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3) - 정인과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친일행각

한국을 망친 친일파 개독(3) - 정인과

※※※ 0 2,535 2003.10.25 20:57

약력 (정 인 과)
 
1888 - 평남 순천 출생
1911 - 평양 숭실 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 졸업
1913 -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유학
1919 - 미국 산엔셀모 신학교 졸업
1919 -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활동,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
          임시정부 외무차장 역임
1920 - 10월 외무차장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미국으로 돌아감)
1921 - 프린스턴대학 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
1923 - 프린스턴대학 정치사회학과에서 문학사 취득
1924 -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 공부 중 11월 말경 귀국
1925 -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
1930 - 1월 25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 무혐의 처분
1937 - 6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
1939 - 장로교 총회 중앙상치위원회의 총간사로 취임
1941 -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1942 - 기독교신문협회 회장
1949 -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
1972 - 사망



초기 독립운동 경력과 변절 (정 인 과)
 

3.1 운동 당시

정인과는 3.1운동 당시에는 미국에 유학 중 있고, 3.1운동 소식이 전해진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봉사하기 위한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의 대표 안창호를 수행하여 중국의 상하이로 간다.

임시정부에서의 활동(1919~1920)

임시정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 및 외무차장으로 활동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감
국내활동(1924~)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중 1924년 귀국하여 국내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으면서 활발한 국내 활동을 전개(1925년)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감시 받던 중, 1930년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의 강연내용이 문제가 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고 풀려남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
변 절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흥사단과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에,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협력하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남
그 후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에 가담






주요 친일 활동 (정 인 과)
 

참가한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총간사(1939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기독교신문협회 회장(1942년)
친일 행각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장로교 중앙상치위원회 총간사로서 부일 협력
[장로회 지도요강] -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 (1940년11월10일 매일신보)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 (매일신보 기고문 1941.9.3~9.5)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친일잡지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
친일잡지 {조광} 1942년 2월호에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
기독교계의 부일협력 기관지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일경에 의해 지명됨.
{기독교신문}의 창간사 -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정인과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鄭仁果, 창씨명 德川仁果, 1888∼1972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연맹 결성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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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장로회 총회는
이듬해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 연맹 이사장으로 윤하영 목사,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를 선임하여
'종교보국'이라는 미명하에 적극적인 부일협력에 나섰다. 다음은 1940년
정인과 목사가 총회에 보고한 이 연맹의 사업 내용이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私的)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이만하면' 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면)
 
이는 장로교가 다른 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여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러한 장로교 부일협력의 중심적인 인물이 바로
정인과 목사였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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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대표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
 
 
정인과의 본적지는 경성으로 되어 있지만 평남 순천 태생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191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잠시
숭실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8월 사임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19년 산·엔셀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그가 미국에 있을 때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그 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3·1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의
교포단체인 국민회는 "원동에 대표를 파송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봉사"하게 한다는 결의를 하고 이에 따라 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 안창호를
특파원으로 파견하고 정인과, 황진남이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5일 미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5월 25일 목적지인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6월 28일에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게 되고,
안창호를 수행했던 정인과와 황진남은 7월 7일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미령(美領) 교민 대표로 의원이 되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과는 8월 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당시
부의장이었던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서 업무 때문에 부의장을 사임함에 따라
부의장 보선 투표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손정도 목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부의장인 정인과가 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외무차장을 맡아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동양
유람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여운형 등과 함께 이들에 대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내분이 격화되고 독립에
대한 전망이 흐려지자 1920년 10월경 외무차장직과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임(그의 사임은 1921년 3월 18일 제1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수리되었다)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인과는 임시정부에서 떠나기는 하였지만 바로 국내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다시 건너가 1921년 프린스턴 신학연구과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고 1923년에는 같은 대학 정치사회학과에 들어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영국과 중국을
거쳐 1924년 11월말경 입국하여 1925년부터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협동총무를
맡았다. 그 때부터 그는 각종 강연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24년 11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중국
남경(중국어로)발로 정인과에 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정인과 씨 환영.……12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풍상을 겪으며 학업에
힘쓰던 정인과(鄭仁果) 씨는 재작년 미국 가주(加州)에서 신학(神學)을
졸업하고 다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더욱 연구를 가하야 신학사(神學士)와
문학사(文學士)의 존귀한 학위를 얻고 다시 교육학을 연구하다가 금년 여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만국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하고 동아의 그리운 땅을
밟고저 나오던 길에 상해에 들렸는데 동지의 간곡한 권고를 못이겨 할 수
없이 길을 멈추고 중국에 얼마 동안 있게 되었는 바,……씨는 년전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띠고 많이 노력한 일도 있었다더라."
 
