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3) - 주요한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43) - 주요한

※※※ 0 2,983 2004.10.19 00:25
주요한 (朱耀翰, 창씨명 松村紘一, 1900∼1979)


대동아공영의 꿈 읊조린 어릿광대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애국시인에서 친일시인으로의 변신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 자유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불놀이]({창조} 창간호, 1919. 이 시를 자유시의 효시로 보는 견해는 이제 낡은 주장이다)의 첫머리이다. 이 시의 작자는 잘 알다시피 주요한이다.

주요한은는 1900년 10월 14일 평양에서 목사인 아버지 공삼(孔三)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유학생 목사로 파견된 그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일본 메이지(明治)학원 보통부(중등부)에 입학하였다. 1918년 보통부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도쿄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그는 오사카(京都) 유학생회지 {학우}(1919. 1 창간)에 [에투우드]라는 제목 아래 5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그는 우리 근대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김동인*, 전영택(田榮澤) 등과 함께 {창조}를 창간하면서 문학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신시운동의 목표를 민족적 정조와 사상의 표현 및 조선 말의 미와 힘의 발견([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 {조선문단} 제2호, 1924. 11)에 두고 있음에서 다소 짐작되는 바이거니와, 더욱이 그가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송아지'라는 필명으로 [대한의 누이야 아우야], [조국] 등 독립운동을 외치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음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3·1 운동 이후 일시 귀국하여 무슨 격문을 돌리다가 그 해 여름 중국 상하이로 피신해 갔다. 이 때 이광수*를 도와 {독립신문}의 편집을 맡았는데, 이광수와의 교분은 이미 상당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광수는 1921년 4월에 귀국하였으나, 그는 1921년에 상하이 후장((水+扈)江)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면서 이광수가 주재하던 {조선문단}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25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이듬해 학예부장으로 취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광수가 이끄는 수양동우회의 중요한 멤버로 활약했다. 동우회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흥사단'의 국내단체로서, 이광수가 그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었다. 그는 역시 이광수와 함께 동우회 기관지인 {동광}을 편집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동우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코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6월 6일 해산령을 거부하던 수양동우회에 대해 일제 검거를 시작했다. 150명의 피검자 가운데 2명이 옥사하고, [화수분]의 작가 전영택, 작곡가 현제명*과 홍난파* 등 18명이 전향성명을 발표하였다(1938. 6. 29). 이 사건과 함께 그도 역시 친일의 대열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건은 1941년 11월까지 4년여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결국 전원 무죄판결로 일단락났으며 이 과정에서 이광수 등과 더불어 친일문학에 나서게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친일행위는 1938년 12월 수양동우회를 대표하여 국방헌금조로 4000원을 종로경찰서에 기탁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12월 14일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내선일체의 구현, 동아협동체의 건설 등의 문제에 대하여 이광수, 조병옥(趙炳玉), 현영섭*, 권충일(權忠一), 갈홍기(葛弘基) 등과 토론하였다.

젊은 시절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고 애국시를 쓰면서 조국의 독립을 누구보다도 갈망했던 그가 어찌하여 정반대의 길, 치욕스런 민족배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그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행위이면 일수록 그 답은 더욱 내면화될 것이다.



이광수에 버금 가는 화려한 친일 문필활동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이다. 여기서 고이치(紘一)란 일본의 조국(肇國)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름조차도 일본 정신에 철두철미하게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일까? 팔봉 김기진*이나 백철*처럼----이들의 친일행각도 주요한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성씨 다음에 한 자 끼워넣는 정도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의 친일행위는 문인협회, 문인보국회, 임전보국단, 언론보국회, 대의당, 대화동맹 등 수많은 부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했음에서 명백한 것이다.
이러저러한 단체들에서 그가 어떠한 일들을 했는가는 그리 자세히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는 능히 미루어 짐작될 터이기에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들만 살펴보도록 하자.

1943년 12월 4∼5일 이틀에 걸쳐 만주의 신징(新京)에서는 '만주국예문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대동아전쟁 2주년 기념 결전예문전국대회의 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 회의에 조선문인보국회의 특파사절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데라모토(寺本喜一)와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유치진*과 함께 참가하였는데, [결전하 만주의
예문태세](決戰下滿洲の藝文態勢)({신시대}, 1944. 1)라는 참관기를 남기고 있다. 또 이 회의 개회식장에서 축사를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일의 문학은 다만 이기기 위한 문학, 미·영 격멸을 위한 문학이 있을 뿐입니다. 동양이 오늘의 찬연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금일 미·영 격멸의 피비린내나는 문화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입니다.……우리들은 친애하는 만주제국 5000만 민중들 역시 하루라도 속히 직접 총을 잡고 포학한 미·영의 두상에 불의 세례를 내릴 것을 기원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또한 그는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에서 개최한 미영타도강연대회에서 '루즈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성전의 용사 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외쳐댔다. 게다가 1943년 11월 4일 화신 6층 회의실에서 있었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에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지역별 간담회 및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통하여 학병권유를 결의하였는데, 그는 이 모임에 참여하여 학병 권유 연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11월 5∼9일에 진명학교 교정 등 10군데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가 있었는데, 그를 비롯하여 이광수, 양재창(梁在昶), 송문화(宋文華) 등이 연사로 참여하였다. 그는 [비약의 시대]라는 글에서 "출진 학도의 구두 소리는 아시아 부흥의 진군이 되고 조선의 일본적 재생의 새벽 종소리가 될 것"이라며 학병 출전을 권유하였던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 문필활동은 1944년 4월 25일 제5회 조선예술상문학상 수상시집인 {손에 손을}(手に手を)(박문서관, 1943. 7)이다. 일본의 '와카'(和歌) 형식으로 씌어진 이 시집은 [우리들 황국신민], [소집되는 아들들], [승리의 보(譜)], [송가] 등 4장으로 구성된 19편의 일문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오늘에서야]라는 작품을 보자(제1절).


