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28) - 이광수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28) - 이광수

※※※ 1 2,890 2004.08.07 09:29

이광수(李光洙) 1892-?


1. 가계

아버지는 종원(鍾元)이며, 어머니는 충주김씨(忠州金氏)이다.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어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2. 일본유학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일을 맡아보다가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메이지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경시간에서 익힌 기독교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 奴隷〉, 18일에 일문 〈사랑인가〉, 24일에 〈호 虎〉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3. 귀국후 문필활동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시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스토(Stowe, H. E. B.)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전영택(田榮澤)·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 〈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윌슨 미국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 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으며,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 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고, 이때에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단종애사〉(1928)·〈혁명가의 아내〉(1930)·〈이순신〉(1931)·〈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


4. 평가

이광수의 문학관은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는 작자의 말을 참고하더라도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무정〉을 ‘노일전쟁에 눈뜬 조선’, 〈개척자〉를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전까지의 조선’, 〈재생〉을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을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사실주의문학을 지향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전쟁을 겪었고, 부모를 잃은 뒤 동학당 일을 본 탓으로 일본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을 때가 노일전쟁중이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일전쟁 폭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으며, 6·25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논설문·시가·수필류·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언론인·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연구자들은 그가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검토하고 있다.




다음은 1941년 1월에 『삼천리』에 실린 이광수의 친일행적 중 하나이다. 

신체제하의 예술의 방향
 

예술이라는 말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묘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한 작품을 놓고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하는 단안을 받게 되면 그 작품은 죄를 지은 것이라. 법률로 말하면 死罰(사벌)이다. 이리하여 예술론 중에는 소위 예술지상주의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예술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흔하게 목격하게 한다.
예술이라는 말은 원래 동양에 없었던 말로 서양 말을 번역한 것이다. 서양의 예술이라는 말은 재주라는 말이다. 교묘한 업이란 것을 의미한 말이다. 영국말로는 '아―트', 독일 말로는 '쿤스트'로, 교묘한 재주, 교묘한 업을 의미한다. 교묘한 업이라면 동양인이라고 못할 일은 없으나 그래도 예술이라고 하면 신비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이냐. 옛날로부터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최초의 영국의 슨자―는 예술은 '풀에이', 즉 '즐거운 母乳(모유)'로부터 생겼다고 한다. 아이에게 어머니가 젖을 먹이고는 즐거이 놀기 위해서 춤을 추게 되는 것을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한 개의 즐거움이다. 즉 재미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로 재미가 예술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 재미에는 여러 가지 계급이 있다. 품이 높은 것과 저열한 것이 있다.

호올은, 예술은 '감정의 말'이라고 정의했다. 즉 감정을 남에게 전하는 것을 예술이라 한다. 공포의 감정, 분노의 감정, 사랑의 감정, 슬픔의 감정, 미움의 감정, 이것은 심리학이 가르치는 기본감정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 중에는 부모의 사랑, 사제의 사랑, 이성의 사랑 등이 있으며 미움이나 슬픔이나 기쁨도 역시 각이한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중에서 어떠한 감정을 어떠한 말로 민중에게 던지려는가. 이 던지는 것에 소위 예술적 양심이라는 것이 일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라고 해서 우리는 아무 작품이나 만들 수는 없다. 고로 문학이나 영화를 통해 문화의 발달을 보기 위해선 이 신체제 하에 있어서 어떠한 감정을 선택하여 대중에게 전할까 하는 것이 한 개의 문제일 줄 안다.

신체제 하에 있어서 예술의 각 부문은 건전한 사상과 건전한 감정을 자극하는 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영화만치 가장 세력을 많이 가진 문화 부문은 없다. 문학보다도 영화는 더 많은 대중을 획득하고 있다. 기독교나 불교의 신자의 수보다도 영화신자가 몇 배 이상으로, 그 세력은 세계 一을 점하고 있다. 매일 영화관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대중을 획득하고 있는 영화가 低劣(저열)한 작품을 제작하여 대중에게 악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영화가 인간의 혼을 살해하는 살인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문학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인의 적은 무엇이냐. 문학과 영화는 우리 문화인의 진실한 伴侶(반려)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우리의 진정한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나 문학을 통해서 품이 높은 즐거움, 즉 건전한 사상과 건전한 감정을 자극시키지 못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불건전한 사상과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시키게 되면 그것은 우리 문화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이 아닐 수 없다. 전장에서 한 병정은 적을 열 사람 최고로 스무 사람을 죽이게 되지만 나쁜 문학과 나쁜 영화는 수백명, 수천명을 살해할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나려가며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히 영화는(다른 예술 부문에도 없는 바는 아니나) 일반대중의 低劣(저열)한 감정을 사기 위해서 즉 營利(영리)를 목적하는 작품이 왕왕 제작되는 때가 많다.

예술의 각 부문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그 예술로 하여금 상품화시키는 일이다. 영화를 제작할 지라도 인생의 감정과 靈性(영성)을 미화시키기 위해서나 또는 인생의 감정을 높은 데로 끌어올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영리를 목적하는 때가 많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한 폐해로 금일의 말을 빈다면 이윤추구 즉 자기의 이익만을 목적하는 자유주의의 폐해인 것이다. 예술은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자본주의, 자유주의, 상업주의는 明治維新(명치유신) 때 구미사상이 끌고 들어온 것이다.

