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6) - 심형구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6) - 심형구

※※※ 0 2,449 2003.10.25 21:03

친일파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


·沈亨求, 1908∼1962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이사
1944년 '선전' 참여작가



조직적인 친일미술활동의 총책격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폭압이 강화되면서 미술계에도 군국주의에
동조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성전'(聖戰) 승리를 위해 병사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 못지않게 후방의 화가들도 미술의 무기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핵심을 담은 글이 최근배의 [미술계의 제문제]({조광}, 1939.
1)와 구본웅의 [사변과 미술]({매일신보}, 1940. 7. 9) 그리고 심형구의
[시국(時局)과 미술]({신시대}, 1941. 10) 등이다. 심형구는 [시국과
미술]에서 아예 일본인의 입장이 되어 독일 파시즘 미술의 예를 들어가며
미술의 무기화를 위해서는 그 전문성을 가지고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삽화나 포스터 제작에 참여해야 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금일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무엇이나 좀더 국민생활이라 하는 것과 직접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을 위한 문학, 미술을 위한 미술은
벌써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으로서의 국민생활을 좀더
향상시키자는 점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당연 협소한 경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반 문화인은 각자각자가 자신의 순수한 목적만으로만
생각하여 왔다. 이는 예술가만을 책할 수 없겠으며, 모든 사람이 국가에
봉사한다는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하등의 목적이 없이
민족이상도 국가의식도 가지지 않는 예술이요, 미술이라면 무가치한
물건이다. 한 민족의 예술이라는 것은 그 민족을 강대하게 한다는 목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경에서는……일류화가가 신문삽화나 무대장치 같은 것을 하게 될 때
무대장치나 삽화가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 정도가 높아졌다 한다. 즉, 훌륭한
회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그와 동일한 기백으로서 삽화나 무대나 자기 기능을
충분 발휘한다는 일이 미술을 생활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즉, 화실에서
조용히 앉아서 제작만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겠다.……필요하다면 포스터나, 책의 장정이나, 극단으로 성냥곽
레텔이라도 소위 대가가 그려도 좋겠으며 또한 그려야 될 줄 생각한다. 좁은
문을 나와서 독선고립주의는 청산해야 될 줄 안다. 결국 화가 자신들의
일층의 자각과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심형구는 위와 같은 시국미술관에 걸맞게 군국주의적 경향의 삽화나 그림을
그렸고, 일제 말 조직적인 친일활동의 총책격으로 선봉장에 나섰다. 그가
개인적으로 그린 전쟁 선양의 작품으로는 1940년 제19회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출품한 [흥아(興亞)를 지키다]와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의 속표지 그림 [기관총을 쏘는 병사](1944. 2) 등이
알려져 있다.

[흥아를 지키다]는 유화로 총칼을 들고 보초를 서는 병사의 뒷모습을 담은
것이다. 초소에서 먼 산풍경을 바라보며 대동아공영의 '성전' 승리를 꿈꾸는
병사의 표정이 결연하다. [기관총을 쏘는 병사]는 연필소묘에 담채를 가한
소략한 삽화로 기관총을 중심으로 사수와 조수의 상반신을 그린 것이다.
예비탄창을 들고 웅크린 조수의 자세나 적을 향한 눈초리는 매섭기 그지없다.

이처럼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주제의 그림 제작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심형구는 단체활동에서도 선도적이었다. 그는 1941년 2월
22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여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 서양화부 이사로 참여한다. 이
단체에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일본인들 관료 화가들과 함께 김은호*,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이상 서양화부), 김경승(조각부) 등이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심형구는 이들보다 한 급 높은 이사의 위치였다. 더욱이
조선인 이사로 {매일신보} 학예부장인 백철*도 있었으나 조선인 화가로는
유일하게 심형구가 뽑혔다. 친일활동을 인정받아 그러한 위치에까지 오른
것이다.

