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어록(인기없는 에세이들 中에서) 6

러셀 어록(인기없는 에세이들 中에서) 6

몰러 0 3,769 2002.08.14 06:25
○ 판단을 유보하기 위한 최선의 학문은 철학

인간에게 있어서 확실성에 대한 추구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종의 지적인 죄이기도 하다. 만약 날씨가 애매한 날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간다면, 아이들은 당신에게 날씨가 맑을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확정적/독단적인 대답(Dogmatic answer)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확실히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실망할 것이다.

같은 종류의 보장이 많은 사람들을 내세에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에게도 요구된다. ‘자본가들은 말살되고 살아 남은 자들만이 영원한
축복을 누릴 것이다.’, ‘유대인을 말살시키는 자들에게는 복이 잇을 것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을 없애고 세르비아인들을 해방시키자.’, ‘세르비아인들을 없애고
크로아티아인들을 해방시키자.’ 이런 것들이 오늘날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슬로건들의 본보기이다. 아주 기초적인 철학도 이런 피에 굶주린
몰상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증거가 없을 때에는
판단을 유보하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는 한 사람들은 독단적인 예언에
이끌려 방황할 수밖에 없다. 또 그들의 지도자는 무지한 정신병자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일 가능성도 있다.
불확실성을 참고 견디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미덕들도 역시 그렇다.

각각의 미덕을 배우기 위한 적절한 학문이 있는 것처럼,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배우기 위한 최선의 학문은 철학이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배우기 위한 최선의 학문이 철학이라는
것에는 아직 확신이 없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이 아닌 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급박하게 몰고 간다. 사람들에게 판단을 유보하고
통찰할 시간이나 기회를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신자는 별로 없다. 예수와 사도들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이 점에서 예수나 성직자는 멍청하거나 사기꾼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The Last Judgment가 곧 있을 것이라고 judgment(decision)한
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더 확실하다.




○ 바벨탑의 신화가 재현되는가

미신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면 나는 바벨탑의 신화를 믿고 싶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그때와 유사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 비극적이고
비참한 징벌을 받을 만큼 더 불경스럽지 않은가 하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 나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망상하기를 허용한다 - 신은 물질적
우주를 통제하는 방법을 인간이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원자물리학자들은 신이 이제는 그들의 활동을 정지시켜야 할 때
(바벨탑을 무너뜨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할 만큼 궁극적 비밀에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보다 단순한 방법으로 인류가 스스로를
말살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내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사슴과 다람쥐, 나이팅게일과 종달새가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엄청난 재난을 비교적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 될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탄의
끔찍스러운 비법은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평등하게 말살시킬 것이며,
지구는 무의미하게 태양 주변을 도는 영원히 죽은 흙덩어리로 남겨질 것이다.

바벨탑 붕괴는 인간의 도전정신이 신의 훼방에 의해 좌절된 것일
뿐이지만 핵전쟁은 -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핵전쟁이 발발할지 않을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결정에 신의 의지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이
신이 그냥 한 번 만들어본 습작이나 표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종말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핵전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며, 선택받은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살아 남는 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자들, 그리고 운이 좋은 자들이다.




○ 무익한 싸움

신속한 답변, 노력, 보상의 정확한 손익계산서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지식 수준으로는 확실성에 도달할 수도 없으며,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불확실한 명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을 격려하는 그런 학문에 대해 참을 수 없어 한다. 어떤 종류의 철학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가장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지식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은 가장 어리석은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의 결과는 인류를 경쟁적인 미치광이 집단으로
나누게 될 것이며, 다른 집단의 신념은 저주스러운 이설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아리안 족과 가톨릭 신자들, 십자군과 모슬렘들, 개신교 신자들과 교황의
지지자들, 공산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은 지난 16000년의 대부분을 이런
무익한 싸움으로 보냈다. 그들에게 약간의 철학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논쟁에서 어느 쪽도 스스로 옳다고 믿을 만한 적절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종교도 하나의 신념체계로서 철학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지적인
분야에서 성급함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게될 철학이다. 다행히도
종교는 철학이 아닌 신학이라는 별도의 영역과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신학마저도 우매함과 게으름과 성급함을 지닌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다.
결국 신학이 없는 신앙을 가진 자는 지식이 없는 철학을 추구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익한 싸움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교철학은 신과 종교에 내재된 사상, 관념, 인식론을 고찰하는
것이지 신 자체를 연구하는 분야가 아니다. 신은 신학이 고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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