이러한 전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인과는 일제 경찰에 의해 평소에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성진에서 개최된 유년주일학교
대회 겸 부흥회에서 한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30년 1월 25일에
보안법위반 혐의로 3일간 성진경찰서 구류되어 조사를 받고 불구속으로
풀려났다가 그 해 5월에야 경성지법에서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고향인 평남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피의자 소행 조서]에서는 그를
"성품이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강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다"라 한 뒤,
"전과는 없으나,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비밀결사 조직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요시찰인(要視察人)에 편입되어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극적이지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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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
 
 
정인과 목사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취조를 받은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동우회
사건이란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앞두고 조선 지식인 내지 지도자들을
적극적인 정책 협력자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그간
묵인하거나 방조하였던 민족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사건이었다.
정인과는 미주와 상해 등지에서부터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서도 같은 계열인 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미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오문환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제 경찰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도 적극적 친일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해방 후
어떤 목사는 익명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타무라(北村)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으로 영전되자 H의 활동 무대는
서울로 옮겨졌고 대담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 중 선교사가 쫓겨나자
대영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를 작난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종교교육부의 C를 무사히 석방시켜준 구실로 그를 황국신민으로 전향케 하여,
군기헌납운동에 열광케 했다."
 
여기는 H는 오문환이요, C는 정인과 목사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듬해인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이른바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듬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총간사로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이 상치위원회는 1940년 11월 성명과 함께
[장로회지도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체의 본의에 기하야 당국의 지도를 준수하고 국책에 순응하야 과거
구미(歐美)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切)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야금 그 직에서 멸사봉공의 성을 봉하야 충량한
제국신민으로서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질서의 건설에 용왕(勇往) 매진키를
기함."
                                    ({매일신보}, 1940. 11. 10)
 
이어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로 할 것과 찬미가 등 전기독교 서적
출판물을 검토하여 일본 국체에 배치되는 자구를 개정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이미 일제측이 마련한 것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제측의 요구대로 정인과를 중심으로 한 상치위원회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본질까지도 내팽개치고 교회를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르는 어용
교회기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특히 정인과가 1942년 5월 11일
국민총력조선야소교장로회총회연맹 총간사 도쿠가와(德川仁果)라는
창씨명으로 각노회연맹 이사장에게 보낸 [헌종(獻鐘)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공문은 위협적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일제에 협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 4월 24일부로 공문을 발하였던 바, 5월 5일까지
다수 보고서가 도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全)노회의 보고 통계서를 작성함에
곤란할 뿐더러 당국 관계 방면에도 크게 영향이 되는 동시에 귀노회연맹의
사무처리상에도 여하한 영향이 미치게 될 점까지 착념하여,……귀노회 연맹의
헌종 보고서를 꼭 제출하도록 주의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기독교신문}, 1942. 5. 20)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회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매일신보}에
1941년 9월 3일부터 5일까지 3회에 걸쳐 기고한 [일본적
기독교로서-----익찬일로의 신출발]이라는 글에서 장로교의 친일협력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 50년 동안이나 구미사상에 교착되었던 조선기독교가 불과 3∼4년간에 그
거단(巨團)을 움직여 시국의 기치 아래 일체 동원이 되도록 기구가 혁신되어
감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함양해 온 교단으로서 현명한 당국의 선도와 지도적
원리를 일단 해득하게 될 때에 당국 신뢰의 추세는 실로 창류(漲流)의 감을
금치 못한다……그렇다고 해서 자화자찬으로 우리는 결코 이에 만족치
아니한다. 앞으로 일보 일보 내선일체의 철저화에 최후적 단계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하려 하는 바인즉 사회 각 방면의 편달과 당국의 끊임없는 선도를
기대해 마지 아니한다."
 