한편, 심형구는 그 예우에 답하기 위하여 문인들과 더불어 시국좌담회,
강연회 등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조선미술가협회가 황민문화(皇民文化)
건설을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서 조선문인협회, 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들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소속으로 결합되면서 생긴 예술가
단체 연락협의체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리하여 심형구는 '조선미술가협회'를 이끄는 조선인 화가의 행동대원이
되었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성전' 승리를 위해 농민에게는 증산을,
화가들에게는 그것을 작품화하도록 부추겼으며, '선전미술협회'나
'보도사진협회' 등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1942년 11월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여 첫 전람회를 갖은 '반도총후미술전'에 김인승*, 김기창*, 장우성
등과 함께 초대작가로서 3회(1944)까지 참가하였다. 이 전시회는 '선전'을
압도한 일제 말기의 대규모 친일지향의 전람회였다. 여기에 출품된 주제들은
'방공훈련', '징병제도를 맞이하며' 등 주로 군국주의에 야합하는
내용이었다.

심형구의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대표적인 친일미술 활동은 김인승*, 박영선,
김만형,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등과 함께 '단광회'(1943)에 참여한 일이다.
그리고 심형구가 자행한 친일활동의 백미는 '황도학회'의 결성 발기인에 낀
사실이다. 안석주와 함께 참여한 황도학회는 조선인을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하려는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황도교육'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특히 이를 통해서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계
인사로서 심형구의 정치적 수완과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역시 아무나 친일파가 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실력파


이처럼 친일파 화가의 선봉장이 되기까지 심형구의 행적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실력파답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심형구는 용인의 지주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심종협(沈鐘協)은 광주군수를
지냈고, 할아버지 심원용(沈遠用)은 교회 장로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인정받았으나 집안의 반대로 갈등을 겪다가 형 심원구의
도움으로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학교 때 서울로 옮겨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학교)를 다녔고, 같은 반의
정현웅(鄭玄雄:월북화가)과 어울려 그림공부에 주로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를 두 번 실패하고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데생 훈련을 거친 후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였다(1931).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 1년 늦게 입학한 김인승과 만나
두 사람은 모두 실력파 학생들로 친교를 두터이 가졌다. 또 이들은 '선전'
참여와 친일활동으로부터 해방 후 이대 미대 교수를 지내기까지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심형구의 소질과 탁월한 실력은 이미 도쿄미술학교 재학 시절에 제15회
'선전'(1936)에 첫 출품하여 [노어부]로 특선한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연이어 다음해인 16회 '선전'에서는 풍경화 [해변]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7·18회에는 물론 제19회(1940)에도 [소녀들]로 연속 특선하여 추천작가의
영광을 안았다. 19회 때는 앞서 거론한 [흥아를 지키다]를 함께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 때 이인성과 김인승도 연 4회 특선의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전'(1944)에는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의 특혜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역시 그의 열렬한 친일활동에
대한 대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도쿄 시절에는 일본의 권위 있는 '제국미술원전람회'와
'문부성미술전'에 출품하여 특선과 입선을 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심형구의
작품세계는 인물화나 풍경화의 넓은 붓질과 대담한 색면 처리, 황갈색조의
향토색 소재나 형식으로 역시 당시 도쿄미술학교풍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러한 심형구에 대하여, 그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77년 문화화랑에서 가진 '심형구 회고전' 화집의 발문을 쓰면서 '부드러운
인품과 성실한 자세'를 높이 산 바 있다. 회고전은 미망인 김자경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심형구가 그러한 인품과 생활자세로 일제 말 친일행각에
앞장 섰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심형구도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시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과 함께 친일파로 분류되어 제외당했다. 그러나
성악가로 일제에 부역했던 부인 김자경과 친일여성의 선두주자인 김활란*의
친분으로 이화여고 미술교사를 하다 1945년 최초로 미술과를 이화여대에
창설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심형구는 이대 미대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낸 것을 제외하면
9년여의 미국생활(1949∼58) 탓에 해방 후 화단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55세(1962)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김은호, 김기창,
김인승 등 친일작가의 경우와 달리 3·1 문화상이나 문화훈장, 예술원 회원의
그 흔한 영예(?)를 누리지 못하였다.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심형구, [시국과 미술], {신시대}, 1941.10.

참고 작품사진

심형구, [흥아를 지키다], 1940년 작 유화.

심형구, [기관총을 쏘는 병사], 조선식산은행사보 {회심}지 1944년 2월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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