오늘에서야 우리를
부르시는 높으신 뜻을
서로 전하여 말하며
눈물 흘리는 것을


징병제를 예찬하고 있는 이 시는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의 사지(死地)로 몰고 가려는 일제의 만행을 오히려 눈물 흘리며 감사하고 있는 꼴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침햇발], [파갑폭뢰](破甲爆雷), [대군에게], [댕기], [첫피] 등의 시에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는데, 특히 지원병 출신으로 죽은 이인석 상등병에게 바친 [첫피](1941. 3)라는 시는 더욱 친일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첫째, 둘째, 아홉째 연을 읽어보자.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부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천 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나는 내 피에
고개를 숙이어
절한다.
그것은
너들의 피기 까닭에,
장차 내 뒤를 따라올
백과 천과 만의
너들의
뜨거운 피기 때문에.

아아
간다,
나는
너보다 앞서서
한자욱 앞서서,

만세, 만세.


또 [마음 속의 싱가포르], [승리의 태평양], [12월 7일의 꿈], [상해조계진주일에 왕군에게 보냄], [동아의 새 봄], [싱가포르], [임시대제(大祭)의 날에], [명기하라 12월 8일], [성전찬가], [대동아행진곡] 등과 같은 수많은 시들은 미영연합국을 격멸하는 전쟁 자체를 칭송하고 그러한 성전을 수행하는 일본 정신과 대동아공영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천가지 풀에 물방울은 빛나고/이슬마다 맺힌 구슬에 어능위(御稜威), 빛나는 듯이/사방은 무성한 수풀처럼 괴괴히 웃으며 살다"([비온후]雨後)와 같이
일본 국왕의 권위를 찬양하면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심을 기쁜 마음으로 읊조리고 있다.

이러한 친일시들의 이론적 토대에는 '결전문학'(決戰文學)론이 밑받침되어 있다. 이 결전문학은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위에서 생긴 것으로서, '국민문학 내지 동방예술이 통과해야 할 재생의 용로(熔爐)'라고 주장하고 있다([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1943. 6). 계몽선전의 도구로서 시가 '무대에서 방송실에서 전선에서 직장에서' 읽히고 낭송되도록 씌어야 하며, 이런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공용어로서 일본어가 등장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대동아권과 문화의 문제]라는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 근저에는 '팔굉일우'로 표현되는 일본주의가 기초해 있음은 물론이다.

그 밖에도 그는 [임전조선], [최저생활의 실천], [직장·도장·전장], [나서라 지상명령이다], [징병령 실시와 조선 청년] 등의 수많은 시국논설을 통하여 내선일체의 완성, 황국신민으로서의 임무 완수, 자발적인 성전참여 독려, 국민생활의 최저화 등을 부르짖었다. 일례로 1943년 6월에 발표한 [다섯 가지 사명](五つの使命)이라는 글을 보면, 특별지원병제에 임하는 우리 청년들의 각오를 5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즉, 성전의 세계사적 의의를 체득하는 반도의 세계적 사명, 미·영 격멸과 아시아 부흥을 위한 반도의 동아적 사명, 황국신민으로서 충성하는 반도의 일본적 사명, 고난 극복과 책무 완수하여 향토의 명예를 앙양할 반도의 향토적 사명, 멸사보국·생사초탈이라는 반도의 인간적인 사명 등이 그것이다.


해방 후 여러 분야의 요직 두루 맡아

이상에서 보았듯이 주요한의 친일행적도 양에서나 질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청춘을 던져 애국적인 시를 썼던 '송아지'(그의 필명으로, 어딘지 민족적인 냄새가 담긴 듯도 하다.
그의 아호 송아(頌兒)도 이 말에서 나왔다)가 '팔굉일우'라는 일본 정신의 기수 '마쓰무라 고이치'로 변신해 간 것은 그 자신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불행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일은 해방 조국에서 그 불행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그가 독립투사로 우국적인 지도자의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흥사단에 계속 관계하였으며,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 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민주당 민의원(초선, 재선)을 지냈다. 4·19 이후에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거쳤고, 5·16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일보사 사장,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정계, 재계, 언론계, 문화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늘 양지 쪽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1979년 80세를 일기로 영욕의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하면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 해 정부에서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우리 근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가 해방 직후 부일세력의 척결을 철저하게 수행해내지 못한 데 있다고 만일 말한다면, 주요한의 이 같은 맹활약은 분명 우리 역사의 비극이리라. 친일한 부분은 축소되고, 그의 능력만 강조되어 많은 후세대에게 훌륭한 인물로 전해진다는 것은 역사의 진정한 자기 비판을 상실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윤태(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주요한, [첫 피], {신시대}, 1941. 3.
______, [雨後/同義語], {신시대}, 1944. 5.
______, {手に手を}(일문), 박문서관, 1943. 7.
______, [루즈벨트여 답하라], {신시대}, 1942. .1
______, [대동아권과 문화의 문제], {매일신보}, 1942. 3. 23.
______, [五つの使命](일문), {신시대}, 194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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