즉, 부일협력을 자랑으로 여기고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청할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특집
'영미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미·영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고, {조광}
1942년 2월호에도 [필승의 신념]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친일논설을 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정인과를 매우 신뢰했으며 또한 비호했던 것 같다. 한때
신사참배문제로 60일 동안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전필순은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신문할 때 사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러했다. 만주에 있는 선교사 헌트(韓富善)
씨와 결탁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 장본인을 지명수배해서 잡아
가두어 그 일을 좌절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져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의 인물은 정인과 씨인데 장본인은 나를 위시한 모모
인사들이라고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 사이가(齋賀)라는 작자의
설명이었다. 그는 또 정인과 씨와 사이가 좋아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고려할 일이지마는,
여하간 분노가 들끓어 치솟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목회여운}, 97면)
 
성서공회도 영국인 홉스 총무가 떠난 후 정태응 총무가 맡고 있었으나 일제
당국은 그를 간첩혐의로 검속하고 1941년 4월 1일부터 정인과에게 맡기도록
지시하였다가, 이듬해 5월 23일자로 적산으로 압류하고 말았다.
 
일제가 모든 기독교계 신문 잡지를 폐간시킨 후 1942년 4월 유일한
교계언론으로 {기독교신문}을 창간할 때도,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사노(佐野吾作)는 정인과 목사를 이 신문의 발간 주체인 기독교신문협회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이것도 그가 얼마나 일제 경찰의 신임을 얻고 있었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는 일제 경찰에 철저히 '순응'하여
비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소위 천장절에 창간호를
내게 되는데, 정인과는 이 신문의 창간사에서 발행 목적과 강령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고로 본보(本報)는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진전에 기여하려고 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취의(趣意)하에 본보는
 
1. 반도 기독교 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1. 각교파 간 돈목(敦睦)의 기도(企圖)와 각파 간의 연계 합동의 추진
 
1. 건전한 신앙의 발달과 교화기능의 증진
 
1. 종교의 국민정신작흥과 국민사상 계도
 
1. 상의하달(上意下達)과 하정상통(下情相通)의 원활
 
1. 필승체제 확립에 관한 계도(啓導)
 
1. 내선일체의 완성과 국어(일본어) 생활의 철저
 
1. 국민 개로(皆勞)
 
1. 부인 계발
 
1. 교내 여론의 통일 지도
 
등 강령을 실행하려 한다."
 
이 신문은 그 첫호부터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충실하여, 해방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기독교계 부일협력의 유일한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정인과 목사는 이러한 적극적인 친일행각 때문에 해방 후 기독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1949년 2월 22일에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이에 대하여
 
{반민자죄상기}(1949)는 ['유다'의 직계 정인과]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22일 특위는 8·15 전 일제에 충성하는 데 민족과 신앙을 판 새로운
'유다' 정인과를 체포하였다.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목사로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주께 영광이 있으라'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던
목사 정인과는 배신자로서 '유다'도 놀라게끔 전쟁 말기에 온갖 매족·매교
행위를 하였으니 기독교 대신 신도(神道)니 황도(皇道)를 모시고 기독교
총진회장이 되어 신도배(神道輩)들과 손을 잡고 신궁참배를 한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남산 돌층계를 오르내렸으며, 십자가 앞에 수난의 미사를 올리는
양같은 교인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 신궁참배를 시켰다. 여기서 한 수를 더 떠
헌금헌납운동을 일으키고 신궁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비국민'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 '참회를 하라'고 도리어 꾸짖고 대들었으며,
신궁참배 않는 교회는 그 교회당까지 일제와 손을 잡고 폐쇄 혹은
팔아먹기까지 하였다. '신궁을 참배하자', '성전(聖戰)에 헌금 헌납을 하자',
'신도와 황도를 모시고 이 앞에 고개 숙여 기도를 하자'고 설교하기에 목이
쉴 지경이었으며 여기서 더욱 광신에 들떠 '미소기(목욕제계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의식----인용자)를 한 번 해 보지' 하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이토록 기독교를 팔고 민족을 파는 데 애쓴 대한판(大韓版) '유다' 정인과는
지금 죄의 심판을 앞두고 신궁 대신 철창 안에서 무슨 기도를 또 하느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지나친 친일행각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석방된 후에도 교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경기도 파주, 송탄 등지에서 외롭게 은거하다가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론}, 1939∼1942.
{매일신보}, 1940.
{기독교신문}, 1942∼1944.
{반민자 죄상기}, 1949.
전필순, {목회여운},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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