경도 거시적으로는 모두 교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經에서 종교를 찾는다고 하는 생각은 가장 진실된 생각같지만 실상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영원히 꿰뚫어볼 수 없는 우매한 자들의 유치한 소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經의 그릇된 절대성을 유포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요, 유대민족의 그러한 종교문화는 그들의 민족사적 특수 상황과 운명에서 기인된 것을 뿐이다.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罪業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을 設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의 해답이다.

중교란 무엇인가? 침묵할 지어다. 구태여 나의 口業을 빌리지 않아도 금강경이 그 질문에 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 김용옥의 所見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금강경이란, 어떤 종교조직의 교리경전이라기 보다는, 두 밀레니엄동안 한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온 진리체계인 것이다. 나의 설법은 나 개인의 독단이 되기 쉽다. 그러나 금강경의 설법은 그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역사의 축적된 진리의 氣가 설법하는 것이다. "나"는 침묵하지만, 금강경은 침묵하지 아니한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금강경을 設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키로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經에 종교의 본질이 있지 아니하다고 말한 내가 어지 금강경이 불교의 구극적 진리라 말한손가?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스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敎(제도)를 통틀어 그 이전에 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가지 통찰을 設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요, 그것은 통찰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設하는 몇몇의 통찰에 感入됨으로서, 불교도든, 기독교도이든, 이스람교도이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 이상의 좋은 레퍼런스(참고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새로운 21세기의 인류의 과제는 다음의 세가지로 요악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 첫째가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ecological concern)이요, 그 두째가 모든 종교 이념간의 배타의 해소(religious coexistence)요, 그 셋째가 학문의 생활화(The decompartmentalization of human intelligence)이다. 인간세의 화평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 "종교"라는 문화현상이었다. 종교가 제각기 인류를 구원하다고 선포하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이라고 선전하면서, 종교야말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종교야말로 인류를 억압하고 대규모의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이 인류사의 파라독스야말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無明의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라는 제도를 말해서는 아니된다. 이제 우리는 종교 그 자체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나의 주관적 믿음의 체계로서 접근하거나, 신의 권위나 이름으로 접근하거나, 제도나 규약의 이해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마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종교
가 어찌하여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해야만 하는가?

종교간의 배타의 문제에 오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불교도들보다는 기독교들에게서 매우 강렬한 배타의식을 직면하게 된다. 나의 긍정이 타의 부정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이 그들의 "전도주의"(Evangelsim)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의 진정한 본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유대민족의 선민의식(Chosen People)의 연장태일 뿐이요,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이란 팔레스타인이나 이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속에서 살아가야만했던 유랑하는 유목민족의 역사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된 후천적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기되어야 할 "구약", 즉 "옛 약속"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새로운 약속이란 나만 잘났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파기에서 성립하는 보편주의적 사랑의 약속인 것이다. 신약의 약속은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사도(Apostle for Gentiles), 바울을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더욱 희한한 사태는 萬敎를 統攝해야 할 불교가 매우 배타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불교만이 구원과 해탈의 유일한 길이라고 아집상을 틀고 앉아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환경과의 접촉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되어간 병폐라 할 수 있다. 최근 내가 원광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원불교도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고 또 깊은 이해를 하게되었는데, 원불교도 애초에는 조선의 땅의 고유한 환경속에서 피어난 혁신불교운동이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내가 가장 賞讚하
는 것은, 바로 그 핵심교리에 있어서 모든 교리를 포용, 인간세의 모든 종교와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잠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났건만 그 생각의 포용성이 소박하면서도 세계의 여타 종교의 편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배타(排他)는 결국 배자(排自)이다. 남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옹졸하고 졸열하고 치졸하게 오그려 붙이는 것이다. 배타를 通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결국은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래할 뿐인 것이다. 금세기(20세기) 기독교는 조선땅에서 놀라운 확대의 일로를 걸었다. 그러한 확대는 배타적 전도주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확산이 이제 축소의 일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유기체의 법칙이다. 21세기 조선의 기독교는 20세기의 팽창주의 추세를 유지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팽창주의적 확대만을 모색한다면 기독교는 이땅에서 불운한 역방향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배타에 배타로 맞서서는 아니된다. 배타는 자기논리에 의하여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정칙이다. 배타에는, 수모가 따를지라도, 끊임없는 포용의 자세로 임할 것이다. 나는 이 나의 금강경강해를 불교도가 듣기 보다는, 기독교집안에서 자라난 편견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라는, 21세기 문명사적 과제상황의 근원적인 해결의 열쇠가 이 금강경속에 다소곳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賢者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 "종교란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 취향과 색감과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이렇게 해서 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의 연재를 마칩니다.
*출처:http://my.dreamwiz.com/mss107/fram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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