영화는 예술의 일부문이다. 내가 현재 직업하고 있는 문학도 無論(무론) 예술의 일부문이다. 원래 문학예술은 옛날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아왔었다. 그것은 옛날로부터 문학예술가인 소위 선비는 인체로 빈한했었다. 그것은 그들은 돈에 자기의 지조를 팔지 않았고, 돈 때문에 글을 쓰지 않았으며 비록 餓死할지라도 더러운 일로 얻어진 돈으로서는 목을 축이려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예술가는 즉 선비는 인격자로 존경을 받아 왔었다. 그렇다면 신체제 하의 문학과 영화도 개인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을 버리고 전체주의 사상 밑에서 국가를 위하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아세아주의 사상 밑에서 동아신질서 건설과 동아경영권의 수립을 根底(근저)로 하나 문화활동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왕왕 예술을 대단한 것으로 알고 높이 평가하는 일이 많다. 나도 예술가의 한 사람이지만 예술은 높이 평가할 것이 못된다. 그것은 자기가 예술가일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낮게 평가할 것도 아니다.

히코-아스의 말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17,8년 전에 조선에서도 상당히 부르짖은 소위 예술지상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사자-로의 말에는 "인생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예술과 함께 예술"이라는 말로 사용된 말인데, 인생을 위한 예술이 아니면 예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술지상주의자 편에서 볼 때는 예술은 예술문화가 목적이오 결코 인생을 위해서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그러한 법리적 흑백으로 부칠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술지상주의자의 예술론이다. 이러한 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예술에 나타내는 것인데 이러한 주의는 탐미주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술지상주의자를 청산하는 것이 문학의 신체제요 영화의 신체제 즉 예술의 신체제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생을 위한 예술주의 중에도 인생이라고 하는 말의 해석 여하에 따라 묘하게 된다. 즉 인생을 하늘보다도 높다고 본다던가 국가보다도 크다고 보아서 국가도 나를 위해 있는 것이오 내가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게 되면 이 역시 신체제하에 허용되지 못할 예술론인 것이다.

나는 지금이 비상시라고 해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생은 어데 있느냐. 인생은 없다. 이 말은 성서에 있다. 인생이 없다면 "나"는 어데 있느냐. "나"라는 것도 없다. 이것도 성서에 기록된 말이다. 인생이 여기 있다는 즉 "내"가 있다는 것부터가 벌써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전체를 "나"로 인식해야 하며 진정한 "나"는 나를 떠나서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과 영화 등 문화의 각 부문은 전체주의, 국가주의를 기조로 하는 신체제에 참가하여야 할 것이며 조선의 예술군도 내선일체 하에서 국가를 위해 그 보조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부하는 것은 내선일체 문제에 있어서 조선인은 대화족과 조선인의 피가 다르다고 해서 즉 혈통이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내심으로 환영하지 않는 분자가 있는 듯 싶다. 그러나 內鮮(내선) 양 민족은 피를 함께 한 민족이다. 2000년 전에는 한 민족이었으며 그 후에도 1200년 전 경에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백제의 자손들이 내기 崎玉(기옥)의 高麗村(고려촌)에서 일본인과 결혼하여 그 후손은 混血(혼혈)한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으며, 1800만 人이나 算(산)하게 된다. 그리고 더욱 惶悚(황송)한 말씀이나 황실에도 2차나 조선의 피가 섞이셨던 것이다. 이 말은 總督府에서 해도 좋다 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槿記하는 바인데, 제1회는 역사에도 분명히 기록되어져 있는 神公皇后(신공황후)께옵서는 신라 天日槍(천일창)의 후예시다. 그때 처음으로 일본황실에 신라의 피가 섞이셨고 그 후 桓武天皇(신무천황)께옵서 京都(경도0에 서울을 御定(어정)하옵신 平安朝初(평안조초)에 桓武天皇(환무천황)의 御母后(어모후)께서는 백제의 성왕의 증손녀였었다. 이렇게 황송하옵게도 황실을 비롯하여 臣民(신민)에 이르기까지 내지인과 조선인의 피는 하나로 되어 있으며 이로써 우리는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써 충의를 다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및 우리의 예술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삼천리』 1941년 1월




참고문헌

春園硏究(金東仁, 新丘文化社, 1956)
春園李光洙(朴啓周·郭鶴松, 三中堂, 1962)
李光洙全集 1―20(李光洙, 三中堂, 1964)
韓國人과 文學思想(金鵬九外, 一潮閣, 1964)
韓國近代文學硏究(金允植, 一志社, 1973)
現代韓國硏究―李光洙論―(李善榮, 民音社, 1976)
李光洙(김현編, 文學과 知性社, 1977)
韓國近代小說硏究―李光洙―(尹弘老, 一潮閣, 1980)
崔南善과 李光洙의 文學(申東旭編, 새문社, 1981)
李光洙小說硏究(丘仁煥, 三英社, 1983). 〈尹弘老〉


Comments

과객 2004.08.07 19:14
이광수는 현대의 안티기독교 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기독교인이면 영원한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이광수는 한 때 기독교인이었으나 기독교에 실망을 하고 기독교를 떠나서
기독교를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그의 비판 내용은 지금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광수는 행적에 따라 안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분류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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